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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는 자신들의 투쟁이나 싸움이 결코 세상과 같이 육체를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주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으려고 애쓰는 바울 사도 자신의 복음을 위한 사역의 자세를 증거한 바 있다.
이제 이 11장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종들과 거짓 종들의 차이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의 이유와 고린도교회를 세우면서 자신이 직접 생활비를 벌어 쓰고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연보를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한 일이나 복음을 위한 자신의 헌신을 자랑한다.
3번에 걸쳐 이러한 바울 사도의 자세를 상고하며 오늘 우리 자신의 복음에 대한 자세를 살필 수 있었으면 한다.
Ⅰ.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걱정한다.(1~4)
자신이 하는 말이 푸념이나 이치에 합당하지 못한 것처럼 들릴지라도 자신의 하소연을 꼭 들어달라는 부탁으로 말을 시작하는 바울의 심정을 헤아릴 만 하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그렇고 복음이 그렇다. 인간적으로 걸러내고 가려내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고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먼저 순종이 어려우면 복종이라도 하고 마음의 귀를 열면 나중에는 이해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바울사도는 어떤 일보다도 고린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는데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정결한 신부로 중매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하여 열심을 내노라고 고백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진실된 종이라면 이러한 사역의 목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어두움의 영들은 절대로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는 꼭 같은 이간질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세상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진실함과 깨끗함]뿐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인간들이 만든 파라다이스가 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온 갓 그럴싸한 것들을 들고나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도록 부추기고 있다.
바울의 안타까운 고민은 이것이고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인 28~29에서는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 한 사람의 약함을 탄식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참된 주님의 종이라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4) 했는데 이 얘기는 20절에서도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라고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분한 것으로 무식한 것으로 받아 드리면서 거짓되고 비슷한 것을 말하거나 부추길 때는 잘 따른다는 안타까운 고백이다. 사람은 만물보다 부패해서 그런 것 같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Ⅱ. 주님의 성도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5~8)
바울사도는 다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세워서 말한다. 사실 수사도 격인 베드로 사도에게까지 안디옥에서 사람들 앞에 책망한 적도 있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2:14b)
바울이 자신의 입으로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웅변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지만 구원의 진리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논리적이고 분명한 것을 그를 통해서 기록된 말씀들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가 스데반처럼 성령과 더불어 하는 말은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을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6b)고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겸손의 사람이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7)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높일 수만 있으면 언제나 기꺼이 바보가 되는 것이 바울이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빌립보 교회나 다른 교회들의 연보를 받아서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도둑질 한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헬, 옵소니온(opsonion), 양식, 봉급]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8) 즉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물질이 바르게 사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훔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두려운 교훈도 배우게 된다.
Ⅲ.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고 희생하였다.(9~11)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물질의 부족했음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에게 어려움을 짐 지우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연보를 받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바울의 자랑은 이것이었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값으로 파는 것 같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면서도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9b)고 이러한 자세가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그러할 것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복음에 대한 확신은 양보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10) 사실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은 다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에 가서까지도 자랑스러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왜 저들에게 짐을 지우려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최종적인 고백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전13:5)는 것이기 때문에 즉,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고백한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장애요소를 주지 않으려는 사랑의 사도의 진실한 고백을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에 옳은 것임을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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