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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3:8~13 2024-10-06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교회의 직책은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과 각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 오히려 단순화되었음을 에베소서4:11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디모데나 디도를 통해서 이미 세워진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릇됨이 없도록 운영하며 이 땅에 교회를 두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의 역할을 위하여 신앙의 깊이가 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공식적인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와 주님의 백성들을 섬기도록 하셨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직분자의 자격만큼이나 성숙되는 것이 목적이다.

교회의 전체적인 사명을 대개 3가지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교(전도)와 교제(예배), 그리고 구제가 그것이고 지난 이 3장 첫 부분의 내용이 보다 영적인 진리를 지키고 증거하기 위한 신앙적 논리의 보호를 위한 직분으로 감독(목자, 장로)이었다면 이 집사의 직책은 주로 섬김과 구제의 부분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이런 직책은 그대로 쓰여져 있지 않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쉽고 그렇지 못한 구분이 있어진다면 분명 하나님께 드려진 물질을 관리 함에 있어서 옳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별도의 일꾼들을 뽑았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1세기 정치의 문제나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의 문제였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관리를 위하여 물질을 나눔에 있어서도 영적인 자격을 묻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6:3)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5f)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이 나눔의 원리도 성경에서 이탈되어 있어서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재정의 관리나 사용이 장로들의 감독하에 영적으로 충성된 일꾼들에 의해서 운용되지 못하고 몇몇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 주로 재정이 사용되고 그런 것들이 모든 지체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린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쩌면 오늘 날도 교회의 정결함은 재정의 투명도에 비례되기도 한다.

또, 이 집사의 직분도 더러는 남용되고 오용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10f)이란 말씀이 지나쳐서 ‘서리집사’라는 직분이 너무 남용되고 있는데 분명히 여기 시험하여 보고는 거론되고 있는 모든 자격이 갖춰진 후여야 함에도 신앙의 깊이를 갖지 못하고 믿음의 기준도 정리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또 다른 문제는 여자집사의 문제이다. 앞에 2장말미에서 이미 여자들이 교회에서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고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3b~34b)는 바울의 가르침도 본 바 있지만 마치 세상에서 어떤 기관들처럼 공평한 분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겨지고 있는 것 역시 이 시점에서는 확인해 봐야 할 믿음의 과제이기도 하다. 역시 오늘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내용과 다른 메시지가 될 것 같다.



Ⅰ. 집사의 자격조건(8~9)

본래 “집사[διάκονος, 식사에 시중드는 종,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지만 NT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1:25 사도들에게 쓰여 “봉사” 로마서15:8에서는 그리스도께 쓰여 “추종자”로 갈라디아2:17 “짓게 하는자” 고린도전서3:5에서는 바울과 아볼로에게 쓰이며 “사역자로” 로마서13:6에서는 관세를 받는 공무원들에게 “일꾼”으로 고린도후서11:15에서는 사탄의 “일꾼”으로도 사용되어 상당히 넓은 범위에 사용되는 낱말이었지만 교회 속에 구제의 공정성을 위하여 뽑혀졌다(행6:1~6).

앞의 감독의 자격과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로 연결되고 이 두 구절에 적어도 6가지의 신앙적 덕목을 지적하는데 각각 3가지는 적극적으로 반드시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와 부정적으로 가져서는 안될 3가지를 말한다. 물론 이어지는 v11에서 그들의 아내들도 4가지 신앙적 덕목을 가지고 남편과 믿음이 같은 부부여야 함을 덧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8) 한가지의 긍정적인 모습과 3가지의 부정적인 자세의 지적이다. “정중하고[σεμνός, 숭고한, 존귀한, 존경할만한, 존엄한, 거룩한]” 같은 낱말이 v4의 감독의 자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뒤의 v11에 직분자들의 아내들에게서 도 요구되고 있는 신앙의 덕목이다.

