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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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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2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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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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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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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자리를 바꾸시는 성령께서 오셔서 어떤 역할과 상황을 만들 것인가를 말씀하시면서 v27f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신 말씀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하셨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말씀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제목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은혜이며 확신이다. 특히 상황이 어렵고 미래가 어두운 오늘과 같은 시대와 상황에서 천국백성들이 건재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세상으로부터 누리는 평안은 언제나 변화무쌍하다. 아침에는 웃다가 저녁에는 울고 집에서는 행복하다가 일터에서는 불편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언제나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인사로 “!שָׁלוֹם”을 나누었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귀한 삶의 상태는 없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당부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바울의 이 권면은 사실 형편과 상황 모두가 평안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는 말씀이고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것이다. 이 좋은 하나님의 뜻을 누리고 감당하기 위한 근본적인 약속이 사실 오늘의 제목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말씀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b)는 말씀인데 어떤 일인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 아직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때도 믿게 하려고 미리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한 것처럼 아직 성령의 임재를 체험해 보지 못한 상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장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수없이 말씀하셨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지만 장차 이 일이 완성되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셨을 때에야 그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이미 말씀하신 모든 가르침이 생각나게 하실 것도 성령의 또 다른 보혜사로서의 사역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령의 사역은 참으로 여러가지를 제자들에게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어떤 핍박과 박해의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약속하신다. 사실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는 이 약속은 너무나 당연히 누리는 언약이며 분명한 약속이다. 완성된 이 언약을 잃지 않고 찾아 누리는 …
Ⅰ. 성령의 사역(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14:2~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계속 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불현듯 가셔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도 혼란해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25) 라는 말씀 자체가 떠나가시기 전에 들려주셔야 할, 떠나신 후에 이들이 당할 일들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만 다시 오셨을 때 즉, 성령으로 다시 오셨을 때는 이르실 필요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계속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말씀하심이 v26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26f) παράκλητος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것이라 하신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장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시지만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26m) 성령께서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은 가르치시는 일인데 어느 한정된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하셨는데 모든이라는 표현상 어떤 한계를 정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영적인 것이 우선임을 다음의 말씀에서 확신할 수 있다.
이미 인용한 15:26b에서도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하였고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16:13f)이라고 하여 오실 성령의 별명은 바로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서 그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진리를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앞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1~32) 말씀하신 바 있는데 그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믿는 자 속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가능함을 알게 된다. 특히 여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시는 자유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평안을 말씀하신 것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b) 하셨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새롭고 독특한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쳐 오셨던 은혜와 진리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v26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것이다.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들었던 진리를 다시 생각날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인데 이에 대한 더 넓은 이해가 16:13~14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여기 마지막에 붙여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미래에 있어질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언약하신 일들은 모두 이루어져서 오늘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혼란없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이 약속을 어려움없이 누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Ⅱ.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27~28)
성령의 오심과 그분의 사역을 말씀하시면서 붙여지는 평안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약속이다. 이 언약이야 말로 가지기만 하면 두려움이나 근심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f) 평안은 분명히 오실 성령으로 통해서임을 확신할 수 있음의 교훈이다. 다만 여기 “끼친다[ἀφίημι]”는 표현은 “남겨 둔다”라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둔다” 즉, 주님의 가지신 평안을 남겨두고 가신다는 말씀으로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시고 남겨 두시는 이 평안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27m)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평안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황과 처지에 좌우됨이 없이 지속될 것임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기적 때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받은 연회장이 그 포도주를 받아 들고 했던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2:10)
세상에서는 언제나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지만 나중에는 고통을 줄 수도 있고 어느 곳은 안전하지만 다른 곳은 안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돈을 많이 가지면 재난의 때에도 편안하지만 반대로 없으면 불안해하고 ‘어떻게 살까!’ 걱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처음부터 좋은 것으로 한결같이 좋은 것을 주신다. 아니 오히려 처음에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익숙할수록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평안이나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순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내가 너를 책임지마!” 하시는 데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맡겼다가 다시 찾아왔다가 하는 한결 같지 못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사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불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 약속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b)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근심도 두려움도 갖을 필요가 없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1b)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일과 상황에서 해결에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음에 근심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언제나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보이는 세상, 느끼는 세상의 변화만을 본다면 이러한 주님의 약속은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언약에 믿음과 확신을 가진다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28)는 말씀도 어려움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보장해 주시고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신뢰한다면 서운하거나 안절부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약속의 근거 역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보다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28b) 확인하신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지만 한계를 가진 육신을 입으신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이지 세상의 논리처럼 높고 낮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면 수없이 듣는 약속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그냥 소리로만 듣는 이 약속은 사실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체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쌓이면서 믿음도 자라가게 된다.
