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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또 하나의 독특한 경험과 증거이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혼란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귀중한 기준이 되었고 중세 재세례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모범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존의 받은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고 다시 많은 물 가운데서 세례를 받게 한 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말씀 바로 앞에서 학문과 성경에 능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이 이 에베소를 거쳐서 고린도로 건너갔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바로 배우기 전에는 다만 OT성경과 요한의 세례만을 가르칠 뿐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24~25) 이 아볼로를 통하여 배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바울이 다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게 되는데 이미 주님을 믿는 어떤 제자들을 만나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결국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는 데까지 역할을 하고 에베소에서 2년간이나 하나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이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의 신상을 만드는 직공들로 인해서 소동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에베소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기적을 일으키며 거짓 것과 구원의 역사를 구분하고 그 결과로 마술을 하던 사람들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마술 교본을 불태우게 되는데 은 오 만 원어치의 책이었다는 사실까지 누가는 기록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 복음이 주는 삶의 변화의 모델이었다.
결국 이 본문 말씀은 믿음과 성령과 세례의 중요한 상관관계를 통해서 바른 믿음의 기준을 제공하므로 어떤 세례가 구원 얻는 세례인가를 오늘 우리에게도 교훈해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의 편리에 따라 가감하는 일들이 이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마치 아볼로를 바른 신앙적 진리로 변화시켰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우리 각자의 역할이 오늘도 중요함을 의식하는…
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선물을 확인하는 것을 본다.(1~2)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이 아볼로라는 사람의 영향력이 고린도 교회 속에서 얼마나 커져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데(그리스도, 베드로, 바울과 대등하게 언급된다.) 확실히 이 사람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요한의 세례까지만 가르칠 수 있었다고 볼 때 반드시 명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長老나 傳道者가 아닌) 할지라도 바른 구원의 진리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를 성경에서 배운다. 사실 사람들은 명분이 있는 것에 매진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들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만났던 제자들은 아볼로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전도한 사람들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1.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마가복음16:15~16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신 주님의 명령처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의 완전한 순종의 표로 세례까지를 받아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내용이 오순절날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선포되어진 말씀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그러므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드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은 성경 여러 군데 나타나는 분명한 진리이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2.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요한의 세례에는 성령의 약속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가던 길을 돌이키는 회개의 세례였음을 바울 사도도 v4에서 말씀하고 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더불어 정결의식으로 세례라는 의식이 더러 행해지고 있었음을 1세기의 역사 자료들은 더러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정결의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차이는 무엇보다도 성령이 함께 하심과 그렇지 않은 데서도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인간 자신의 노력의 종교와 하나님의 성령의 주도적인 인도로 이루어지는 삶의 간격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OT의 종교와 NT의 복음의 삶은 엄청난 간격이 나타난다.
이런 입장에서 부패한 인간이 주도하는 종교는 아무리 거룩한 것일지라도 결국 부패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주님 오셨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삶에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우리 삶에 인격으로 와 계신 성령께 굴복하고 순종하는 삶만이 주님의 원하시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하나님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들의 삶에 성령으로 와 계시게 하신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이 있음도 모르는 가련한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약속에 따라 성령을 의지하는 삶이 되시기를…
Ⅱ. 무슨 세례를 받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3~4)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저들의 안타까운 답변에 바울은 이들에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두 번째이다.
1.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앞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고 물었던 바울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저들의 답변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했는데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성령께서 오시고 오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요한의 세례니라!” 요한은 실제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마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이권 때문에 요한의 회개의 세례도 거절했기 때문에 주님께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2.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안타까운 답변을 들은 바울은 마치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8:35) 했던 것이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0~31) 하였던 것처럼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바른 생명의 주님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강한 권능으로 역사하던 성령의 시대에도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고백했던 아볼로로부터 말씀을 들었던 에베소의 일부의 믿음의 사람들,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으니 인도를 받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주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세례를 받고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우리의 삶을 맡기기만 하면 친히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음의 일을 위해서 충성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다만 성령께 절대적으로 순복 하는 삶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믿으시기를…
Ⅲ.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만이 약속을 누리게 한다.(5~7)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이들은 여태까지 자신들의 신앙이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다시 약속의 세례를 받으므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된다.
1.먼저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듣고” 많은 사람들은 여태까지의 자신의 살아온 삶을 지적 받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실 그래서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지적을 달게 수용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고, 믿음은 거기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것이 OT에서는 순종이다.(삼상15:22)
2.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이것도 사실은 자존심이 달린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4:5] 사실 나 자신이 그랬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이 잘못되어 온 것이라면 순종하여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3.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 이것은 언제나 순종이 있고야 가능하다. 어떤 입장에서든지 자신의 위신이나 고집을 내세우면 불가능한 부분이다.
또 이 모습도 베드로의 고백과 다르지 않음을 본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1:15) 사도행전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분명 지금 우리시대와는 달랐다.
그것은 성령이 다는 분이 아니라 아직 구원의 역사인 신약성경이 주어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지 않으면 확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래서 표적과 기사는 필요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14:3)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2:4)
그러나 말씀이 확증되고 진리가 완성된 것으로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상 약속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들이 아닐지라도 진리와 거짓은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말세에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는 경계가 더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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