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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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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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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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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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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잠시 석방되었다(빌2:24)가 다시 투옥되고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성경에는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적 기록을 통한 주경학자들 대부분이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렇게 바울의 투옥에서 순교까지의 어간에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책들이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에 7개의 편지가 있다. [엡, 빌, 골, 몬, 딤전, 딤후, 딛] 그러나 교회의 사역적인 내용으로 [딤전, 딤후, 딛]를 소위 목회서신이라고 분리하고 나머지 4편지인[엡, 빌, 골, 몬]을 옥중서신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우리는 빌레몬서를 제외한 옥중서신을 이미 다룬 바 있다.
이런 전통적인 입장에서 이 디모데전서나 후서 그리고 디도서도 옥중서신에 포함되지만 엡, 빌, 골가 교회들을 향한 공적서신이었다면 몬, 딤전, 딤후, 딛 4개의 편지는 개인에게 보내진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다시 받아 줄 것을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빌레몬서야말로 진정한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디모데나 디도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일지라도 딤전, 딤후, 딛 세 편지는 개인의 관계나 교제를 다루는 내용이 아니라 교회의 조직이나 훈련 또는 이단의 경계를 당부하고 가르치는 데서 개인적인 편지이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들을 위한 당부들이어서 공적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는 기록한 장소나 기록 연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편지가 바로 이 디모데전서이고 물론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되고 이해되며 교회의 운영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주변적인 것들보다는 내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중요하다. 물론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디모데에 대한 바른 입장도 중요하고 이 편지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바울의 의향이 무엇이었는가를 바로 이해하는 것도 모두 중요한 과제들이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신 것을 이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내진 서신들을 보면서도 놀라운 것은 1세기 당시에 벌써 이런 문제들이 있으므로 그 후 2천여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의 문제들을 그 때 기록한 말씀들을 통해서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나는 대로는 디모데는 어리고 마음이나 육신이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면서 바울의 지도를 받아 보냄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역할을 했지만 전체 교회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조직을 세우고 문제를 바로잡는 하나님의 다림줄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스스로의 경건을 위해 매진하는 것을 볼 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바울이 디모데를 지칭하는 이름들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딤후1:2), 형제(살전3:2), 뜻을 같이 한 자(빌2:20), 동역자(롬16:21), 하나님의 일꾼(살전3:2),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1:1), 하나님의 사람(딤전6:11) 등등으로 그가 감당한 역할이 많았고 경건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 질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속에서 역할이 곧 이름이자 별명이 되었다.
중심이 되는 한 구절을 선택한다면 3:15의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는 말씀인데 어쩌면 이 말씀이 디모데전서를 대표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간략하게 살피면 맨 먼저는 이단에 대한 경계의 부분이다. 이 21세기도 그렇지만 1세기에도 유대교와 혼합된 영지주의가 에베소와 같은 교회 속에 파고 들어와 건전한 신앙을 뒤흔들고 비도덕적인 무사안일을 조장하는 거짓 스승들은 대부분의 교회들 속에 나타난다. 다른 교훈(1:3), 신화와 끝없는 족보(1:4), 헛된 말(1:6),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4:7),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6:20) 등과 같은 경계들이 이 편지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두번째는 교회 구성원들의 윤리적인 관계와 신앙적 경건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덕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삶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교회 조직에 대한 체계와 직분자들의 자격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어 교회의 머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로 지켜지는 견고한 하나님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었다(엡2:22).
이 편지의 특징을 간략하게 보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또다른 말투들을 보는데 그것은 주로 교회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특징 때문일 것이지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강한 표현은 전혀 없고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편지들 보다는 좀 차가운 표현들이다. 소위 교리라고 하는 신앙적인 체계는 전체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으며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편이다. 그야말로 교회의 운영에 집중되어 있다.
