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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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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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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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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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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의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복음과 자신의 관계 즉,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자긍심과 함께 최선을 다한다고 증거한 바 있다.
오늘 본문도 지난 말씀에 연결되어지는 문장구조로 본래에 장, 절이 나눠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계속 진행되는 내용으로 여기서부터 소아시아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단 사상과 함께 자신의 진실한 심정을 그대로 호소하고 있는 내용을 본다.
본문의 내용은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건전치 못한 신앙사상의 영향력으로 벌써 적지 않은 부정적 결과들을 보고 있는 데서 연관성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바른 진리에 튼튼히 서지 못하면 교우들을 이단의 먹이감으로 내주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분명히 옳지 못함이 드러나서 몰려갔던 사람들이 신앙을 잃게 되고 교회와 전체 사회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일들이 1세기나 지금처럼 어느 때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철학적 사상이 추앙되던 1세기는 요한일서에 경계되고 있는 영지주의가 그리스문화가 성행하던 어디에서나 신앙에 파고 들어 문제를 만들었고 그러한 영향은 역시 골로새 교회가 위치해 있던 소아시아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직접적으로는 에바브라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교회였지만 당시에 세계 도처에 교회를 세우고 이방교회들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바울의 직접적인 권면이 어쩌면 더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에바브라는 바울의 지도를 부탁했고 육신으로는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은 편지로 진심을 호소했을 것이다.
Ⅰ. 최고의 보물인 그리스도를 가졌음을 깨달으라! (1~3)
바울은 자신이 비록 저들의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멀리 떨어진 로마의 감옥속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영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만 안다면 절대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없음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 누구나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보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1) 바울의 힘씀은 육신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로 투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4:12).
이것은 단순히 골로새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위의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외는 아님을 고백한다. 바울의 이러한 신앙적 자세는 대부분 그와 연관된 교회들을 위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11:29)라는 고백과 같은 의미이다.
“얼마나 힘쓰는지에서 [힘쓰다, ἀγών, 경쟁 장소나 경기장, 우승이나 상을 위한 경쟁, 운동 경기에서 싸움]
그의 사랑과 애씀은 이 우주안에 있는 주님의 모든 교회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라고까지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로 싸우는 것은 육신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라고 영적인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계속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래서 막연한 기도보다 서로의 상태를 서로 나누면서 기도하는 것은 더욱 효력이 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2) 여기서는 왜 자신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그렇게 전투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2f) 어쩌면 이것이 성도들의 원만한 교제속에서 얻어지는 힘과 결속이다. 특히 건전치 못한 교리로 서로 의심하고 나눠진 상태에는 이런 연합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속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그럼에도 바른 진리안에서의 교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위안을 받지 못하고 어떤 신앙적 견해를 나눠도 의심이 가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연합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 연합(하나됨)은 지식이나 허풍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ἀγάπη,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요3:16). 철학적인 사랑은 φίλος로 주로 신앙밖에서 사용하는 사랑이다.)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3:14에서도 하나됨을 위한 사랑의 위대한 힘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증거하고 있다.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2m) 이것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2f)가 가능할 때 모든 것이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게 될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인류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2b) 앞의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b) 한 것 과도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완전히 안다면 다른 것이 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철학의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고 성령의 지도를 받으므로 가능하다. 여기 “깨닫다[ἐπίγνωσις, 지식의 수단, 사고, 판단, 의견]”라는 지식은 세상의 학문을 사랑하고 연구함으로 알게 되는 “지식[γνῶσις, 알다, 알게 되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2b)라는 이유를 다음 절에서 확인해 주고 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3) 신앙에 있어서 지혜와 지식은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OT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먼저는 모세가 광야 40년을 지나고 요단강 동편에 이르러서 회고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각지파의 지도자들을 세움에 기준이 되었다.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신1:13)
그런가 하면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1천번제를 드린 후 꿈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b; 대하1:7b) 하셨을 때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대하1:10)했다가 그가 구하지 않은 모든 것까지 다 받았던 기도에 나타난다.
솔로몬이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지식을 다 받았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했고 듣고 싶어 했던 것이다(왕상4:29~34).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32~33)
사실 사람들이 이 귀중한 보화를 다 가지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하나님께는 이것이 모두 넘치고 풍성하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11:33) [지혜(σοφία, NT51); 지식(γνῶσις, NT29)]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3) 보물로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보화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보화를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원하시지만 순종치 못함으로 누리지 못하는 보화가 된 것이다.
과연 오늘 내가 귀하게 여기는 보화는 무엇인가? 참으로 귀한 것을 보배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이겠지만 보화가 아닌 것을 보화로 알고 일평생을 살고 끝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져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여러분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Ⅱ.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본다(4~5)
이제 진정한 보화 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와 지식을 말하고 이것을 말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를 빙자한 당시의 건전치 못한 가르침을 두고 하는 경계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4) 이제는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교묘한 말[πιθανολογία, 설득력 있는 말, 설득하는 기술, 다른 사람들을 잘못으로 이끄는 허울좋은 말]” 우리 말 표현으로도 그럴싸한 말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꾸며진 말이다.
