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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골 3:5~11 2023-04-02
새 사람을 입었으니,  
위로부터 거듭 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하늘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이었다면 위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새사람은 과거 옛사람위에 끼어 입는 것이 아니라 과거 하늘의 가치에 바람직하지 못한 반드시 벗어 던져야 마땅한 것들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결국 육의 사람에 어울리고 세상에 일반적인 삶의 제반 행위들을 벗어 버릴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살피게 된다.

그런 다음 이제 하늘의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입어야 할 것들을 다음 시간에 다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벗고 입어야 할 것들을 말하게 되는 만큼 우리도 이것에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해결해야 할 도전이 주어지는 것이다.

과거의 죄의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 나는 것은 한 순간일지라도 이제 하늘의 사람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성결의 모양과 가치를 갖추어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평생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순종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하지만 과거의 사람인 육신을 아직도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과 죽음으로 이끄는 안타까운 습성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계속 되살아나려고 하는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고 선하신 성령님의 의지를 순종하는 영적인 싸움은 일생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 두가지의 갈등 관계를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결국 육체의 요구들 거절하고 성령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평생의 투쟁이요 싸움이다.

옳지 못한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이 육신의 의지를 꺾는 것이라면 지식과 감정은 물론 이러한 결과인 언어생활에 까지도 점점 소멸하여 점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삶 속에 세워가는 것이 믿음의 삶 즉, 천로역정의 신앙생활이다.



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7)

우리가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삶 땅에서의 삶을 살았지만 변화된 소속이 되었다면 그런 삶을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과거의 삶의 모습은 점점 죽여야 한다는 당부가 오늘 첫 부분이다.

여기에서 먼저 살펴본 것은 3장을 시작(v1)하면서,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시작부분(v5) 과 다음 또 다른 한 마당의 시작(v12)에 공통적으로 시작하고 있는 “그러므로[οὖν, 그래서, 그러므로, 결국, 따라서, 그렇다면]”라는 말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원인을 의미하여 맨 앞 말머리에 쓰는 “왜냐하면[γάρ,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와는 비슷하게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이지만 이 왜냐하면은 번역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 첫 문장을 이끌고 있는 그러므로는 반드시 함께 번역이 되고 있다. ②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변화된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것에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또한 반드시 벗어버리거나 없어져야 한다는 당연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러므로는 앞의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1)이라는 역사를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삶에는 변화가 없어도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구원 얻는 데는 지장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거기에 상응하는 믿음이 삶에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가문이 바뀌고 소속이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변화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며 힘써야 하는 것이 당연함을 오늘 말씀은 도전하고 있다.

그 첫번째의 과제가 바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f) 우리가 하늘로부터 거듭났지만 아직도 육신을 입은 채로 땅에 그대로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치는 분명히 썩어질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로 바뀐 것은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는 여러 곳에 있지만 대표적인 말씀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라는 확인이다. ③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의도적으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가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영적인 영성을 살리고 육신적인 부분을 점점 죽여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제이다.

그런 것들의 구체적인 항목들이 바로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5b) 거론하고 있다. 앞의 “음란, 부정”은 사람들의 근본적이면서 공개될 수 없는 성욕의 잘 못 사용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 이것들을 경계한 바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사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갖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이런 것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고 다음 세대에 끼쳐 두고 가야 할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갖는 경건한 사람들이라면 사실 이런 모습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꽃 한송이도 나 혼자만 보고 싶어하고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탐하는 지나친 욕심이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

좋은 것이나 돈을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위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탐심은 우상 숭배라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왜, 이러한 육의 삶의 자세를 죽이라고 하는가 하면 바로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는 이유 때문이다. ④

청지기 자세로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는 약속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7)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사망을 향해가고 있던 과거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었음을 되돌아보라는 권면인데 같은 경계를 베드로 사도도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이제 하늘의 신비와 영원과 진리와 생명을 맛보았다면 과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죽음의 성품들을 차츰 죽여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고 권고하고 있다.



Ⅱ. 감정과 언어조차 새롭게(8~9)

이제 앞에서 죽여야 될 것들을 거론하였다면 여기서는 두번씩이나 벗어 버리라, 벗어버리고, 라고 다시 당부하고 있다.

새 사람과 옛사람의 비교와 함께 새사람이면 옛사람이 입고 있었던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스러운 것들을 당연히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다. ⑤

안타까운 것은 새사람이라고 하면서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수치감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항목들은 인간관계 속에서 좀더 쉽게 나타나는 감정과 언어생활에 관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죽이는 것이 보다 근본적이라면, 걸치거나 입고 있던 것을 벗어버리는 것은 좀 쉬울 듯하지만 사실에서는 그렇지 만도 않은 것 같다.

입거나 걸치는 겉치레는 소속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단체나 기관에 속한 것을 주로 입은 유니폼 속에서 쉽게 가려낼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천국의 유니폼은 어떤 것일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천국의 유나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했기 때문에 우리가 입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 벗어 던져야 할 잘 못 걸친 것들이다.

