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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1:15~18 2012-11-25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내용은 이방인 중에서 천사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듣고 최초로 구원받은 고넬료 가정의 사건이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에게 비난이 되어 이것을 해명하는 베드로의 고백의 내용이다.

어쩌면 이제껏 유대인 상대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에게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준비 시키시는 동시에 고넬로에게도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청하도록 당부하셨음을 본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행한 이 귀한 구원의 역사들 기존의 예루살렘이 있던 사도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었고 이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베드로에게는 어쩌면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음을 본다.

먼저는 이방인 최초로 구원을 받음 고넬료의 됨됨이를 볼 필요가 있다. 10:1~4에 보는 대로 로마군대의 대대장쯤 되는 군인으로 이스라엘에 와서 있었지만 지배국의 군인임에도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기록되고 있고 그 결과로 고넬료는 기도하는 중에 천사를 만나게 된다.

특히 천사를 통해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10:4b, 31)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사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사람과 가정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나름대로 경건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을 주님께서 아실 정도까지 하였지만 아직 구원의 편에 서지는 못했음을 본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우리가 읽은 바로 앞 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14)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그의 경건한 가족이 이미 구원을 얻었다면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하신 것처럼 주님은 마침내 주님을 향하여 간절했던 아직도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그 가정을 찾으시고 구원하셨다.

그런데 이 최초의 이방인 구원은 이방인 사도인 바울을 통해서가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이루심도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였다.



Ⅰ. 사도들과 같이 성령께서 임하셨다.(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여기서 독특한 것은 사도들에게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던 것처럼 이 고넬료의 가정에도 안수하거나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구할 때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듣고 있던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내려 오셨다는 사실이다.[별지1]

10:34~43 내용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심판 주로 다시 오실 주님의 역사를 자신들이 친히 경험했고 그의 이름을 믿으므로 사죄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증언이라는 내용이었다.[별지2]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10:45)

주님의 약속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것으로 확신을 하고 여태껏 베드로는 성령을 통해 자신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해를 못했었는데 이방인을 자신들과 같이 구원하시는 모습을 고넬료의 가정에서 확인하면서 놀랐다는 사실이다.

비록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하셨지만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베드로가 이해했던 것은 비록 땅끝일지라도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방인에게 자신을 보내시고 그들에게도 자신들과 꼭 같은 성령을 주심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판단에 잡혀 있던 것을 회개했다는 고백이다.

물론 이 고넬료의 가정에는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이 먼저 주어진 이유도 이들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인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Ⅱ. 성령 받기 전의 주님의 약속이 확신되어졌다.(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이 말씀의 최초의 선언자는 세례 요한이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

그리고 십자가에 구속을 완성하시고 죽으신 후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확인해 주신 말씀이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그러나 이 말씀도 최초 세례 요한의 증거와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부분의 삭제이다.

이러한 의미는 당연히 구원 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 대한 약속이지만 구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사도들에게 당연히 성령의 약속을 주신 것이고 비록 이방인이지만 고넬료의 가정에 구원의 보증인 성령께서 임하심을 보면서도 이방인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증언이다.



Ⅲ.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사람이 막을 수 없다.(17~18)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어떤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는 두려운 가능성을 여기서 배운다. 분명히 성령을 충만이 받은 두려움을 모르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가진 기존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막아 설뻔했던 고백을 사도들 가운데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 라거나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22:18) 하셨지만 민족주의 정신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신들만이 우월한 민족이고 다른 사람들은 짐승취급을 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오늘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더 많이 입고 있다는 자세와 고백으로 주님께 감사 드릴 필요가 있다. 꼭 같은 죄인으로 살다가 주님의 은혜의 보혈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확실히 은혜를 더 많이 누리고 있다는 감사로 찬양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차별할 찌라도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큰아들에게는 더 귀한 것을 주고 작은 아들에게는 덜 귀한 것을 주는[아들-딸] 사람의 차별과 다르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나중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 중에서 믿는 이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 자들의 문제에 대해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15:8~9)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라는 베드로의 증거는 10:47의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 라는 고백과 같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의 증거는 결국 기록된 말씀이고 말씀이 분명한 것을 가지고 曰可曰否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경이다.

결국 前後左右의 증거를 다 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였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하신 일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

이들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자신들의 판단과 주장에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의 종들이었기 때문에 이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같은 고백을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드릴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은혜의 역사와 사랑은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된다 할 찌라도 수긍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진리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역사 앞에 우리는 우리의 편견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