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요 15:1~8 |
 |
2020-12-27 |
|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
|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우리 모두는 매순간 날마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살기는 원하는 것이 사실이다. 매일 성령과 더불어 임마누엘을 살며 열매 맺기를 소원한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나요?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한 이 세가지 모두가 가능한 방법과 답변이 바로 오늘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있다.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그대로 행한다면 믿음의 사람들의 한결 같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이면서 비유가 아니라 실제이다. 이스라엘과 깊은 관련을 가진 세가지의 나무가 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여기 나타나는 포도나무이다. 이 세가지 나무의 의미를 다 담은 말씀이 시편104:15에 나타난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모두 과일을 위한 나무들이지만 포도 나무는 생명에 기쁨을 주는 과일로 나타난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10:19)
이스라엘은 OT때부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를 포도나무나 포도밭으로 비유한 예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이야기 보다는 부정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다(사5:1~7; 렘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20(1~16 포도원의 일꾼의 비유)~21(33~46 포도원을 세로 준 비유)장에서 포도원 비유를 하고 계시는데 역시 일꾼과 소작농들의 이야기이지만 긍정적인 비유는 아니셨다.
그럼에도 오늘의 내용은 과거의 그런 내용과는 사뭇 다른 주님 자신과 제자들 즉, 우리의 관계를 긴밀한 유기체로 비유하고 계심을 본다. 일반적인 나무와 가지의 관계도 대단히 긴밀하지만 열매를 목적으로 관리되는 포도나무는 더욱 긴밀하다.
먼저 생각할 것은 과일나무의 열매는 몸통으로부터의 수액과 가지와 잎의 동화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몸통으로부터 원만한 수액을 공급받아야 하겠지만 그것 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가지와 잎의 빛과의 동화작용이 없이는 역시 불가능하다는 자연적인 원리가 신앙의 열매 맺음과 탐스러운 열매로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Ⅰ. 열매 맺기 위한 포도나무(1~3)
“나는 ~이다”라는 주님의 자기선언이 여기서도 말씀의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자기 선언을 돌아보면 [요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10:7 나는 양의 문이라;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증거하신 바 있다.
그리고 “나는 참포도나무요”(1f)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물론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는 앞에서 거론했던 이스라엘의 들포도를 맺은 과거의 온전치 못했던 포도나무를 전제로 하시는 말씀일 것 같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 이것은 당연히 미래에 완성될 교회를 마음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진다(엡1:23).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죄로 황폐화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열매를 맺으신 생명의 포도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러셨듯이 아버지 하나님을 함께 거론하신다. 사실 포도원은 포도나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계획과 수고의 결과임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을 종자로 하여 자라가는 생명의 교회는 포도나무의 비유에 너무나 적절하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2f) 이 귀중하고 신비한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먼저 경계의 교훈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왜, 먼저 긍정적이지 못한가?’ 생각할 수 있지만 복음 자체에는 항상 심판적 요소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용인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사실 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도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자체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거론되는 열매는 물론 성령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항상 나누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는 꼭 어떤 신령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도덕적인 항목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Christianity 즉, 바른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사람들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됨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성을 갖어야 만할 것이고 어떤 신비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못하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일반 사회의 도덕, 윤리를 넘어선다.
1세기에 세상사람들이 교회의 모습들을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너무나 반듯한 저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었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성령의 역사로 범죄이전의 아담을 회복하는 모습이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다른 가지에 더 충실하고 많은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만 잘라 내신다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정(剪定)과 다름을 본다.
그리고 그 심판의 권한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포도원의 주인이자 농부 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실 것이라는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b) 여기에 또 다시 있는 자의 풍성케 하심을 볼 수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눅19:26)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8:18b)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3) 이 말씀은 v2의 해설이면서 연장이다. 이미 13:10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말씀하신 바 있다.
성경의 교훈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며 말씀은 진리라” 하셨고(요17:1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f)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깨끗케 하셨고 주님께 붙어 있다고 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낼 것이며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시려고 깨끗케 하실 것이라 하신다.
Ⅱ. 그리스도와 천국백성들과 긴밀성(4~5)
앞에서는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는 가지와 그렇지 못한 가지에 대한 잘라 내심을 하심을 말씀하셨다면 여기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신다.
