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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후 2:13~17 2024-07-21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바로 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직전에 있게 될 미혹과 그 미혹된 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루었다면 그러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안에 머물러 있는 택함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기도로 바뀌고 있다. 그것은 불의를 좋아하는 불신자들과는 다르게 진리를 믿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시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을 확인하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앞의 불의를 좇는 부류들과 하나님의 선하신 진리의 교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다름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귀하고 감사하며 또 바울도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잃게 하거나 빗나가서 옳지 못한 어둠의 유혹에 넘어가게 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Ⅰ.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려 택하셨다(13~14)

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계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을 인하여 변화된 삶으로 주어진 믿음의 과제들을 감당하고 있는 지체들에 대하여는 기쁨과 감사로 격려를 주고 그러한 변화된 삶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13)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2)라고 진리를 거절하고 오히려 불의를 따르는 자들의 심판을 확인하는 안타까움과는 달리 사랑을 담은 말투로 이미 살전1:4에서도 보였던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한 것처럼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고 확신과 기쁨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13m) 마치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1:3) 한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의무감처럼 감사를 드리고 있다. 물론 1:3에서도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마땅히 또는 당연히 감사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사람이야 말로 바울에게 데살로니가나 빌립보의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믿음의 관계에서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13mb)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감사해야 할 당연한 이유는 저들이 온 갓 핍박이나 어둠의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이유를 고백하고 있다. 처음부터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정하셨다는 로마서8:29의 말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택하셨다는 표현은 본래 OT의 LXX에서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7:6)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낱말이다. “택하다[αἱρέομαι, 선택하다] (빌1:22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히11:25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심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고 그 선택받은 사람 측의 입장에서는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13b)”라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앞의 10b에서는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한 것과는 반대로 진리를 믿음으로 라는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그런 논리에서 “이를 위하여” 라고 하는 것이다. 이 데살로니가 전 후서의 특징 중 하나는 역시 길지 않은 이 편지에 같은 표현들이 반복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하였지만 앞의 살전1:5f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저들에게 증거된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되었다고 선포하고 앞의 1:8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하여 증거된 복음을 믿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로마서2:16에서는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 감추인 것을 심판할 것이라는 확인까지 주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b) 복음 속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이 세상 속에서도 복음을 순종함으로 얻는 유익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믿음의 대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라지고 썩어질 세상의 영광과는 비교될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시기는 물론 예수께서 이 역사 속에 다시 오셔서 영원한 영광에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베드로 사도가 (벧전5:10)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1:10에서도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할렐루야!



Ⅱ. 변치 않는 전통을 지키라(15)

이제 그 영광의 날까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두번째 내용이다. 이런 약속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라는 전제를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는 것이다. 또 이 확인의 대상에 대해서도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체들이기 때문에 “형제들아!” 라고 부르고 있다.

“굳건하게 서서” 이는 당연히 앞의 v1~10의 생명 얻을 믿음을 흔들고 혼란케 하는 실제적인 상황일지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는 경계의 교훈이다. 신앙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은 언제나 어느 교회에나 바울이 주는 권면이다. 고린도 교회나 옥중서신에서 지속적으로 주는 당부의 말이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6:1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1:27)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1:23f)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15b) 앞에서 옳지 못한 교훈일 경우에는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2)는 경계를 준 것과는 반대이다. 신앙의 사람들이 지켜야 할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세상에서 온 것이나 사람의 지혜라고 하는 철학이나 연구한 학문도 아니다.