있어서는 안될 내용이 연이어지고 있다. 연이어 세가지 낱말 앞에는 부정을 의미하는 “아니하며[μὴ]”가 사용되어서 이어지는 행동이나 모습을 부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δίλογος, δίς(twice), + λόγος, 말]” 이중으로 말하는, 거짓말하는,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마다 다른 말을 하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οἴνῳ πολλῷ προσέχοντας,]” 앞의 v3에 감독의 자격에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정도를 넘어선 알코올중독이 되어 있는 상태 까지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αἰσχροκερδής, = αἰσχρός, 더러운, 부끄러운 + κέρδος, 이익, 유익, 이득]” v3b에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는 것과는 좀 다른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나 지나친 욕심으로 만들어지는 이익을 거절하는 깨끗한 경제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역시 그렇지 못한 데서 실패한 사도가 되고 만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12: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돈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9) 이제 적극적인 믿음의 덕성 두가지를 거론한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가 먼저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시행하신 구속의 신비는 마귀 사탄도 알아채지 못한 신비에 속한다고 자주 말한 바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범죄케 한 사탄에게 창세기3:15에서 이미 선언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는 마귀 사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헤아리고 감격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라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양심” 1:5에서 바른 교훈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이라 하였고 v19에서 다시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격려한다. 범죄 후의 양심은 이미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는 이름뿐인 양심이 되고 말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거듭난 양심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닮은 선한 양심일 수 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9) 이 구절의 구성 자체가 하늘의 직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깨끗한 양심의 마음의 그릇에 “믿음의 비밀” 복음의 신비를 담고 사는 사람이라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신령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의 집사직을 가진 여러분들은 이런 복된 섬김의 자세로 섬기기를 …



Ⅱ. 세움과 신앙일체의 부부(10~11)

검증되지 않은 도구는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다. 특히 세상의 기관에서도 각 사람의 전공과 감당했던 일의 경력을 검증한 후에 일을 시키지만 교회의 직책은 그렇게 세상의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고 특히,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일꾼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처럼 양성(兩性)을 완전히 갖춘 신령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기관이요 집인 교회를 섬기게 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검증과 아내의 신앙인격까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10) 앞의 v8~9에서 자격의 여부를 확인했다면 다음 단계로 그 자격들의 진위와 구원에 관한 확신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가의 검증을 한 후에 야 이 직분을 맡기라는 것으로 그 단계는 적어도 4가지를 거치고 있다.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δοκιμάζω] 보고” 했는데 금속이 포함된 돌을 녹여 함유된 금속만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낱말로 절대로 간단한 test가 아니다.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두번째 단계로 그 시험에 적합성 여부이다. 당연히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일에서는 제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이것은 적합성에 인정된 사람에 대한 세번째 단계이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단계는 후보자 자신만의 검증이 아닌 그의 아내 역시 최소한 네 가지의 영적 소양을 갖추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사실 남자가 세상을 움직이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고 이미 2장 말미에서 봤던 대로 아담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분리시킨 것은 아담 자신이기 보다는 아내인 화와 이었음을 살핀 바 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 이 말씀의 이해가 여러가지인 만큼 역시 오늘의 교회들 속에서 남용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 없이 전체적인 논지의 흐름만 봐도 이것이 여자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명령보다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휴머니즘 적인 전제가 먼저임으로 이 말씀을 여자집사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γυνή, 아내, 애인, 과부 또는 내연의 처] NT에서 아내(마1:20, 24, 5:31, 9:3, 5; 행 5:1, 7; 고전 7:3, 10, 13; 엡 5:22; 골 3:18; 계 21:9)로 번역된 것이 가장 빈번하다. 객관적인 번역들일수록 아내들로 번역하고 있다(흠정역, 한글KJV, 공동, 현대인, 현대어). 이 말씀을 여자집사로 단정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연결되는 다음 절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12) 한 것과 같이 여자는 절대로 한 아내의 남편이 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믿음을 중심으로 기록된 성경에서는 주로 가부장적인 남편이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내용이 “여자 집사들은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라는 남자와 대칭이 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여자는 창조의 질서에서 타락의 이유에서 범죄한 사람을 회복해가는 교회에서 만은 남자를 앞서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한 바 있다(2:13~14). 그러므로 일관성이 없는 어떤 논리는 사실 호소력이 약하다.

