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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4:1~6 2011-04-03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  
지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던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율법 속에서의 제한된 영광과 복음 속에 영원히 빛날 영광을 비교하면서 증거하였다.

그럼에도 이 영광이 선택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받으면서 잠시 나타난 광채의 모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던 것처럼 가려져서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열어 놓으신 은혜의 통로를 통해서 보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로 와야 벗어질 수건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가려져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인류에게 주어진 생명을 전달하는 일꾼들의 역할과 그 영광된 복음을 담은 질그릇을 비유하면서 우리의 부서지기 쉬운 사람으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담긴 보배로운 복음 때문에 귀한 처지로서 절망을 넘어서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사실 바울의 사도권을 증거하기 시작하는 이 부분에서 한계를 가진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럼에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태초의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비춰주셨다는 고백을 선언하고 있다.

세상은 요한 사도의 증거대로 죄로 인해서 어두움에 처해있고[요일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하나님의 예정과 역사를 따른 복음에 순종하여 거듭남이 없이는 이 빛을 발견할 수 없음에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빛을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자신과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서 이 인류의 마지막까지 이루실 것이라는 자긍심을 고백한다.

오늘도 우리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이 빛의 일꾼들이 되었다는 자긍심과 받은바 역할에 충성함으로 이 역사의 종말에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감사와 자긍심으로 설 수 있는 …



Ⅰ. 하나님의 일꾼의 자세.(1~2, 5)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 사도는 어떤 입장에 있던지 자신이 이 복음과 교회를 핍박했다는 사실 때문에 늘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래서 복음을 위해 일꾼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의의직분을 말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오는 많은 사람의 대항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의의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1)

실지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교우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까지 고백한 바 있다.

1. 부끄러움의 일은 버려야 한다.(2f)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아무래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간적인 속임과 비방의 방법으로 그 일을 모르게 진행하고 있었던 것 갖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숨어서 행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은 빛을 들어내는 일인 복음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섞지 않고 진리를 나타내야 한다.(2b) “…하나님의 말씀을 ①혼잡하게[헬, 돌로오(doloo), 섞음질하다] 하지 아니하고 ②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③하나님 앞에서 ④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이 말씀은 이미 2장 말미에서 증거했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2:17)고백의 확인이다.

3.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예수의 주되심과 주님 때문에 섬김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5) “우리는 ①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②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③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

바른 하나님의 종의 기준은 여기에서 판단이 가능하다. 인간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는 복음의 일에는 절대적으로 합당치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섞어서는 안되고 오직 불변하는 진리를 들어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을 선전하거나 자랑해서는 안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과 그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음을 고백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렇지 못해서 복음에 식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이런 고백과 자세로 주님을 자랑하는 …



Ⅱ. 복음을 순종하지 못하는 자들.(3~4)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와 같이 신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문제이다. 이미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한 바 있다.

또 그 이유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고 증거했었다.

말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결국 수건이 가려져서 영광의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앞의 가르침처럼 들음에도 듣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구미가 없거나 들려지지 않는다면 탄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V4에서는 좀더 두려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4)

①이 세상의 신이; “세상[헬,아이오노스( aionos), 세대의,]” 신이다. 에베소서6:12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했는데 바로 공중권세 잡은 주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이름이다. 악한 영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광채기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영들이다.

②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헬, 튀플로오(tyfloo), 눈을 멀게 하다, 어둡게] 하여; 즉 마음의 눈을,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어둡게 한다는 말이다. 어둠의 영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요한 사도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③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 이것은 악의 영들이 마음눈을 어둡게 한 결과이다. 모든 자연적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로 인해서 어두움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고 이 어두움이 세상의 어떤 빛으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인데 오직 한 빛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적 광채만이 이 어두움을 몰아낼 수가 있음에도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원한 어두움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가 이 비극에서 벗어난 자들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할렐루야!

오늘도 변함없이 어두움의 영의 유혹보다는 영광의 빛이요 생명의 능력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충만한 …



Ⅲ.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6, 4b)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을 친히 앞에서 바로 뵐 수 있는 사람은 이 역사 속에 아무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친히 뵐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는 제자 빌립에게 “…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던 것을 읽을 수 있다.

같은 요한복음의 시작에서부터 예수께서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 이것은 분명히 창세기 1:3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라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절망 위에 빛을 지으셨던 그 같은 하나님께서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사실 인류에 복음을 주신 것은 이것을 위해서다. 죄로 말미암아 칠흑 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죄를 순종하고 받아들여 거듭나게 하시고 두 번째 창조의 빛을 비춰 주시는 것으로 이 빛이 바로 성령이시다.

이미 바울 사도는 앞장에서 이 광명한 영광에 붙잡힌 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고 확인한 바 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을 향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고 확인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앞의 4b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헬, 에이콘(eikon), 모습, 초상, 모양]이니라” 하였는데 골로새서1:15 같은 낱말로 쓰여지고 있는 것을 읽게 되는데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라고 기록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모습이시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경계로 고린도 사람들에게 두려운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건 새언약의 일꾼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다른 것을 섞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랑하는 것은 더더구나 금하고 있는 사항이다.

이렇게 진실된 복음의 증거에도 불순종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이고 어두움의 세상 영을 따르는 가련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복음에 순종하고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