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살후 3:1~5 2024-07-28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재림에 대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데살로니가의 반응 때문에 이 길지 않은 두번째 편지를 주고 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너무 민감하고 과열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는 부분이다.

먼저는 복음을 데살로니가에서처럼 잘 전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권하는 내용이 오늘 다루는 첫 부분이고 v6~15에서 삶의 기본적인 형태를 잃어버려 자신의 역할은 고사하고 다른 지체들에게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을 교훈 한 다음 뒷부분에서는 일반적 서신들의 마무리 형태로 편지를 닫는 내용을 보게 된다.

어쩌면 가장 뒤에 배치한 이 부분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권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는 데살로니가의 교회의 좋은 신앙의 자세들을 칭찬하고 격려한 것과는 다르게 구체적으로 문제를 찾아 지적하고 있다는 데서 그렇다. 또 교회를 세우고 훈육한 사도이기 때문에 이런 당부도 무리가 됨이 없이 효과 있는 지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데도 문제점을 찾고 지적 받는다면 역시 기쁘게 돌이키고 고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유리한점이고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을 계속 지키고 고수한다면 나중 우리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때 보다도 재림의 징조들이 빈번한 오늘의 상황에서도 더욱 진지하게 자신의 역할을 찾아 최선을 다하며 또 다른 편으로는 언제든지 주님 오시면 떠날 수 있는 현재와 영원을 준비하는 신앙이 된다면 오늘 오셔도 또, 우리 각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오셔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은 뒤에서 특별이 결론을 주지 않을 것이다.



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1~2)

바울은 로마서15:30이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도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 하였고 옥중서신들인 빌립보서1:19; 골로새서4:2; 빌레몬서1:22은 물론 에베소서를 보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라는 기도의 요청을 하고 있는 것들은 어느 교회에나 차별 없는 부탁이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1)라는 요청을 보는데 앞의 데살로니가전서5:25에서도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했던 것 과도 다르지 않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인 율법이나 구원의 진리에 밝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위해 어느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다면 ‘오늘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더 큰 기도의 협력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이것이 마지막 당부 같은 긴요함을 호소하는데도 더욱 무개감이 있다. 언제나 긴요하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요청을 할 때마다 부르는 형태를 여기서 첫째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청하는 기도 요청의 내용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쉽게 말하면 이러 이러한 것들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1b)” 이것이 첫번째 기도의 제목이다. 안팎으로 복음이 더 많은 영혼들에게 전해져서 구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봐왔던 대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이 잘 증거되어 그 복음의 최종적인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부분에까지 역사를 일으킴을 인정하고 있다. 또 이 편지를 기록하여 보내고 있는 이 아가야 지방에도 같은 효과를 기대하며 이런 기도를 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범위에서의 복음 증거를 간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므로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의 요청하는 기도의 내용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은 기도의 제목이다. 복음의 확산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교회의 첫째 사명이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2f) 이것이 바울의 데살로니가에 요청하는 두번째 기도의 제목이다. 복음은 어디에 이르든지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악하고 부당한 것이다. 아무래도 데살로니가에서는 자신들의 복음 증거를 방해하던 불신의 유대인들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행17:5f)라는 사도행전의 기록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덧붙여지는 말씀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2b)라는 오늘 우리가 제목으로 잡은 말씀이다. 여기에 “믿음[ἡ πίστις]”은 앞에 관사(ἡ)를 두고 있어서 그냥 일반적으로 쓰이는 믿음이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믿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앞의 이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2b)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로 헤아리기만 해도 그 귀중한 믿음을 오늘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기록을 OT 한 곳에서 보겠는데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신32:20) 이 말씀을 역으로 이해해 보면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서 숨기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지막이 안타까울 것을 이스라엘에게 증거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 자신들을 또는 교회를 통해서 주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고 악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는 부탁할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서로를 위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감격이요 복됨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Ⅱ. 너희를 지키실 것이다(3)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던 바울의 요청은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또, 나타나는 표현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데서 역시 사도다운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앞의 두절 속에서 요청했던 기도의 내용이 여기서도 같이 연결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특히 앞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응답을 확신하는 내용으로 확신을 주고 있다.

