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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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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3: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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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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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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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내고 많은 기간이 지나지 않아서 어쩌면 급하게 이 후서를 써 보낸 것은 바울의 경계의 서신을 받고서도 재림에 치우쳐 신앙의 올바른 규모를 잃어버리고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사람과 같이 규범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치우친 믿음의 삶을 바로잡고 올바른 자세로 재림을 기다릴 수 있도록 이 둘째 편지를 급히 보낼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이 부분이야 말로 가장 긴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천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 기준은 바로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 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며 사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아담의 불순종으로 야기된 범죄와 그 결과로 인류에 오게 된 비극적인 운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구속을 위해 주님께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 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셔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약속하신 복음의 역사와 언약에서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하고 그러한 규범은 사람이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또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지도하신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 했는데 조금은 막연한 표현이었지만 이것을 풀어 말하면 사람의 본분과 삶의 자세, 그리고 목표가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과정과 목표여야 한다는 말이다.
또 그렇게 될 때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부조화가 아니라 화평과 조화를 회복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칭찬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조차도 이런 안타까운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어떤 것에 치우치기 쉬운 믿음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드시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를 우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만 또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21세기에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안타까운 경험을 다미선교회와 같은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해프닝 속에서 본 바 있고 지금도 자신들 만이 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한답시고 건전치 못한 신앙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데서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Ⅰ. 받은 전통대로 행하라(6)
여기서는 이제 구체적인 권면을 당부하는 내용을 듣는다. 이미 v4에서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라고 하여 자신이 명한 것을 반드시 순종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 다음 이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당부도 단순한 사도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서 명하는 것을 듣는다.
또 이미 앞의 전서5:14에서도 비슷한 당부를 한 바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새번역) 라고 거기서는 좀 더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권면을 준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더 직접적이고 강한 권면이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6) 다정한 말투로 불렀지만 명령에는 보다 큰 무개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명령의 중요성과 반드시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성에서 교회의 원인이요 절대적 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순한 권면도 아닌 명령을 주고 있다.
이 명령을 순종하면 살겠지 만은 그렇지 못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중대한 최후통첩 같은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첫번째로 중단해야 할 것은 “게으르게 행하고”하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게으를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리스도인의의 삶은 우리 주님처럼 부지런 해야 영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잠깐의 짬이라도 나면 잠을 주무실 정도(막4:36~38)로 육신적으로는 고단한 삶을 사셨다. 바울을 통해서 교회에 주신 교훈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한 것처럼 게으름으로는 절대로 정상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다. “게으르게 행하고”라는 의미가 그냥 게으른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래 군인이 군대의 대열을 빠져나온 무질서하고, 무책임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6b) 물론 앞의 무책임이나 무질서 조차도 바울 일행으로부터 받은 전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통[παράδοσις, 교훈, 가르침, 전수함, 전수된 것]” 등 등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미 바울 일행으로부터 가르침 받은 신앙적 교훈들을 의미하므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이란 지금까지 배운 신앙의 규범을 어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방법대로 열심을 다해 믿음생활을 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지만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열심이나 기대는 나중에 안타까움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에 대해 경계하는 것처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바울 자신의 사울 때 모습이었다. 이만큼 받은 전통대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신앙의 첫째 과제이다.
이 사람들에 대한 자세는 사뭇 단호하다. 이런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멀리 하라는 말인데 비슷한 표현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16:17)는 당부를 볼 수 있다. 결국 자신들이 전체 속에서 버림 당할 수 있다는 경계를 가질 수 있도록 저들을 격리하는 것으로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다.
Ⅱ. 본받아야 할 신앙적 자세(7~9)
가르침 받은 바른 교훈에서 이탈하여 제멋대로 행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떼어 둘 것을 명령한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에서 행했던 자신들의 신앙적 모범을 제시하면서 저들을 깨우치려 한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7f) 빌립보 교회는 물론이고 데살로니가의 성도들도 그곳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썼던 바울 일행의 모습을 너무나 잘 봐왔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기억시키는 것으로 모범을 삼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7) 앞의 v6의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정 반대되는 자신들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무질서 한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바울을 통해 무질서한 교회에게도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하였고 다시 v40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당부하셨다. 질서는 바로 품위와 연결되고 외형적인 모습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8) 이제는 좀더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요즘 쉬운 표현으로는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어쩌면 신앙의 지도자들이 행하기 쉬운 자세로 여겨진다.
축복해 준답시고 신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바울은 이런 경계를 주고 있다. 물론 여기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는 한끼의 음식을 말하는 것보다 생활의 수단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건전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다른 지체들에게 폐를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구원은 값없이 받았지만 구원의 은혜와는 다르게 주고받는 나눔에서는 일반 사회보다도 더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미 전서2:9에서도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는 고백을 한 바 있다.
