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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5:1~6 2024-05-2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본격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논하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지체들과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의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는 모습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물론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궁금해할 수 있는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시기에 대해서 답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면 이 부분은 정확히 답변을 줄 수 없는 부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전에 벌써 이 부분을 언급하실 때에도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권위를 돌리고 있다.

어떤 신앙의 덕목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득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일 수도 있는데 바로 재림의 부분이 그런 부분이다. 주님께서 오심의 때를 밝히지 않으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고 경성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데서 그렇다. 육신의 이끌림에 항상 더 민감한 신앙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시기를 정확하게 안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의지하고 방탕할 수도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의 날과 시간에 침묵하시는 깊은 사랑을 이해한다면 이것 역시 은혜일지언정 결코 우리를 무시하심 때문이거나 좋지 않은 이유가 아님을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림으로 충분한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오늘 나누는 말씀에서 보겠지만 깨어 의를 행하며 사는 생명과 빛의 사람들에게는 그 오시는 시기(時期)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역사의 어두움에 묻혀서 낮과 같은 광명에도 죄악의 잠에 취해 있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의 이유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비록 감추어 두신 우리 주님의 재림의 시기보다는 이 엄청난 이벤트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가 재림의 시기를 알고 모르는 것에 관계없이 ‘어떤 자세로 이 땅에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라는 부분을 두 번에 나눠서 헤아려 보고자 한다.



Ⅰ. 재림의 날은 알 수 없다(1~2)

사람들이 거룩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몰라도 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숨겨둔 것까지도 찾아 내고 알고 싶어하는 궁금증 같은 것도 이유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서도 어떤 부분은 감춰둘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고 이런 것을 굳이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의 시기에 대한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감춰두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유익이 되지는 않을 것임에도 진정으로 행하고 알아야 할 것들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호기심으로 가려둔 부분까지 열어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김없이 공개하셔서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계시이고 이 계시들을 모아 둔 것이 성경이다. 심지어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고 자신과 언약을 맺은 믿음의 조상에게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공개하심을 볼 수 있다. 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는 확인까지 해 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에도 절대로 독선적이지 않은 분이심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나 의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당부가 바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f)거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는 선지자의 당부이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독선적이어서 보다는 오히려 아는 것이 득이 되지 않을 것들은 공개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고 이런 분야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의 시간임을 여기서도 밝힌다.

여기서도 역시 긴요한 당부를 하기 위한 표현을 본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1) 본래 이 땅에 교회 탄생에 대해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 같은 답변을 주신 바 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분명히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실 일에 대해서는 그 권한에 두시지만 역시 그것을 앎으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

여기 “때, 시기” 둘다 시간을 의미하지만 “때[χρόνος, 시간의 흐름, 세월]; 시기[καιρός, 시점, 순간, 사람이 결단을 해야 하는 중대한 상황, 사람이 숙명적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상황]” 항상 사람들은 조급하지만 초침의 움직임에 따라 점점 지나가는 시간이든지 아니면 이 역사 속에 중대한 사건이 있게 되는 순간이든지 시간의 길이나 쓰임은 분명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이러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바울이나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나 오늘 우리를 무시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이미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가르쳤던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을 뒤에 가서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살후2:5)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말했던 것이 변화가 있었다면 그 변화된 상황을 다시 일러줄 필요가 있었겠지 만 이미 말한 것과 차이가 없는 것을 다시 묻기 때문에 거기에 달라진 것이 없음을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2) 이 말이 바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가르쳤던 것임을 확인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서두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두번째 오심에 대한 신앙적 과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부터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증거 되었고 특히 “도둑 같이”라는 표현은 이미 사용되었던 내용이다.

여기 사용된 “주의 날”은 OT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과 심판으로 회개치 못한 상태의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를 나타내시는 날로 나타난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이지 아니할 것이로다”(사13:9~10; 말4:1)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 κύριος”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하여 이 v2의 내용과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같은 경계를 직접 주신 말씀도 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43) 물건을 훔치러 가는 도둑이 자신이 도둑질할 집에 언제 간다고 예고하고 가는 일이 없는 것처럼 주님께서 이 역사에 다시 오심도 그럴 것이라는 교훈이다.

이 약속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도 경계를 주고 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영적으로 입혀 주신 의의 옷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 수치스러움으로 그 주님을 뵙지 않도록 하라는 경계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의 날이나 시간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재림의 때에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지속적인 경건이다.



Ⅱ. 생각지 못할 때 오실 것이다(3)

도둑처럼 오심을 맞게 될 안타까운 사람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극적으로 오실 것인가를 경계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이 두번째 교훈은 늘 파수꾼처럼 깨어 있어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다.

다만 어둠의 세상 속에 빠져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3:4)고 무사안일 속에 있었던 3가지 유형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맞음을 지적하고 있다. ‘1세기에 그렇게 재림을 논해 왔지만 2천년이 지났어도 예수는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라고 주님의 언약을 비웃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런 형편이 될 수밖에 없다.

