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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는 진리를 따르며 사는 것이 어느 때보다 어려운 때이다. Post-Modern, New-Age 적인 성격은 대단히 감성적이고, 과학과 문화는 대단히 理性的이어서 두 극단이 맞물려 가는 시대이다. 그래서 믿음생활 바로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시대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시대의 흐름이나 사상이나 문화의 흐름을 따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 것을 거듭 당부하고 있다.
제목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문하는 내용은 복음의 가치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복음에 “합당하게[aksios 가치 있게, 적당히, 어울리듯이, 경건하게← 무게를 달다(ago)⇒무게가 나가는, 상당한, 적합한]” 라는 의미는 우리의 삶과 복음이 균형에 맞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Only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더 직접적으로 표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합당한 구별된 삶이 되라 명하신다. 복음은 늘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1세기 성령이 충만한 시대에도 복음에 적절히 살지 못하는 삶의 그리스도 인들이 있었고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들은 바울은 복음 때문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이런 힘겨운 당부를 주고 있고 무엇보다도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더욱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받은 바 되셨는데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복음에 역행하는 삶을 산다면 역시 안타까운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상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함께 천국을 향해가는 지체들에게 격려와 소망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Ⅰ. 성경은 헛된 믿음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고전15: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헛되이[eike, 하는 일 없이, 즉 이유(결과) 없이, 원인 없이, 공연히]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자신에게 헛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헛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 말보다 보는 것에 더 영향을 받는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고 권고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실 기분 좋아할 사람이 없다. 또 우리 대부분은 구원이라는 말에 대단히 민감하다. ‘구원이 있다, 없다.’ 누가 나에게 ‘너는 구원받지 못했다.’면 분노하려 든다. 그러나 깊은 믿음의 소유자라면 그런 말에 흥분할 필요가 없다. ‘구원을 주는 것과 누리는 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구원의 바른 체계에 있지 못하면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바른 체계 ①성경(약속) 이것은 절대적으로 바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열어서 죄인 된 우리들에게 나타내셨다. 계시(apokalypsis, 드러냄, 나타냄) 자체가 감춰진 것을 열어 보인다는 의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친히 비밀을 드러내셨고 이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려는 자세로 주님께 나아온다면 교리가 어려워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구원을 미끼로 우리를 낚으려는 분이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거저 주신 선물을 지키는 것은 우리 각자와 교회의 책임이다.
신앙은 절대로 요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견고히 붙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히2:1) “…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3:6b)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②교회(공동체-도구) 우리는 이 부분에 오해가 있다. 건물로 생각하거나 종교적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불러내었고 구별하신 사람들이 교회이다.
성경(약속)을 절대적인 법으로 믿고 그 법에 따라 교제하고(하나님과 사람) 전하고(사람) 섬기는(하나님과 사람) 도구여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이 사람의 편리성이나 세상의 문화나 다른 종교에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반드시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적용하고 받들어 일해야 한다.
③신앙(개인-순종) 믿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구나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런 바른 체계와 기준이 지켜지고 이루어질 때 어떤 사람의 조롱이나 비웃음에도 의심할 필요가 없고 처음 탄생된 교회는 적어도 그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기중심 사람중심의 체계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세로서 합당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구원을 헛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죄요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고 사심의 효력이 온전히 삶 속에 이루어져서 어떤 사람의 비웃음에도 하나님의 격려가 함께 하는 …
Ⅱ. 성경은 이중적인 삶을 책망한다.(신25:13~16)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9:9)는 말씀과 같이 주님의 복음과 평행을 이루는 삶이 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도 책망하셨던 사실이다.
율법에서 경계했던 이러한 말씀은 지혜의 책인 잠언에서도 상당히 여러 번 거론이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말씀이 20:23이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이중적인 저울추나 되는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대신에 상대에게는 손해를 끼치려는 의도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같은 이중성은 교회에서도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외식하는[hypokrites, 무대 연기자, 연기하는 배우, 위선자-무대 위와 평상시의 삶이 이중적인 것을 예로 드는 것이다.] 사람들이라고 주로 마태복음 23장에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다.
본래 이중적일 수 밖에 없었던 죄인 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어디서나 한 모습의 일관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피를 흘리셨다. 그런 이유에서 천국시민다운 주님과 함께 희생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
Ⅲ.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명령하신다.(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우리가 기꺼이 주님을 순종하려고 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당연한 것이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결코 힘겹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하려 하심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기꺼이 주님을 따르려는 자만이 마음에 쉼을 얻고, 주님께서 함께 져주시는 가벼운 인생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자유의 조건은 주님의 말씀 안에만 머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8:31) 이것은 적어도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Christianity는 삭막한 삶의 논리가 아니다.
진리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말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말한다고 해도 그 삶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지 못하다면 호소력이 없이 삭막한 사막과 해골에 불과할 것이지만,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될 때 거기는 생명의 냄새가 날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먼저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지체를 속이는 것이고 더 두렵게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거기에 대한 경계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 하였고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당부하고 있다.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당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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