어느 때보다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살고 있다. 환경도 건강도 정치도 경재도 확실한 것이 없다.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이 불안의 시기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는 은혜의 약속을 이론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누리는 …
Ⅲ. 믿게 하려고 가르친다(29~31)
항상 준비되지 못한 상황이 더 큰 어려움을 불러올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언제나 여호와 이레로 자신을 순종하려는 백성들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아직 믿음으로 장성하지 못한 체로 이 땅에 남겨두고 가실 제자들을 위한 준비를 가볍게 하실 리가 없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이다. 항상 다가올 미래를 철저히 내다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구속의 역사를 위한 사역으로 제자들에게 공백이 되지 않도록 미리 교육시키는 것은 역시 당연히 주님의 성품에 맞는 모습이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여기서부터는 먼 장래의 일이 아닌 곧이어 제자들이 만나게 될 상황을 말씀하신다.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최소한 50일 이후의 일이겠지만 이 다락방을 떠나서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서 당하게 될 일들을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당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였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위한 희생당하심을 이렇게 제자들이 보기에는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알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대한 이유를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그런 다음에 제자들을 향한 교훈과 가르침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의 전계를 말씀하신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30f) 여기까지는 제자들에게 가까이에서 보혜사 역할을 하셨지만 전계 될 상황 속에서는 말씀을 하시고 싶어도 하시지 못할 입장이 될 것임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를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b) 어찌 보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르시기를 기대했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하심으로서 이미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활동을 시작한 사탄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 요한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표현하는 어두움의 우두머리를 바울 사도는 다른 두가지 이름으로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바울이 언급하는 것처럼 이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거나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정면으로 방해하는 세력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b) 하셨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고 막아서려고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하는 어두움의 세력의 우두머리이다.
이러한 맹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죄인 구원을 위한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감당하시는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31f)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어두움의 세력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일과 함께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려는 음흉한 일들을 수없이 해왔다. 그럼에도 창조에서부터 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까지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만을 나타내셨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거룩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연히 그 자세로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신다.
마지막으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31b)는 말씀의 이해가 쉽지 않다. 이후에도 16장까지 전계 되는 주님의 교훈이 같은 장소에서 계속 이루어졌다고 보여지는데 물론 마지막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끝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제사장적 기도를 하신 후에 가룟 유다가 데리고 나타난 군관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에게 끌려 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여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제 이 불합리하고 무법한 세상의 체계보다는 그것을 떠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해를 하심으로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실천을 당부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신앙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본문의 말씀처럼 떠남과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불법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절대로 온전한 공의의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이집트를 떠나는 야곱의 후예들처럼 바른 떠남과 만남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믿음의 여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심으로 오실 성령은 모든 진리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교훈들을 생각나게 하여 더욱 바른 진리에 거하도록 하실 분이시다.
그러한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오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가지셨던 평안의 남겨두고 가시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나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시는 주님이시다. 여호와 이레는 꼭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물을 먼저 준비하신 것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시키시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지금은 모든 것들의 상징만이 추앙되는 시대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하지 못하면서 무엇이든지 ♡모양만 있으며 사진으로 남기려 하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 현상일 수도 있다. 사실이 없기 때문에 상징으로 그것을 대체하려는 애매한 삶의 자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것이든 상징하는 보이는 우상뿐 아니라 이론적인 우상도 거부하고 사실과 실제를 제시하시고 행하도록 명령하신다.
또 그렇게 될 때만 우리의 구원도 실재적인 구원이 될 것이다. 이 구원의 가장 실재적인 모습이 바로 평안이다. COVID-19의 사회적거리두기가 비록 3단계까지 간다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변함없이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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