“주는 미쁘사” 앞에서 “믿음[ἡ πίστις]”과 같은 어근이 “미쁨[πιστός,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신임하는, 믿는]”이 쓰이고 있다. 모든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구하고 그 믿음에 신실함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믿을 만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의 믿음으로 구하는 원인에 미쁘심으로 응답하시는 결과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런 확신을 이미 주신 바 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

이렇게 언제나 구하면 신실하셔서 응답해주시는 믿음직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 자체가 또 우리의 확실한 감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도 이런 미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이런 미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시험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되심도 확인해 준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이런 믿음직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확신한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연이어 두가지를 증거하고 있다. 먼저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했는데 “굳건하게[στηρίζω, 지지하다, 고정시키다, 강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단단하게 하다]”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 사람 스스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특히 앞의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키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쉽게 나 자신이 믿음을 지켜가고 세워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역시 여러가지 혼란한 영적 세계에서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지켜 주심과 세워주심을 고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나는 부족하지만 세우시고 지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일생 다 가도록 고백하고 감사하는 믿음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의 v2f에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기도를 요청한 바울은 역시 그렇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격려하는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을 부당하고 악하게 움직이는 보다 근본적인 세력들인 마귀 사탄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별별 수완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마귀 사탄일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이기지 못할 것이므로 이런 분명한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싸움은 해보나 마나 빛이 나타나면 어둠은 도망치게 되어 있는 것은 자연 질서 속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는 바울의 격려는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앞의 내용에서도 이 악한 자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2:9) 라고 그 출처를 분명히 증거한 바 있다. 악한 자는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수완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의 신실한 백성을 그들에게 넘겨주실 수 없는 분이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악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진리의 법으로 빛의 방법으로만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실 것이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방법, 진의 말씀을 따라서 죄와 어둠에 대항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신이라고 이름 붙인 존재로 신실할 수 없는 것은 인격을 갖지 못한 존재들이고 사람들이 이름 붙이고 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고 오랠지라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들뿐이다. 스스로 계시고 홀로 한 분이신 사람을 지으시고 독생자를 인류의 죄 값으로 보내주신 믿음직한 신실하신 하나님 만이 우리를 온 갓 죄 악과 거짓에서 지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Ⅲ. 우리가 명한 것을 행할 줄 확신한다(4~5)

앞에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였다면 여기에서는 여러가지 혼란케 하는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같은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 또한 바울 자신들의 당부를 그대로 행할 것을 믿는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들의 마음을 이끄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인내와 같이 저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4) 원문에서는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라는 표현이 맨 앞에 쓰여서 강조적이다. 바울은 물론 믿음의 사람들의 확신은 바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롬14:14f) 라는 선언처럼 믿음의 사람들 조차도 상호간의 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3:4f)

우리가 신앙안에서 서로를 믿고 맡기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을 움직이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신실하심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로마의 감옥에서 쓴 서신(옥중)들에 자주 사용된 표현들도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2:24) 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통한 확신이었다. 물론 복음에서 율법으로 변절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확신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갈5:10f)

다만 무엇을 확신하는가 하면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4f)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다.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들어가 복음을 전한 때로부터 실천하는 신앙으로 이미 거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라고 감사한 것처럼 같은 믿음을 지켜 가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순종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 “우리가 명한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믿음의 가르침의 교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교회에 당부할 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그대로 순종할 것에 대한 당부밖에 없고 또 교회는 그것이 성경의 진리와 다르지 않다면 행하고 행할 수 있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믿음은 더욱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명하는 것이 기쁜 것이라면 행하는 것이 쉽겠지만 듣기 힘겹고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면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사실 듣기 어려운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복되고 바람직한 성숙한 신앙이다.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확신”한다 했는데 이미 순종이 잘 된 사람들이 순종하기 쉽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항상 순종하는 것처럼 어기는 것도 한번 어기게 되면 어기는 일도 더 쉬워지는 상황들을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에서도 지속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의 신앙의 삶을 든든히 세우셔서 흔들림이 없게 보존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그러한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도 과거에 바울이 전해준 교훈들을 잘 지킨 것처럼 앞으로 지키고 행할 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한 바울은 이제 이러한 당부와 권면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5) 신앙의 본질은 보이는 환경이나 시간적 외형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심인 마음으로부터 출발함을 여기서도 배운다. 그런 이유에서 시작은 역시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이다. 사람의 마음이 누구로부터 인도를 받느냐 하는 것은 각 사람에 있어서는 마음에 누구를 or 무엇을 중심에 모시거나 담고 있는 가가 그 사람의 외형과 보이는 모습을 결정하고(不惑의 얼굴) 아울러 삶을 다스려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하다[κατευθύνω, (곧게 하다에서 유래) 똑바르게 하다, 인도하다]”라는 말은 사용된 낱말은 다르지만 마치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볼리로 가고”(행16:11) 라거나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3)는 기록과 같이 돌아가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어떤 목표를 정한대로 곧바로 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왕으로 차지하고 계시기만 하면 이 사람의 삶은 당연히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되어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는 확인을 요청하는 것이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의 구체적인 목적을 두가지로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5b) 물론 어떤 방향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조금은 의미를 달리하는 쉽지 않은 말씀의 이해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즉, 신앙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변함없이 간절히 기다리는 인내를 지켜갈 것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로 보인다. 이런 상태라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핍박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인내를 지속적으로 지켜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지금까지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한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행할 줄을 확신하고 또 주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인내로 잘 기다리게 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