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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4:1~7 2020-11-2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주님의 가시는 곳에 함께 가기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겠다던 베드로는 그 밤이 새기전에 세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조용해지고 이제부터는 주님과 떨어진 관계속에서 어떤 처신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럼에도 여기로부터의 교훈은 단순히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약속이 아니라 구속을 완성하시고 다시 오실 약속과 함께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교통하시면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약속과 당부이기도 하다.

이 요한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나는 ~ 이다”라는 자의적 선언의 핵심이 되는 교훈으로 오늘 제목처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선언과 함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증거도 당연하고 중요한 선언이다.

홀로 가신다는 말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는 것이 모든 것의 해결임을 증거하시면서 미래를 기약하고 위로하신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불안한 이 세상의 처소가 아닌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시겠다고 안심시키신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는 거처이다. 땅에서 평생을 벌고 저축해도 자신의 거처를 못 마련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거처에 관한 기대는 육신에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서는 과연 어떤 거처에 머무르게 될 것인가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에 염려하는 것은 거처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거처의 문제를 말씀하시다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귀중한 말씀을 하시는 것도 독특한 가르침이고 예수님 당시에는 완료형으로 말씀하시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완성하기위해서 가야하신 다는 신비한 교훈을 주고 계신다.

이 모든 가르침의 흐름에서 반드시 주님께서 가셔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십자가의 대속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당시의 제자들조차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하늘로 치솟은 높은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산들을 가리고 있고 계속 지어지고 있지만 그 중에 나 자신의 거처는 모두가 가진 것은 아니고 아무리 편리하고 가치 있는 거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길어야 1세기를 살다가 두고 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드시 영원한 거처로 옮겨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땅위에서 아무리 가치 있는 거처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지만 그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보다 불행한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오늘의 귀중한 교훈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비록 이 땅에서는 이사를 다녀야 하는 안정된 거처를 갖지 못했을지라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에 넉넉히 들어가는 …



Ⅰ. 안심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1~2)

OT의 인물이면서도 대단한 영적인 믿음의 눈을 가졌던 다윗은 이미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양을 따라다니는 유목생활로 양들에게 뜯길 풀밭을 찾아 광야를 다니던 다윗이었지만 자신의 진정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푸른 풀밭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장자 영원한 처소에 요동없이 거하게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f) 근심은 언제나 보이는 세상으로 인한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음에서 혼란하게 되는 것을 많은 경우에서 본다.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롬9:1)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큰 근심은 자신들의 동족이 복음을 순종치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지 보이는 세상의 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는 세상일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당부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삶에 터득한 경험대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확신시키고 있다.

나그네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흔한 근심은 “오늘 밤에는 어디에서 다리를 뻗고 하룻밤을 지낼까!”하는 것이고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삶의 거처인 부모도 배도 다 팽개치고 주님을 따라 나섰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가셔야만 한다고 하니 당시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그들은 자신들의 거처를 근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세상을 너머서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고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b) 말씀하시는데 이 제자들과의 다락방에서 주신 가르침은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도 역시 교통을 위한 역할을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었고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이런 같은 맥락에서 v7f에서도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2f) 주님 떠나시고 나면 당장 ‘어디에 거처해야 하는가?’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확신을 주신다. 세상에는 거처가 한계가 있다. 어디에도 사람의 만족할 만큼 넓은 거처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있겠지만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믿음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2m)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진실하셨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한번도 속이신 일이 없으셨기에 이 말씀은 더욱 호소력이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베푸시고 치료하셨지만 사실 “아버지 집” 즉, 천국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면 그분도 또다른 종교꾼에 불과 하였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2b) 어찌 보면 앞에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2f)와 모순처럼 들린다.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시고는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 온 인류가 다 들어가도 결코 모자라지 않을 곳으로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시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미 마련된 그곳에는 죄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에덴처럼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창3:24) 지키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 가신다는 것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그들로 이미 준비된 그 영화로운 처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이것은 다음 절에서도 계속된다.



