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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도 거기에 따라 나타날 것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표준새)”(잠23:7f)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방법과 나타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중심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자신을 지원해 줌으로서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나 상황에서도 그들과 더불어 감당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빌립보 교우들이 바울을 생각했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생각했다는 것이고 그러한 생각은 바울로 하여금 더욱 빌립보 교우들을 통한 주님을 의지하여 어떠한 난관도 이겨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특히 오늘 마지막 절의 말씀을 믿음의 사람이면 누구나 자주 인용하고 증거하는 말씀으로 신앙의 사람들의 승리의 비결이 된다고 하는 교훈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막연히, 단편적으로만 이해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승리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을 확인하고자 한다.
Ⅰ. 나는 할 수 있다.(13b)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it!” “You can do it!” “You can do it yourself!”(특히 영업부 같은 곳의 벽면에) 라는 슬로건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그냥 우리 사람으로서의 이런 자기 확신은 한계가 있고 위험하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의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의 분명한 차이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민수기13:25~14:10에서 확인하게 된다. [바란 광야]라는 데서 각 지파별로 대표자들을 뽑아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을 정탐시켰다. 그러나 꼭 같은 목표와 환경에서 전혀 다른 반응의 모습을 보게 된다.
①“할 수 있다.”-소수(2사람)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 뒤에 가서 살피도록 하자.
②“할 수 없다.”-다수(10사람) 눈으로 본 것을 따라 판단한 사람들이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골리앗과 다윗)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조금을 할 수 있다.”거나 ⓑ“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다.”거나 ⓒ“나는 대부분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분명히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고, 우리는 바울이나 다른 신앙의 사람들과 나 자신을 이런 데서 구별하려고 드는데 옳지 않다. 바울 사도는 다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하고 있다.
오늘 우리 대부분의 신앙한다는 사람들은 “ⓐ나는 나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혀를 제어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주변환경을 이길 수 없다.” 라고 쉽게 말하는 것을 듣는데 이러한 자세는 믿음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이나 형편에서 하는 말이 아님을 그의 여러 곳의 글들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와 다르지 않은 바울을 은혜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시는 주님이시라면, 내가 가진 믿음이 다르지 않다면, 역시 같은 역사를 가능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때 그 하나님이 오늘 내(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당연한 이치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우리 자신들의 능력을 키워가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공부하고 훈련하고 다듬지만 이것은 분명히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나를 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철저하게 의지하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이고, 세상 사람들과의 대항에서 영육의 능력으로 강건할 수 있을 능력이다. 이것이 신앙의 사람으로서 확실히 유리한 조건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그래야만 한다.
이럴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고 그러한 확신이나 만족은 우리자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4~5) 이러한 준비된 믿음의 자세에서 가장 분명한 확신을 고백할 수 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Ⅱ. 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하다.(13f)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I can do it!” “You can do it!” “You can do it yourself!”라는 등등의 자기최면은 이유가 분명하지 못하다. 거기에 대한 이유는 기껏해야 ‘최선을 다한다면, 열심히 하다 보면…’일 뿐이다. 사실 이유 없는 확신은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영원에 관한 것은 더욱 위험하다. 목표를 세운다고 해도 성취의 가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맹목적으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위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딤후4:17) 그러면 하나님은 바울에게는 이러한 능력을 주시고 우리에게는 주시지 않았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하신 말씀도 앞에서 말한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들려질 수 있다.
바란 광야에서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이 긍정적인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들의 봤던 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맞아떨어졌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여기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을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이라는 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주님을 진노케 하는 죄의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한계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는 말씀이고 바울은 언제나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하였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기뻐하고 또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
주님께서 부자 청년이 자신의 재산 때문에 주님을 떠나갈 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 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 말씀하셨다.
사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신앙 속에서 할 수 있는 믿음의 행동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면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이 이기는 것이다.
①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4:1) 오늘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사랑할 수 있는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울처럼 사랑할 수 있다.
②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Peace maker’가 되어야 한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3)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2:5)
③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지금까지 주신 은혜만 헤아려도 충분한 기쁨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④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369:1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없는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⑤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⑥만족하며 사는 삶을 배울 수 있다.(confer v11~1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확신은 대단히 위험하다. 물론 세상은 믿을 것이 자기밖에 없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바울처럼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그리스도 중심의 확신으로 살아야 하고 세상의 어떤 대상을 기쁘게 하려는 자세 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거듭난 사람들 속에 와 계시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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