특히 여기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ἐπιβαρέω, 짐을 지우다, 짐되다]” 하는 표현으로 믿음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다. 신앙의 지도자 된 바울 일행이 그랬다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야 그의 신앙적인 교훈은 물론 육신적인 삶에 있어서도 이러한 지도자적인 자세를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9) 자신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 조차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꾼 된 의무를 중요하게 여겼노라고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교육보다도 모범은 어린아이들에게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교육적 가치가 있음은 우리 주님의 교훈에서도 보는 바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여기에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한 것은 일꾼이 자신의 일한 삯을 받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님께서도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10b)고 가르치신 바 있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도 증거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4)라고 일한 자로서 그 일을 하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럼에도 같은 고린도 교회에게 비슷한 고백을 한 바 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1~12) 함으로써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9)는 같은 모범을 제시한다.
바울의 신앙적 교육은 말에 그치지 않고 모든 신앙적 삶에서 철저하게 모범을 보임으로 모든 교회를 세우고 이끌었다. 그것이 육신적으로는 힘들고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바울의 표현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자신이 주님을 본받는 자세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교훈을 버리고 방종하는 어리석음 보다는 자신들과 같이 생명을 가진 모습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함을 행동으로 교훈 하는 것이다.
Ⅲ.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라(10~12)
사람은 창조에서부터 일하기 위해서 존재하였다. 에덴에서부터 아담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b) 창세기3:19f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범죄 후 아담에게 주어진 과제도 역시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로하는 지나친 노동을 금하기 위하여 일주일을 주기로 하루를 반드시 안식할 것을 율법에서조차 법으로 명시하셨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창세기3:19을 노동이 범죄의 결과라고까지 비하하지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유대 격언을 보거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라는 말씀을 봐도 일은 저주가 아니라 분명 권리라고 볼 수 있고 일이 없어 무료한 사람을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10)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조차도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먹고 살 것을 당부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어떤 말씀이든지 악용의 소지는 있지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구호를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했다고 전한다. 언제나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된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행했던 모범을 제시한 다음에는 어떤 경로로든 간에 데살로니가로부터 듣게 된 사실에 대하여 다시 책망조의 훈계를 주고 있다. 이런 훈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가 들은 즉” 한 것인데 과거에서부터 현제까지 같은 안타까움을 듣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경계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를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11) 이미 v6에 “게으르게 행하고”라 지적한 바 있지만 “게으르게 행하다[ἀτάκτως, 무질서하고, 무책임하게]”라는 것이 기존의 대열에서 이탈한 군인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는 의미라고 했다. 좀 더 확대하면 탈영병으로 돌아다닌다는 의미까지 생각할 수 있다.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은 남의 일에 간섭할 시간이 없는 것은 자신의 일에 마음을 다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빈둥거리는 사람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하늘의 백성이요 군사 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배려하고 힘쓰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표현 자체가 비생산적이면서 오히려 소모적이다. 물론 생산적인 것이 다는 아니라 하더라도 요즘 흔한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를 통한 자동생산시스템의 한 부분을 맡은 사람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지 않고 다른 부분을 맡은 사람을 간섭하고 있다면 그 생산 라인은 제대로 역할 할 리가 없는 것과 비길 수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 또 다른 과제를 만들어 힘겹게 하는 역할은 오히려 하지 않음이 좋을 것이다. 여기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περιεργάζομαι, 쓸데없이 말참견하다, 남의 일에 참견하다]”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것으로는 주님의 재림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이런 일은 그만하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오히려 잘못된 독려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12)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기에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이고 이미 전서에서도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0b~11)는 당부를 한 바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당부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마지막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을 권면하는 이유와 권위를 좀더 분명히 그리고 엄격해졌다.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6)라고 명령의 권위를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명령했다면 여기서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사도의 권위로 “우리가 명하고” 한 것이라면 권하는 이유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는 것으로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이라고 좀더 진지한 권면의 이유를 주고 있다.
명령과 권면의 내용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12b)는 것이다. 자신의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재림이 긴박한 만큼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광신적인 지적을 그만 두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신앙적이든지 육신적인 일들을 충실히 감당하라는 당부이다.
이러한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교훈이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언제인가 이 세상에 자신의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겠지만 그 때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지속적으로 베푸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로부터 받은 전통이자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 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적인 것이지 마음은 관심과 기도로 긍휼을 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따라야 하고 본받아야 할 신앙적 삶의 교훈은 넘치고 넘친다. 무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수고 없이 요행을 기대하고 욕심내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주어진 자리에서 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의무에 충실한 신앙이 되어야 또 후대의 모범이 될 수 있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가 될 것이다.
신앙의 어느 부분이든지 광신적인 자세보다는 균형 있는 믿음으로 오늘과 내일을 그리고 영원을 위한 자신의 역할과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오히려 묵묵히 믿음의 대가로 받는 자신의 영육의 양식을 먹으며 주님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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