Ⅱ. 반드시 다시 오신다(3~4)

오로지 제자들의 신경은 주님께서 가시겠다는 말씀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런 제자들에게 또다른 위로는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3f) 이것은 예전의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외쳤던 과거 종말론자들의 주장처럼 주님께서 하늘에 아파트를 지으러 가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예비된 영원한 거처에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들이 죄를 벗고 들어갈 수 있도록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3f)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심에도 이 영광의 처소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3m) 이 말씀이 다시 죄와 상관없이 그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려고 세상을 거절하고 오로지 믿음으로 산 하늘에 합당한 사람들을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이 아니면 달리 이해할 내용이 없다. 그런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임마누엘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b) 우리는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의 새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21:3)

비록 지금도 우리가 임마누엘을 고백하고 외치지만 아직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령으로 함께 계심을 의심하지 않지만 여전히 보이는 세상 속에 머무르는 우리의 한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뒤에 도마가 다시 묻고 있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천국의 문이며 길이심을 연이어 선포하신다.

이 두번째 내용의 결론을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다만 다시 이 땅에 두번째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슬픔과 탄식으로 만나지 않도록 주님의 약속과 교훈에 깨어서 구속의 역사가 헛되지 않는 성도의 삶을 감당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



Ⅲ.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오로지 자신들을 두고 가신다는 말씀에 생각이 집중되어 어떤 것도 바르게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이 신령한 천국의 약속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교통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세 사람의 제자들이 질문을 하는 것도 이 14장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다음의 15~16장에서 더이상 제자들의 질문은 없고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계속되고 있는 차이를 역시 보게 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앞에서 나사로가 죽었고 그에게 로 가자시는 주님의 말씀에도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1:16)는 엉뚱한 말을 한 바도 있고 나중 주님의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경험에도 가장 큰 의심을 가진 제자로도 유명하다(21:25)

결국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는 의심은 아직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육신적인 한계와 당시의 넓게 퍼져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심에도 엉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딴 곳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메시아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늘 우리도 말씀을 풀어 증거한다 해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특히 이 도마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에 대한 해결책이나 빌립(8)과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22)에게도 계속되는 가르침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

그러나 이런 엉뚱한 도마의 질문도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주님으로부터 만고의 진리를 듣게 하는 역할로 주님은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도마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에 대한 답변으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다른 답이 아니라 자신이 곧 “길(道)[ὁδός, 수단, 고속도로]”이라고 증거하신다. 이미 1:18에서 침례자 요한을 통하여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말씀하셨지만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가는 문이요 길이 되심을 선언하신다.

사람들은 고통과 인생의 탈출구인 길(道)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쉼없이 싸우듯 애써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역사 속에 성현(聖賢)이라는 누구도 감히 이런 확실한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이나 삶의 방법이 예수 자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런 선언 때문에 사람이 만든 다른 종교에서는 독선이라고 몰아 부치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달리 비교한 사람이나 방법이 없다.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시고 마지막 종착지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나 방법이 다른 데는 있을 수 없고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오래 전에 살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길은 그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진리라고 증거하는 것을 듣는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25:10)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길”을 진리와 생명과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인생의 방법과 길이 있지만 그 결과는 죽음 외에는 모두가 다르고 변한다는 사실과 진정한 인생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어떤 경우에도 바뀌거나 차이가 없이 그 마지막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가르침에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구속은 여전히 유일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뀌는 것은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은 진리뿐만 아니라 생명과도 동일시되고 있는데 앞의 10:10에서 이미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생명을 겨우 누리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누린다 말씀하신 의미를 깨달어야만 한다.

생명을 겨우 가진 사람과 풍성히 누리는 차이는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육신적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숨을 쉰다는 것이고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서 인공호흡을 시키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도 분명히 죽은 사람은 아니다. 이런 것이 인간존엄에 문제가 되어서 요즘은 19세 이상이면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라는 것을 작성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여러분은 숨을 쉬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육신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영적인 질문이다. 이 마지막 때에 마치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해 가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에 어려움을 느끼며 사는 신앙인들이 많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생명을 그래도 유지시켜 보겠다고 인공호흡 같은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들을 보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길을 가는 사람은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것이 정상인데도 그 길이 아니라 비슷한 길을 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붙여지는 또 하나의 엄청난 진리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b)는 말씀이다. 적어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는 길은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셨다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외는 없다.

오순절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죽이려고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증거했던 단호한 한마디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극락에 이르고자 열반에 이르고자 수많은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요 생명의 길이 아닌 까닭에 전혀 예상치 모했던 마지막에 다다라서 자신들의 가슴을 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생명의 교훈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 증거하시는 것이다.

전반절의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는 그렇게 바로 알지 못했다는 말씀이고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한 것은 “이제부터는”가 관건이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구속을 이루신 후 성령이 임하셨을 때를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다시 오신 후에는 방법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하신 주님의 사랑의 역사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러한 사랑을 거절한 사람 본인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