서론의 마지막으로 구성을 간략하게 살피면 1:1~20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와 함께 약간의 신앙의 체계를 볼 수 있다. 2:1~3:16 교회의 예배를 포함한 공적 모임에 대한 교훈으로 집회의 질서와 지도자들의 자격을 주로 다루면서 특히 경계되는 부분까지 가르치고 있다. 4:1~16 거짓 교사에 대한 교훈으로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함께 참된 진리를 지켜갈 당부를 주고 있다. 5:1~25 교우들 서로 간의 태도로 당시 교회의 중요한 구제의 대상이었던 과부에 대한 섬김의 기준을 제시하고 권징에 대한 경계들이다. 6:1~21 사역자의 임무에 대한 교훈으로 재물에 대한 태도와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으라(1~2)
바울이 쓴 대부분의 책들은 교회들에게 신앙적 문제들을 하나님의 진리에서 해결하도록 당부라는 교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바울의 서신들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에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진실한 일꾼인 바울을 통해서 중요한 신앙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게 된 것도 야훼이레의 하나님 아버지의 준비하심이라고 믿고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개인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나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이미 인정하고 존경하는 스승일 터인데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는 데서 일부의 사람들은 이 디모데전서를 사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어느 누구에게나 자긍심을 가질만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였고 비록 아들처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제자들일지라도 이것이 결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귀중성을 강조하는 데서 또,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고백과 자존심을 끼치기 위해서라는 이해를 한다면 분명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1f) 이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이 불안전하고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할 수 있는 대상이 과학도 아니요 정치도 아니요 값나가는 황금이나 보석들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우리 구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의지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이와 연결되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함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서 수없이 예언하고 있는 말세적인 징조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면서 과연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고, 돈이 많은 부자들은 몇 억 $를 지불 하고라도 달이나 화성과 같은 다른 행성들에 라도 살 곳을 마련하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 그런 생각은 이 지구촌에 계속 살아 남으려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발상임에도 그 가능성없는 스페이스X 사업과 같은 일들에 엄청난 투자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역시 그들의 생각이 그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와 약속을 볼 때 이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언약은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2f) 편지의 시작부터 바울의 애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을 대개 믿음의 자녀로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생소한 표현은 아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고전4:14~15)
그러나 여기에도 “참[γνήσιος, 참된, 진정한, 진짜의]”이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다. 세상에서는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를 하는 예들을 더러 보는데 육신적으로 참 아들이기 보다는 영원한 세계속에 함께할 아들이 더 귀함을 확인할 수 있다.
“디모데[Τιμόθεος, 하나님의 영예 = (τιμή, 값, 가치, 영예, 존경) + (θεός, 하나님)]” 사도행전14장에 나타나는 대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후에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 성밖에 내쳤고(19) 그때 둘러선 제자들 중에 디모데가 있었고(20) 바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 복음을 위해서 살 것을 결심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이유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은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내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3:10~11)
다시 사도행전16:1~3의 내용에서 바울의 사역에 합류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디모데의 신앙적 경건성은 유대인인 외가쪽으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뒤로는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후 디모데는 고후, 빌, 골, 살전, 후, 몬, 6권의 책에 보내진 편지에 연관되어 나타나고 에베소 교회는 물론 문제가 있는 교회들마다 보내지는 내용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디모데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해서 다시 디도를 보내는 내용도 나타난다. 이렇게 신앙의 가정에서 나서 자라 바울로부터 진리의 복음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다.