먼저는 이 말을 하는 대상으로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을 “형제들아!” 했다면 여기에서는 믿음과 관계없는 이방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 말하다”[말하다(λέγω)의 3인칭 복수 λέγωσιν이 쓰이고 있다.]는 표현이 쓰여 비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은 앞에서 이미 본 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이 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계1:7)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첫번째의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f)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 하였다. [εἰρήνη, 평화, 복지, 번영(마음의 평온); ἀσφάλεια, 견고함, 안전(밖으로부터의)]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다 헛소리야 별일 없어 과학은 발달하고, 예언했다고 하지만 2천년이 지났어도 그런 일은 없었잖아!’ 라고 비웃고 있을 때 홀연히 오실 것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노아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내렸던 일에 재림을 비유하심을 본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17:26~27)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8~30)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m) 이 역시 갑자기 닥치게 될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OT에서부터 자주 표현되고 있는 어려움 당함을 묘사한다.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사13:8, 21:3; 호13:13)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b) 마지막으로는 긴박한 사실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외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때에 이 지구상에 홍수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한 노아의 8식구 외에는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벧전3:20).

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구원을 말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6~7)고 증거하고 있다.

올바른 신앙의 사람들은 항상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지만 재림을 믿지 않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절망에 이르는 것과 같은 예고되지 않은 안타까움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이 사실을 믿고 아는 우리 각자가 그런 모습이 되지 안도록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Ⅲ. 깨어 정신을 차리고 기다려야 한다(4~6)

앞에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 경계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서는 예고되지 않은 도적처럼 오실 재림이라도 절대로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확실한 자세를 당부하고 있다. 세상에서도 음지와 양지처럼 빛과 어두움은 항상 존재하고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거처는 이렇게 두가지 형태임을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이 역사는 매일 매일도 밤낮이 바뀌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역사의 종말이 다 된 지금은 밤에나 있을 수 있는 일들이 낮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들은 우리가 빛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경계를 더욱 분명히 가지게 하는 현상들이다. 또 어쩌면 빛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들조차 어두움의 일에 잡힐 수 있기 때문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라는 경계를 주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두움과 빛을 대조하면서 이 빛과 낮에 어울리는 삶을 당부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밤의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믿음안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확인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4)

바울이 형제들아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자신의 혈육의 지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모두가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런 형제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4b)라는 확신이다. 그 이유가 바로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4f)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에서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4f) 라는 사실을 좀더 확인해주는 내용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5) 여기 “빛과 낮” 그리고 반대로 “밤이나 어둠”인데 우리는 대개 “밤 낮”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그와는 반대로 “빛과 낮”이 먼저 거론되고 다음으로 “밤이나 어둠”을 말하는 것도 독특하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로마서13:12을 인용한 바 있지만 “어둠의 일”이 있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빛의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성경에서는 그런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옥중서신 인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차이를 보면 “어둠의 일[ἔργον, 행위]” “빛의 열매[καρπός, 성과, 결과]”인데 어둠과 빛의 성격의 차이임을 이해하게 된다. “어둠의 일”은 그 행위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죄의 일로 공개하는 것이 거리껴 지는 것들이라는 데서 패쇠 적이고 부끄러울 수 있는 것들이라면, “빛의 열매”는 결과로 나타나는 보여지고 공개된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거리낄 것이 없는 오히려 영광된 것이라는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또 “어둠의 일”은 즉흥적인 것이라면 “빛의 열매”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고 견딤으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비롯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다 빛의 아들(딸)이요 낮의 아들(딸)이라…”(5f)는 자긍심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적으로 보면 소속은 이 두 가지밖에 없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b) 증거한대로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들인 것이다.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5b) 다시 이런 확신은 우리 모두의 정체성의 확인이다. 세상에 유혹을 받을 때나 절망 될 어려움의 순간에도 우리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라는 고백처럼 스스로 확인시킬 필요가 있는 말이다.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5b)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6) 끝으로 다시 “우리”와 “다른 이들” 즉, 재림을 소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삶의 차이를 가르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물론 여기에 쓰여 있는 “자지[καθεύδω] 말고”는 앞의 4:13~15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죽어 있는 상태[κοιμάω]의 사람들을 표현할 때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어떤 일어나는 사태에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태로 특히 죄나 도덕적으로 무감각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들처럼 무방비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으로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과연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가져오실 은혜는 무엇일까!”를 설레임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속한 의로운 백성을 영원의 영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약속은 결코 약화시킬 수 없는 엄청나게 귀한 최후의 언약이다. 그럼에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날이나 시간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교회의 설립이든지 구원에 관한 약속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멘할 뿐이다.

다만 어느 때 어느 시간에 오시더라도 준비된 사람에게는 분명 인생의 최고의 이벤트요 복이 될 것이다. 이제는 죄의 유혹을 가진 육신을 벗고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은 영적인 몸이 되어서 상함도 해함도 없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과 바울의 권면을 삶 속에 그대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이 당부에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