이 시대에 어떤 신앙의 사람이 신비한 체험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생명의 교훈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면 그것은 더욱 진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지킬 것에 대한 자신의 경계는 될지라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는 말씀은 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기존에 주어진 성경의 교훈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라면 오히려 앞 v3~12에서 경계된 유혹의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던져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경계되는 교훈이지만 3:6에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하였고 사도 요한도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1:10)는 경계를 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기에 대한 당부를 분명히 주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말, 편지, 가르침 받은 전통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교훈으로 확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66권의 성경말씀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표적과 이적으로 이 말씀들을 인증하셨기 때문이다. 먼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조차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βεβαιόω, 확고하게 하다, 확실하게 하다] 하셨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도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μαρτυρέω, 증언하다, 증거하다] 라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다시 확증하는 내용을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2:4) [συνεπιμαρτυρέω, σύν + (ἐπιμαρτυρέω, 증거하다) ~와 함께 증언하다]

누구든지 복음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또는 교회들에게 증거할 수 있으나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의향을 섞어서 증언할 수는 없고 이미 확정된 구원의 진리를 가감 없이 증언함으로 그 말씀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6:10) 한 것처럼 대적들이 능히 반박할 수 없는 역사를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15)는 당부는 이 역사의 마지막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경계되는 가르침이다. 이제는 사도들도 예언자들도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받았다고 하는 가르침은 따를 수 없고 오히려 경계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의 참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함께 같은 소망으로 믿음생활 하는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도 그래야만 한다. 어쩌면 이 혼란의 시대에 가장 분명한 생명의 교훈을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도 감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주어진 진리로 확정된 66권의 말씀만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하는데 전혀 모자람이나 혼란이 없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546:1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리라, 소리 높여 주께 영광 돌리며 약속 믿고 굳게 서리라,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다면 약속된 영광에 들어가는데 부족됨이 없을 것이다.



Ⅲ. 모든 선한 일에 흔들림이 없도록(16~17)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감사와 당부를 준 다음에는 그들을 위한 기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긴 기도는 아니지만 먼저는 기도의 대상을 청하고 구하는 내용을 다음 절에서 보게 된다. 특히 여기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은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기로는 죄인 사랑으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주시고 죄와 절망에 한숨짓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위로와 소망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16) 하나님을 찾는 데는 다른 곳과 조금 다른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살전3:11) 일반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언제나 먼저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지만 앞의 v14b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은혜의 중보자 이시기 때문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영광을 얻으시기에 부족됨이 없고 여기에 서열적인 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거론하는 것으로 독생자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모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계획을 이루신 것은 어떤 상황과 시간 속에서도 결코 약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성도들에게 이루신 것이 간략하게는 두가지이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것이다. 변함이 없는 영원한 위로가 믿음을 굳세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흔들림 없이 견고히 서게 하라는 이유에서 특히 이런 사실을 당부했던 앞에서의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15)라는 당부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좋은 소망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변치 않는 약속에 뿌리 박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어떤 것과 도 비교될 수 없는 좋은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은혜로 주신 즉, 사람의 공로나 대가 없이 선물로 주신 것이 중요하고 감사하다.

바로 이 귀한 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신데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확인하는 사람이 야고보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이런 이유에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다. 감사하게도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 은혜를 누리고 있고 언약 속에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가진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확신하고 헤아리자.

이제 짧기는 하지만 좀더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을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7)고 구하고 있다. 먼저는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1:4) 한 것처럼 그것이 동족이든 유대인이든지 밖에서 오는 환란을 위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안으로도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4:13)했던 것처럼 믿다가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슬픔에 위로를 주실 것을 구하고 있다.

이미 주님께서 재림하셨다는 유혹으로부터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2:2) 믿음을 흔드는 것들로 부터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도 내적으로는 마음에 위로를 주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히 지키실 것을 기도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충성된 일꾼인 바울 역시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비록 안팎으로 어려움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은혜로 보호하여 지키실 것을 기도하는 내용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신앙에 튼튼히 서있는 것 자체에 감사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결코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은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믿음생활 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한 감사의 이유가 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어떤 일들이 잘되는 것도 충분한 감사의 이유가 되지만 그냥 진리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임을 배운다. 그러나 신앙하는 마지막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도들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가르침 즉, 확정된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 진리를 지키는 자들을 위해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같이 은혜에 참여한 사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도자들과 동료들도 모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아들을 제물로 내어 주셔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친히 유월절 양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의 위로와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도록 서로 또 더불어 기도하여 영광의 약속에 부족됨이 없기를 기도한다. 이 모든 영적인 것들이 유효하도록 성령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