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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말씀을 대개는 겸손의 모범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말씀은 겸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자신을 희생함으로 영원한 영광을 얻는 보다 깊은 의미를 우리는 여기서 배운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논리야말로 세상에서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이치이다. 세상에서는 어찌하든지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은 지배하는 자리에 서려 하고 낮은 자리보다는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세상의 논리를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이해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은 자신이 위에 있어야 주님께서 복 주셨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서로 전혀 다른 괴리가 바로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차이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부터 희생을 승리의 비결로 자주 말씀하신 바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마침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이루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이렇게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치는 주님의 사랑의 법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치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눅9:24)
복음 때문에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도 같은 이치를 주문하고 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자신을 버려서 얻는 희생의 원리야말로 믿음의 가장 가치 있는 그러면서도 세상의 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승리의 교훈이지만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주님께서 이미 모범을 보이신 가장 확실한 승리의 비결이다.
Ⅰ. 예수의 마음이야말로 희생의 마음이다.(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사람들은 그래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할 때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라는 교훈대로 ⓐ만물은 주님에게서 창조되었다. 즉, 그에게서 만물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는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언제나 겸손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영원한 쉼의 원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쉬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치를 순종치 못하면 감사도 기쁨도 쉼도 누리지 못한다.
모든 것이 사실 마음이 문제인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지 못하고 우리 각자가 십자가에 희생되신 주님과 함께 참으로 죽지 못하면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 그대로의 마음, 나 태생대로의 생각이 나를 꽉 붙잡고 있다면 신앙에 있어서 승리는 고사하고 매 순간 실패하고 패배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성령의 사람이 되기 전의 베드로에게서 그대로 본다. 설치고 앞서고 야단 법석이지만 대부분 주님으로부터 책망 뿐이었다.
Ⅱ. 반드시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6~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는 마음에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가진 것을 친히 삶에 나타내셨다. 이것이 우리 신앙하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모범이다.(6)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말하는 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하였고 주님께서도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하시는가 하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8)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빌립을 향하여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고 증거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다 가지고 계심에도 주님은 늘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는 것이 삶의 기본이 되어 있었다.
최후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 너무 고통스러워 비통의 눈물을 흘리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같은 표현이지만 “…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42) 이렇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우리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나의 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주님처럼 희생할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주님처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7)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이셨지만 섬기는 종의 형상으로 사시고 순종하셨다. 사실 이와 같이 자신을 비우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이나 결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이 8절의 말씀은 앞부분이 7절과 연결하여 사람이 되신 겸손이지만 뒷부분이 더욱 중요한 말씀이다. 즉,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내용이다.
사실 영은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육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에서 가장 처절한 죄수의 처형방법인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우리 사람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창조의 이유와 과정과 목적이신 주님께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가 그것도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죽으셔야 하는 가!는 이것이 마귀 사탄 앞에서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원수 마귀의 조롱거리가 될 것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람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대도 주님은 왜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십자가형을 당해야만 했을까! 이것이 사실 주님 자신에게도 대단히 이기기 어려운 고민이셨음을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초라해지셔야 했는가!
바로 나(우리)를 위함에서 이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의 저주에 떨어진 인류를 구원하는 마귀 사탄 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의 방법이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러셨다면 오늘 나(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Ⅲ. 희생은 반드시 승리로 결과 한다.(9~11)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희생만 확실히 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에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앞의 희생이 불가능하다면 이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하나님의 바라시는 수준에까지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합당한 영광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 다음 10~11절에 나타나는 내용은 로마서 8장 말미의 내용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주님의 말씀을 따른 희생은 우리에게 어떤 승리를 가져다 주는가! 모든 무릎을 희생하신 주님 앞에 꿀렸고 모든 입으로부터 칭송케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주님의 백성들이 확실히 희생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는 것도 희생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드릴 수 있는 찬양이다.
약한 자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강한 자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넉넉히 가지고 사람들의 눈치 보지 않고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버리신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누구든지 희생할 수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이기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희생자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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