여기에서 가장 귀중한 열쇠(key)는 “안에[ἐν] 6회” “거하라[μένω] 4회” 라는 낱말이다. 앞의 14:23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말씀하신 바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f) 명령형이면서 조건적이다. 이 명령이나 조건은 전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 명령의 순종은 언제나 분명한 약속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의지가 전혀 없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 억지로 거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4m) 너무나 분명하고 논리적인 가르침이다. 홀로 잘려진 가지에 열매가 맺은 예는 성경에 한 곳 밖에 없고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적이었다.
민수기 16장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으로 저들이 멸망후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확인하게 하시려고 지팡이 12개에 각지파의 이름을 쓴 후에 증거 궤 앞에 둔 후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 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는 기록이다.
여기 더 직접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한은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b)
여기에 다시 자기 선언을 하시는 내용이 “나는 포도나무요[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너희는 가지라”(5f) 말씀하시는 데 v1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하셨던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선언이라면 여기서는 그 포도나무와 같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5m)라고 확인하시는 데 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해보면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내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고 나도 그 안에 거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가 내 안에”가 먼저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이미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나 죄인이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준비해 두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든지 편견없이 새로운 사람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시고 그 해결된 구속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누리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은 각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대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인 그대로는 안되고 물과 성령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거듭남을 통해서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5m) 이 약속에는 열매를 겨우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기만 하면 열매는 나무의 본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맺게 해 주신다는 언약이다. 함께 거하는 데는 한 사람만이 주도적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고 할 때 온전히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시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도 경계가 붙여지고 있는데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b)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부자유자(不自由者)가 된다는 의미보다는 적어도 영적으로는 천국에 관한한은 무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고 이것은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열매 맺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머물지 않는 한은 어떤 영적인 열매도 기대할 수 없고 이것은 육신의 삶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우리 자신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Ⅲ. 제자는 예수 안에 거해야 산다(6~8)
내용은 뒤로 갈수록 점점 깊이를 더하여 감을 느낀다. 옆에 거하는 것과 안에 거하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를 가진다. 바로 앞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b)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경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좀더 두려운 경계가 뒤따른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6)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잘려진 가지처럼 말라 버려질 것이라는 형벌적인 선언을 하신다.
실제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감람 나무의 가지였지만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롬11:20f)는 두려운 역사를 거론하고 있다.
OT에 포도나무의 비유가 많다는 이야기를 서론에서도 한 바 있다. 그러나 에스겔15:1~6의 내용을 따르면 포도나무의 가치는 열매를 맺을 때만 가치가 있고 다른 나무의 제목으로는 사용할 가치가 없어서 땔감으로 불을 태우는데 밖에 소용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버려지고 말라진 포도나무 가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b) 이 표현은 마치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기도의 응답도 열매를 맺는 비결과 다르지 않은 표현을 본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v5m에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과 내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7f) 차이점이라고 하면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내 말[ῥήμα, 말한 것, 주제, 지시, 선언]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다.
v5m에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사람은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 말씀하셨다면 이 v7의 내용은 그것과는 조금 다름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르면 하셨는데 여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먼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하면 이란 주님의 의향과 명령 즉, 의도하시는 바가 그 사람 안에 있게 될 때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b) 하심으로서 기도의 응답이 확실할 것을 말씀하신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를 하되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나 의향이 아닌 자신의 바램과 기대만으로 부르짖을 때 인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장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태복음 6:33에서 주신 바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b) 하신 것도 복이지만 이러한 결과가 더욱 영화롭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8)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생활 한다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바램은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영광보다는 욕을 돌려 드릴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 이 말씀은 거기에 대한 정확한 해결책이다. 거꾸로 이해를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러한 결과가 될 때 비로소 “…너희는 내 제자[μαθητής, 배우는 사람, 학생]가 되리라”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쉽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는 제자로 서의 격이 다름을 말씀하신다. 스스로 말하는 제자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되어진 제자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서 자라는 가지들이다. 그러나 계속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도 열매 맺지 않으면 더 열매 맺는 가지를 위하여 가지치기를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지가 나무 몸체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지만, 우리가 주님안에 거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런 생명의 유기체적인 관계가 바로 이루어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밖에 버려져 마르고 불태움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동시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이고 이런 응답을 많이 누리는 열매의 결과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