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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10:1에서도 “바울은 같이 있을 때는 약하면서도 떠나 있을 때는 하고 싶은 소리를 다하는 담대한 척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바 있는데 오늘 읽은 v10에서도 비슷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는 힘이 있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를 직접 대면해보면,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없다.”[알기 쉬운]
바울 사도가 세상적인 기준이나 가치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미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수없이 고백하는 것은 세상의 죄악 된 삶의 방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사실을 증거한 바 있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바울 사도의 간절한 권면이나 요청을 담은 눈물 어린 편지를 마치 협박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고린도 교우들의 모습은 결국 고린도에 가만이 들어와서 인간적인 것들로 현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바울을 모함하고 관계를 끊으려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하다.
그것은 인간적인 섭섭함이나 억울함보다도,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한결 같은 자세는 자신의 처지나 입장이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께서 존귀를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붙잡히게 된다면, 자신은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 까지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려는 충성된 종이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이런 입장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호소하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는 결코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는 것이 아님이 너무도 분명하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세우려고 자신을 포기할 수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실 것이고 귀하게 쓰실 것이다.
이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도, 우리 각자의 입장을 세우고 변호하려는 것보다는, 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난관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과 천대와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기쁘게 드리고 낮추고 포기할 수 있는 …
Ⅰ. 바울은 협박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9~11)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눈물 어린 호소의 편지를 썼던 것은 겁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바 있지만 바른 신앙의 권면은 어떤 경우에도 협박을 위해서 쓰여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법이신 주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내가 편지들로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9-알기 쉬운) 권위는 세우려고 주신 것이지 무너뜨리려고 주는 것이 아님을 말한바 있다.
정작 대하면 큰소리 한번 못 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할 소리 못할 소리 다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울분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지 말아야 할 것도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앞에서 권면하고 없을 때는 허물 하지 않는 대범한 자세가 하늘의 영광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 편지로 쓰는 말과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 둬야 할 것입니다.” 이중적이지 않은, 말과 행동이 같은 삶이, 주님을 증거하는데 호소력이 있다. 오늘날 오히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을 보는 세상의 평가가 비판적이다. “당신의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간증은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H. A. 아이언사이드) 협박보다는 격려로 …
Ⅱ. 신앙의 기준은 자신이 될 수 없다.(12~14)
남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약점이나 수치는 철저하게 감추고 자신의 장점만을 내세우는데, 사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그렇다. 바울 사도는 이미 이런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고 안타까워 한바 있다.
세상의 상대적인 논리에서는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앙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특히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유치한 어린아이이다. 신앙의 기준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빌3:12~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습에 미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자랑할 것이 없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세상적인 기준이지 하늘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어두움의 지혜일 뿐이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스승들은 자신의 일할 자리인지 아닌지도 가리지 못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같이 날뛰므로 고린도교회를 상하게 했던 것이고 바울은 이를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을 받아(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린도에까지 복음으로 나아가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인데, 거짓 스승들은 이런 기본적인 원리조차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14)
자신을 기준으로 남들을 저울질하는 유치함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아 항상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고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
Ⅲ.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15~18)
어떤 사람들은 분수이상으로 자랑하고 떠벌려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주님께 누를 끼치는데, 좀더 지나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일해놓은 것까지 자신의 공로로 차지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행위이다.(15f)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이 자랄수록 진리의 기준을 따르게 되고 내적임 풍성함으로 고쳐지고 채워지게 된다.(15b)
바울은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고 고백하고, 로마를 지나 멀리 당시의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까지를 주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전도지로 확신하고 이를 말해왔다.(롬15:23)
v17에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했는데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1)는 말씀과 함께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지혜, 용맹, 富)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하나님(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 정의, 공의를 땅에 행하는 것을 깨닫는 것)을 자랑하라는 당부를 예레미야9:23~24의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8) 이 말씀은 오늘의 제목이면서 결론 같은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듣기 위해서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다.(마6:)
그러나 사람에게 칭찬 듣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마5:16) 이 말씀 ①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라. ②사람들의 칭찬으로 만족하지 말라. ③칭찬은 나중 받도록 주님을 의식하며 일하라. ④누구나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사람의 칭찬은 순간에 그친다. 그러나 미래에 영원한 영광 속에서 모든 성도들 앞에서 빛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남의 수고를 자신의 것으로 도둑질 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수치 당할 일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상주심을 기대하고 묵묵히 감당한다면 “…그 칭찬이 사람에게 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롬2:29b)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b)고 약속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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