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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5월 5일 첫주부터 죄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계속 나누고 있다.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이 내용도 역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백성만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이다.
보이는 현실의 절망에서 한탄하는 탄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죽게 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능력은 주님의 백성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성경에서 찬양으로 통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곳이 더러 있지만 가장 구체적인 두 곳을 생각한다면 OT의 역대하 20장의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이 모압과 암몬, 그리고 세일산의 주민들이 연합으로 이스라엘을 치려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여 하나님께서 그 적군을 물리쳐 주신 “브라가” 골짜기의 이야기 일 것이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19)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대하20:18~23)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고 함께 하심이 감사와 찬양의 이유였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
시편기자들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시81: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시95:1~2)
NT 성경에서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가 겪은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주님께서 잡히실 감람산으로 갈 때도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막14:26)는 말씀 역시 귀중한 역사였다.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그만큼 인생에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인생의 애환을 노래로 엮어 냈던 우리 민족성이 타령이나 슬픔의 노래를 주로 불렀던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맛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금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을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브라가[히, berachah, 번성, 축복, 관대한, 연못, 선물; 히, barak, 무릎 꿇다, 찬양하다, 경배하다, 감사하다] 골짜기의 승리나 빌립보 감옥을 열어젖힌 바울과 실라의 경험을 오늘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Ⅰ. 찬양의 조건은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두 곳의 말씀을 봤지만 이 모두가 인간적으로 찬양할 일이었는가! 육신적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는 미치광이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미래의 어떤 기대보다도 지금까지의 사랑의 역사를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찬양의 시간이나 장소가 좋을 때만이 노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은 지금 내가 하나님을 여전히 모시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이 어디 우리 자신의 힘이겠는가!
오늘 바울과 실라는 주님 때문에 맞을 수 있고 갇힐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얼마나 찬양할 조건이 많은가!
시편 기자가 상당히 의미 있는 권면을 주고 있는데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33:1) 라는 것이다. 사람이 의인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즐기는 노래가 있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노래가 있다. 신령한 노래란 내가 기분 좋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찬송이고 그렇다고 나 자신은 아무 감정이 없는 입술의 노래일 수도 없다. 신령한 노래란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나의 마음과 영혼의 감격과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찬양이다.
여기에는 세상의 어떤 요소도 필요가 없고 다만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감격과 지금도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시고 사랑하시는 감동이 바탕이 될 뿐이다.
어떻게 보면 구약에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찬양을 많이 드리고 악기 음악의 대가였던 다윗에게 후기의 선지자들은 좀 냉혹한 판단을 주고 있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암6:5)
찬양의 조건은 찾으면 찾을수록 많고 은혜를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은혜가 넘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었든지 그것을 감격으로 즐거워하고 찬양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더 큰 찬양을 드릴 역사를 이루시는 주님이시다.
Ⅱ. 현재의 찬양이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짐짓 찬양하는 복을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를 더러 겪게 되는 데 사실 현실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지금이라고 말하는 모든 때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복된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찮게 보지 않으시고 귀하게 보시며 누구라도 진정으로 은혜에 감격하는 찬양을 외면치 않으신다. 왜, 귀하게 보시는가?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을 주고 사신 존재들이기 때문에 귀하게 보신다.
바울과 실라는 왜 밤중에 하나님을 찬양 드렸을까! 아침에 날이 밝아 올 때 찬양 드려도 될 것인데 왜 하필이면 간수까지도 졸며 차고 있는 그 시간에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찬양을 드렸을까?
어쩌면 그 시간이 지나고 날이 새고 나면 자신들의 삶이 끝나 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을 찬양과 기도로 채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이 사람들은 세례도 밤중에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현실에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할 때, 그것은 과거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미래에 주실 은혜를 현재에 함께 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도와 함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그 밤중이 이 지상에서 드리는 그들의 마지막 기도요 마지막 찬양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마지막까지 즐기고 기뻐하며 구원을 즐거워하는 그들을 우리들에게도 나누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 저들의 삶을 능력으로 승리케 하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우리가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의 역사이다. 만약에 그 밤에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찬양의 은혜와 능력을 끼치기 위해서 이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긴박하고 안타까운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마지막으로 즐길 수 있는 복된 시간일 수도 있다.
바울과 실라는 과연 어떤 찬양을 드리고 있었을까!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303:1)
자신들의 육체가 채찍에 찢겨 피 멍으로 욱신거리면서도 가치 없는 인생을 위하여 대속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격하며 찬양과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렸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절박한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주님의 임재를 즐기며 찬양할 수 있는 현재의 시간이다. 적군들이 연합으로 몰려오고 자신들은 싸울 여력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즐길 수 있는 찬양의 시간인 것이다.
Ⅲ. 찬양은 환경을 뒤집는 역사를 일으킨다.
우리는 물론 오로지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며 찬양한다면 같은 입장일지라도 초라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절망의 현실을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즐기는 바울과 실라를, 그리고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절망을 뒤집어 감격으로 바꿔주셨다.
하나님은 사실 그런 분이시다.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쁨과 감사로 현실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백성들을 절대로 그냥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사실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절망적인 마지막의 순간조차도 임마누엘로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그 찬양의 사람들에게 칠흑 같은 어둠도 메뚜기 떼처럼 자신들을 죽이려고 몰려오는 적군들도 더 이상 저주와 절망이 아님을 보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역시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여호사밧은 찬양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20b) 격려하고 있다. 분명히 현실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바울과 실라와 같은 억울함과 절망으로 깜깜한 땅굴의 감옥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가! 그래도 찬양하십시오.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는 것처럼 우리를 삼키려는 마귀 사탄에게 직면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찬양하십시오.
진정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즐기고 기도하고 찬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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