이러한 당연한 이치에서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8f) 한 것인데 벗어버려야 할 “이 모든 것”들을 연이어 종류별로 나열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잘 못 걸치고 있는 외관 상의 모습이나 보이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들리게 하는 말이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들이 더러 있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8b) 성경에서는 행동이나 성격을 옷에 비유하는 표현들이 더러 있지만 본문처럼 벗어 버려야 할 표현들을 한 곳만 인용하면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시109:29) 라는 표현이다. ⑥

말세를 당한 성도들이 반드시 입어야 할 옷을 바울은 로마서13:12, 14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당부로서 오늘의 말씀과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여기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8b)는 표현에서 분함과 노여움은 격양된 분노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기를 절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표현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성품을 그리스도에 의해 제어되는 사람이라는 데서 옳지 못하다.

또 악의와 비방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는 죄성의 기질로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순서이고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은 역시 제어되지 않는 죄의 성품이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져서 상대를 해치는 말로 역시 관계를 망치는 도구다.

이어지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9f) 하였지만 사람의 관계를 상하게 하는 육신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행동이다.

야고보는 이에 대한 경계를 주면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사람의 罪性의 취약성이 가장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이라고 지적한다.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거짓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없는 항목에까지 들어가는 사단의 성품이다.

요한계시록21:8 “그러나…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27) 경계되고 있다. ⑦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9b) 우리가 입은 새사람은 확실하지만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부단히 과거 땅의 사람을 벗고 신령한 새사람을 입어가는 것은 평생 지속되어야 할 신앙의 자세라는 데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귀중한 과제이다.

죄의 성품들을 벗고 진리에 속한 진실된 말을 사용하는 그런 삶이 믿음을 줄 수 있고 미쁘신 하나님의 자녀됨과 새로운 위로부터 난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사람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불러오는 자연스러운 도구 역할을 할 것이다.



Ⅲ.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10~11)

오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죽이고 벗고 입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내면적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로 회복인데 여기에는 사회나 어떤 계급도 관계되지 않는다는 놀라운 언약의 확인이다.

앞의 v9 말미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라는 순종의 사람의 자세에 따른 언약은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큰 것으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10f)라는 과거에 시작되어 계속 진행되어지는 동사형태로 쓰여지고 있다.

우리가 靈性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죽이고 벗어버리려 한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엄청난 창조의 약속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체로나 벗은 체로 버려 두실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⑧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창조의 언약에 순종만 드린다면 거기에 따르는 어려움이나 불가능함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채우시기 때문인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f~27) 라는 기록을 통해서 보이는 외형의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형상으로 지으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에덴의 모든 것을 다 맡겨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신령한 형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이 골로새서에 죽이고 벗으라는 당부는 바로 이 불순종한 아담의 행위를 벗으라는 당부이고, 이제 새로운 아담, 절대적인 순종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면 말씀이다.

결국 죽고 벗어서 점점 새로워지는 목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10b) 하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역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 라고 증거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회복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우리 죄인의 지식이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의 지식이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면 벌써 그것은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⑨

또 우리 죄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이것은 사람이 수백 번 죽었다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사람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약속은 공치사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고 우리가 죄를 벗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지식에까지도 새롭게 되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절은 이 엄청난 언약의 대상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하는 선택민족인 유대인 만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한계도 따로 제한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기에는 …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11) 라는 증거이다.

그 대상의 한계가 없음을 너무나 확실히 알려주기 위하여 이 지구상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다 거론하고 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11) 대개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대상을 말할 때보다 더 구체적이다.

가장 범위를 넓게 펼친 표현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고전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갈3:28)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범위를 넘어서 어떤 인종이나 사람도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11)다.

대개 여섯 가지의 간격을 정리해 보면 “헬라인, 유대인”(인종); “할례파, 무할례파”(종교); “야만인, 스구디아인”(문화)의 구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기록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인용된 내용에서도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의 두 종류의 사람들만 간략하게 살펴본다. ⑩

즉 “야만인[βάρβαρος, 말 더듬는, 낯선 말의, 미개한], 스구디아인[Σκύθης, 앞의 야만인 보다 더 미개하고 거친]” 비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미개인(未開人) 원시인, 부쉬맨(Bushman)을 두고 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사실을 1세기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고 하는 로마에 바울이 편지를 보내면서 언급한 내용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f)

이런 이유에서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11b)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가능케하는 원인의 전부라는 뜻으로 인류에게 유일한 구원자로 계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 없이 누리려 한다면 과거 우리가 하나님을 진노케 해 드렸던 땅의 성품들을 죽여야 한다.

결국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분노는 물론 옆으로 지체들과의 관계를 상하게 하는 언어 생활에 있어서도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비롯해서 진리와 반대되는 거짓을 말하는 과거 사람의 모든 행위를 벗어야 한다.

그럴 때 에덴에서 손상되기 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될 것인데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상황의 사람들에게도 제한이 없는 유일하신 회복자 이신 그리스도께서 변함없는 구속주로 창조주로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