중요한 것은 직분자들의 아내들 역시 4가지 정도의 신앙적 경건성이 검증되어야만 함을 증거하고 있다. “정숙하고” 이미 v8에서 집사의 자격에서 거론된 내용이다. “정숙[σεμνός, 존귀한, 숭배할만한, 존엄한, 거룩한]” 빌립보서 4:8 “경건하며”와 함께 NT에 단 4회밖에 사용되지 않은 낱말이다(8, 11; 딛 2:2).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어울리는 존엄성을 가지는 것이 그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의 반사가 될 것인데 부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덕목이다.

“모함하지 아니하며[διάβολος, 중상자, 비방자, 마귀]” 하나님의 백성이요 일꾼이면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는 어둠의 세력의 성품을 가지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감사하고 축복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절제하며[νηφάλεος, 술취하지 않는, 정신차리고 있다, 근신하다, 침착하다]” 베드로 사도를 통한 당부를 생각할 수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모든 일에 충성된[πιστός,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신임하는, 믿는] 자” 어떤 입장에서나 신실한 자세로 믿음을 나타내는 자세를 이름이다. ‘절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럼으로 어떤 일에서도 믿음을 나타내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집사직을 감당하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조차도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도전하고 정리하는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증거하는 것이다.



Ⅲ. 또 다른 자격과 상급(12~13)

앞의 감독의 자격에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4) 한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역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와 가족이 먼저 알 수 있고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고 순복하는 자세로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건하지 못하면서 가족에게 경건을 주문한다면 그것은 호소력이 없고 또 억지가 되겠지만 솔선수범하는 믿음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감격과 기쁨을 끼치고 순종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12) 감독뿐만 아니라 집사직을 가진 사람도 신앙에 있어서 가정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스리는[προΐστημι, 인도하다, 돌보다, ~에 관심을 갖다, 수행하다 = πρό, 앞에 + ἵστημι, 서게 하다, 서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하들을 앞에 두고 자신은 뒤에서 지휘한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앞에 두는 것이 사실이다. 위험의 노출에도 자신이 먼저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독에게 있어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1) 믿음직한 신앙의 지도자는 언제나 자신을 앞에 두는 자세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12) 아내에게는 둘도 없는 남편으로 자녀들에게는 모범스러운 믿음의 아버지로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해결자로 나서는, 어떤 위기나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마치 문제가 어려움이 아닌 것처럼 주님을 의지하여 처리하는 믿음을 가족들에게 끼치는 것이 믿음의 남편이고 믿음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에게 주어지는 약속도 분명하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13) 사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직분을 맡았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 감당하는 비결이다. 자신이 맡은 일이 다만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먼저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13f)이란 다른 의미로 잘 섬긴 사람들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 말씀하심으로써 죄에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섬기러 오셨음을 친히 말씀하셨다. 여기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13f)이란 말도 바로 섬기는 직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을 이름이다. 교회에서의 마지막에 제일 영광스러운 상급은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름다운[καλός,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 지위[βαθμός, 계단, 지위]와…”(13m) 복스러운 위치를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지만 종적인 계급이 없이 횡적인 섬김의 교회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적인 표현 같이 들린다. 그러나 공의라고 하는 것은 가장 공정한 것을 의미하고 섬김에 있어서 선한 행위에는 반드시 보상을 약속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시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증거하셨다. 여기 지위[βαθμός, degree]는 공부한 노고에 대한 학위라는 데서 역시 수고에 합당한 보상이라는 의미가 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섬김에 대한 상급의 이러한 약속은 현실과 미래에 있어서 실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성실하게 잘 섬기는 사람들은 감독의 지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13b) “담력[παρῥησία, 민주주의 체제에서 언론의 자유를 의미]” 공개된 장소에서 머뭇거림이 없는 자신의 믿음의 경험을 증거하는 것으로 신앙의 담대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하느니라”(히10:35) 격려함을 보는데 그러므로 믿음에 큰 담력이란 지속되는 믿음의 삶에서 믿음이 점점 자라서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 있게 우리 주님과의 경험을 증거하는 모습으로 내면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위치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 이러한 이해들이 모두 조심스러운 것은 교회에서의 직위가 승진된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서 성실히 직분을 감당함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교회의 직분의 충성은 결국 보이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도 확실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 격려가 허황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