여기에 선수(選手)는 바로 마귀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것 때문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까지 끌어들이고 만다.
이단들이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면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식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건전한 신앙적 교훈으로 훈련되지 않으면 교묘한 말 사람의 만든 가르침에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바울은 이런 안타까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결정체요 사람들에게 진정한 보배 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보관해 두신 보화를 캐내어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5f) 바울은 역시 범죄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도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5:3)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2:17) 비록 바울의 몸은 로마의 감옥속에 갇혀 있지만 그의 마음은 그들의 삶에 함께 동참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어떤 것 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귀하게 보신다. 오히려 마음은 없으면서 마음에 없는 제사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음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책망하셨던 사실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막7:6)
바울이 마음으로 골로새 교우들과 함께 하면서 나누는 것을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있다.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5b) 결국 우려하고 걱정은 했지만 바울이 심령으로 저들을 확인한 것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저들의 신앙의 튼튼한 방어벽을 보는 것 같은 표현을 하면서 기뻐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질서 있게[τάξις, 질서, 방식. 배열함, 정돈함, 배열, 정렬]” 라는 표현이 마치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의 절도 있는 움직임과 생산라인데 어떤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유능한 역할을 의미하는 말이다.
“굳건한 것[στερέωμα, 견고한 것, 확고한 것, 굳은 것]”이란 마치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방어전선이 튼튼해서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거나 뚫리지 않을 견고한 방비 상태를 의미하는 낱말들이 사용되었다.
바울이 이단에 노출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골로새와 이웃 교회들이 이단이 기어들어와 저들을 침략하려고 하지만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그들을 잘 방어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적인 군인들이 든든한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염려 대신에 기쁘게 그들을 보고 있다는 고백이다.
사실 교회가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런 튼튼한 영적군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능히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셨다. 문제는 구성원 되는 우리 각자의 신앙상태이다. 오늘 우리의 영적전투의 무장이 골로새 교회처럼 물샐틈없는 주님의 군대로 살 수 있기를 …
Ⅲ. 예수를 주로 섬김을 감사하라! (6~7)
자신이 복음의 일꾼 된 확신과 골로새 교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두 번에 걸쳐 고백한 바울은 이제는 신앙적 권면을 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것으로 단순하면서 중요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6)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살라고 하는 당부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역으로 거론하면서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해야 할 이유를 강조한다.
먼저 가운데 예수는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있게 한(존재)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희생으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요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앞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3중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요하다. 예수는 희생을 의미한다면 그리스도는 구속을 완성하시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의 주는 그렇게 하여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 과거 현재와 미래의 입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작을 예수로 구속받았고 그리스도로 중보 해 가시는 현재의 주님으로 예수로 인하여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지만 과거에서 미래 영원에 까지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당부이고 여기는 과거가 무시될 수 없고 오늘이 부정되어서도 안되고 미래의 약속을 잃어도 안된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요 미래 영원의 영광이다. 그런 삶의 이유가 분명하다면 다른 것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사상이던 문화이던 모두 “그 안에서 행하되” 즉,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계시록에서는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3:4)고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 바울은 마지막으로 골로새 교회의 믿음의 성장을 당부하고 있는데 앞에서는 자신의 기쁨을 증거했다면 여기서는 저들이 믿음이 자라서 감사가 넘치는 삶을 당부하고 있다.
앞에서 v5 전투에 임하는 질서 정연한 군대를 비유로 사용했다면 여기서도 각각 4가지의 독특한 형태의 비유를 통해서 신앙의 성장을 당부하고 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7f) 마치 튼튼히 뿌리를 내린 식물을 비유하고 있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과거 완료형으로 쓰여서 한번 박힌 뿌리가 줄기를 튼튼히 지탱하며 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뿌리를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은 적어도 성장의 바탕이며 시작이다.
“세움을 받아” 이것은 건축물을 비유한다고 이해되는데 기초를 잘 다진 건축물이 계속 세워져 가는 것과 같다.
마치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는 말씀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계속되는 3가지 형태의 동사는 현재형으로 쓰여서 계속 지속되는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모두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으로 쓰여진 것이 특색이다.
“믿음에 굳게 서서[βεβαιόω, 확고하게 하다, 강화하다, 확증(확인)하다, 확실하게 하다, 안전하게 하다]” 어느 것보다도 확실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감사함을 넘치게[περισσεύω, 제방을 넘치는 물에서 근거하여 넘치다, 풍성하다, 풍성한, 필요이상의] 하라” 홍수는 뚝을 넘어 범람하면 사람을 상하지만 믿음의 감사는 넘치면 더욱 헌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 4가지 모두 그 바탕이 가운데 쓰인 저들의 믿음의 스승인 에바브라를 통한 “교훈을 받은 대로”인 것도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교훈을 받은 대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데까지 성장해야만 한다. 골로새 교회가 이단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근거를 교훈을 받은 대로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불변하는 보화를 가졌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각자의 믿음이 흔들림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신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믿음은 지속적으로 자라서 늘 넘치는 기쁨으로 세상의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을 때 어느새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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