이런 디모데의 특성은 그의 진실성과 경건성을 들 수 있어서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딤후1:4)라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도 보는데 그러나 그에게 심신이 유약한 내용[딤전4:12(네 연소함-어린), 5:23(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들을 헤아려 보면 바울로부터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위임받아 두려움과 안타까움으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역이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b) 아들로 여기고 사랑하며 귀하게 여기는 제자에게 축복하는 내용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1:2)라는 내용과 거의 비슷하지만 여기에 더해진 것은 긍휼[ἔλεος]이다. 앞에서 표현한대로 연약한 육체에 때로는 심약한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긍휼로 붙들어 주심을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Ⅱ. 다른 교훈이나 신화를 가르치지 않도록(3~4)
간단한 인사와 축복후에 바로 중요한 신앙적 논리로 들어 간다(3~20). 그 첫째가 이단에 대한 경계와 함께 율법을 바로 사용할 것과 자신의 신앙적 자세를 본받을 것을 명하는 것으로 실천적인 신앙의 삶에 있어서 본서의 집필의 목적 중의 하나인 신앙적 논리를 증거한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3f) 둘이 소아시아인 에베소에 전도하다가 바울이 유럽인 마게도냐로 건너가면서 디모데는 에베소에 계속 머물 것을 명령한 사실을 회상한다. 물론 그 이유는 하반절의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3b)라는 과제를 감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막게 하려고 에베소에 남겨 뒀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는 대로 에베소는 아시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아데미신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역시 여기에도 잡다한 이단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교회에도 침투하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과정이 어린 디모데에게는 그렇게 쉬운 과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어른들의 말이 더 호소력이 있었고 아직 젊은 디모데가 그런 건전치 못한 믿음을 대항해야 하는 것은 적잖은 두려움과 어려움이 되었을 것을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추측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를 권하여[παραγγέλλω, 명령하다, 명령을 내리다, 가르치다, 지시하다]” 이 일을 감당하도록 머물러 뒀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3b) 건전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다[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 = ἕτερος, 다른, 다른 것, + διδάσκαλος, 가르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훈이 아닌 당시 아시아에서는 유대교와 적당히 혼합된 영지주의가 신앙의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교회는 십자가의 교훈이 가르쳐져야 하는 곳임에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틈을 타서 철학의 우월성을 의지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있는 율법을 들먹이며 건전한 신앙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를 디모데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다는 말이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4f) 이것이 어쩌면 다른 교훈의 내용이었음을 지적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전해지는 그리스의 신화들은 말 그대로 신화에서 비롯되었고 끝없는 족보는 유대인들의 전승되어 오는 선민의식에서 온 자긍심이었다. 신화에는 족보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족보가 포함되었다는 것으로 유대주의와 혼합된 이단사상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신화[μύθος, 말, 이야기]는 근거나 역사를 가지지 못하는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고 이러한 신화는 어디에나 있어온 무용담(武勇談)들이다[단군신화, 박혁거세]. 이것은 역사와 사실을 기록한 성경과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람들은 성경도 신화로 취급해 버리는 데서 믿음의 간격이 생기는 것이다. 족보도 후손 된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조작되고 심지어는 사고 파는 우스꽝스러운 일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양반-상놈).
결국 왜, 이런 것에 몰두[προσέχω, 주의하다, 전념하다]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실적인 것들에 마음을 둘 필요가 있지 근원이 분명치 않은 만들어진 이야기나 지금 자신이 온전치 못하면서 끝없이 족보를 들먹이는 것은 전혀 믿음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만들어진 신화나 사실적으로 훌륭했던 조상들도 경건하게 삶을 살지 않는 한 믿음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4b)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다툼과 혼란을 가져오는 것뿐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특히 여기 “경륜[οἰκονομία, 관리, 경영, 행정 = οἶκος, 집 + νόμος, 법, 규범, 율법]”이 하나님의 경륜이기 때문에 하나님 집의 법이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이루는 것이 부정되고 있는 것으로 문제가 되고 “변론[ἐκζητέω, 질문, 심문]”은 믿음과는 반대되는 논쟁과 말싸움이 되기 때문에 신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특히 이런 모든 것들을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있다는데 호소력이 있다.
지구촌의 사람들에게 변치 않는 소망을 주실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뿐이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래도 이 지구가 또, 그의 백성들이 멸망치 않고 삶을 유지하며 온전한 은혜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참아 주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들로 신화와 같이 만들어지거나 과장된 이야기들에 심취하거나 과거의 존경스러운 이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현재를 변명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것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고 다툼과 변론을 낼 뿐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변함없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바른 교훈에 합당한 믿음의 고백과 삶을 드리는 모두 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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