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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6:6~10 2024-12-08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단자들의 또다른 문제는 신령한척 영적인 쪽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부분 물질을 좋아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사라질 세상의 영광을 투자하여 신령한 것을 사라는 그럴싸한 이론들을 내세우지만 결과에 가서는 주동자들의 배를 불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가지는 물질들은 악한 것이거나 선한 것도 아니며 쓰여 짐에 따라 그 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많이 가지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니고 또 모자라게 사는 것이 칭찬들을 일도 아니다. 건전한 중국이나 동양, 서양철학은 물론 당시의 스토아 철학에서도 자신의 현실의 가진 것에서 만족하고 욕심내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은 대부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느끼고 즐기는 세상의 것들은 변화가 많기 때문에 물질의 많고 적음이나 종류는 기쁨이나 만족을 줄 수 없는 것들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변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에서이다. 사람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 하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영원한 저주를 친히 해결하시고 단순히 그것을 믿고 거듭나 마음을 주님의 성전삼고 그 마음가운데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인생은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그대로 고백하는 내용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는 당부인 것이다.



Ⅰ. 진정한 이익이 되는 경건(6)

이 말씀은 어쩌면 바로 전 절인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당시의 이단자들의 종교를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달리, 참으로 인생에 이익으로 주시는 경건을 바른 믿음의 소유자들에게 확신시키는 “이익[πορισμός, 이익, 이익의 수단]”이란 같은 낱말이 역설적으로 쓰인 표현이다.

앞에서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했던 것이 여기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으로 바뀌었고 “경건을 이익의 방도”라고 생각하는 자들과는 다르게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꼭 같은 형편에서도 삶의 기준이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로지 고난뿐이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후6:4~5) 어찌 보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세상의 부유와 안락을 저울질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형편의 고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이것이 세상적으로 보면 어찌 자랑이 되겠는가 만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 이것이 진정한 자랑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은 이런 이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것에도 만족을 모르는 죄투성이인 부패하고 범죄한 나 자신이 마음의 주인으로 앉아 있는 한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해도 만족이 있을 수 없겠지만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도말해 주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성전(聖殿)삼고 계신다면 나의 작은 순종만으로 기뻐하시고 우리의 삶에 하늘의 기쁨과 감사를 이 육신을 떠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실 것이다.

바울은 좀더 실제적인 고백을 빌립보 교회를 향해 주고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참으로 대 사도로서 이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이다.

역시 범죄한 사람으로서는 만족이란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만족을 가지는 마음이 하늘로부터 거듭난 신령한 것이 되었을 때 주어진 형편에 관계없이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에게는 이만한 형편도 차고 넘치는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사도인 바울 사도가 그런 삶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 “자족하기를 배웠노니”한 것처럼 “자족[αὐτάρκεια, αὐτός, 자신 + ἀρκέω, 충분하다, 넉넉하다, 만족하다]”은 절대로 스스로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다. “배웠노니[μανθάνω, 배우다, 경험하다, 알게 되다, 이해하다, 어떤 것에 익숙해지다]” 의미들을 이해하면 어떤 형편이나 처지에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을 섬김으로 배우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러워 갈 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의 중심점은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닌 “경건[εὐσέβεια,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열쇠가 되어 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경외는 것은 단순히 영적으로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에도 많은 이익이 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를 이미 4:8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증거한 바 있다.



Ⅱ. 만족할 수 있는 이유(7~8)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보는 사실이다. 사람이 아닌 자연의 동물들이나 식물들은 어떤 척박한 환경에 있건 불만을 표하지 않음을 본다. 주어진 형편과 환경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참으로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사용한다. 그럼에도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온 갓 간교한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 문제는 가진 것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오히려 거기에 익숙해져서 형편의 큰 변화가 없는 것에서 견디고 감당하지만 요즘 표현대로 금수저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가진 것을 다 잃게 되는 경우에는 주어지는 어려운 환경을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이런 경우에도 예외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의 경우가 그렇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의 아내는 그와 같지 못했지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어도 초연함으로 오히려 회개의 기회로 삼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22) 이 고백이야 말로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라는 말 그대로임을 인정한다.[1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2아들 일곱과 딸 셋, 3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 종도 많은]

그러나 이러한 욥의 행동의 결과가 더 중요한 것을 본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의 자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욥과 같다면 그렇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달랐음을 2장에서 본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이러한 말은 ‘하늘도 무심하지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처럼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인다.

그럼에도 이런 욥과 같은 고백을 하는 또 다른 한 사람 역시 이 땅위에서 최고의 부와 영화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 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5:14~15) 역시 세상에서도 쉽게 쓰는 표현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쉽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빈 주먹 불끈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돌아갈 때는 양손을 모두 펴고 이 세상을 하직한다. 여기에 예외의 인생은 있을 수 없다.

시작과 끝이 이렇게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8)는 권고는 오히려 맹수들에게서조차 사람이 배워야 할 지혜이다. 아무리 포악한 짐승이라도 자신의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일일을 염려하는 것은 이 땅 위에 사는 동물들 중에 유일하게 사람이라는 짐승들뿐이다. 물론 이 말은 내일을 준비치 말고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필요이상의 욕심을 내는 것은 결국 자신을 상하고 주변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보다도 사회적인 동물이 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의 감사로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5:19)고 표현했다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누리지 못함의 안타까움도 숨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6:2)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8) 사실 사람들이 이것이 안돼서 서로 간의 관계를 망치고 탄식하게 되는 일들이 적지 않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8) 이것은 자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채우심을 확신하는 하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늘 또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집이 없어서 걱정하고 ‘무엇을 먹고 살까!’ 탄식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12:13~ 형이 재산을 혼자 가지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부자청년이 예수께 와서 형을 명하여 자신과 재산을 나누라 명령해 달라는 요청을 드린다. 이 말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은 이런 일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님을 선언하시고 v15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부자가 재산을 모아놓고 자위하지만 v20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그 준비한 것은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될 것이라고 비유하신다.

까마귀나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그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마음을 쓰시겠는가 증거하고 우리의 걱정으로 키를 한치도 늘릴 수 없다고 가르치시고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30) 말씀하신 후 저 유명한 마태복음 6:33의 말씀과 같은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는 약속을 확인하신다.



Ⅲ. 욕심의 위험성(9~10)

성경은 부자를 긍정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 부유를 지키기 위한 욕심이 역할 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이 말씀은 부자들을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 즉, 인위적으로 속히 부유를 갖으려고 애쓰는 것을 책망하는 이유는 그런 상황을 어둠이 틈타기 쉽고, 믿음을 잃을 수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쉽게 하는 말이 ‘돈이 사람을 좇아야지 사람이 돈을 좇으면 불가능하다.’라는 표현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공동) 거기에 따르는 많은 부정적인 상황들을 만나게 되고 마지막으로는 인생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결과에 이르게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최소한 5가지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결과들이 등장하는 안타까움을 부르게 된다. “부하려 하는[βούλομαι, 바라다, 원하다, 의도하다, 갈망하다, 노력(분투)하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들이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사람이 노력하고 애써도 쉽지 않은 것이 바로 부자 되려는 욕망이다.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9m)했는데 “시험[πειρασμός, 유혹, 시련]과 올무[παγίς, 함정, 덫]” 언제나 유혹은 경계해야 하고 절대로 어떤 것에 묶여서 빠져나올 수 없는 덫과 같은 함정도 절대로 피해야 할 무서운 함정들이다.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βλαβερός, 남을 해하는] 욕심” 욕심은 그 자체가 나 만을 해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해하는 지경에 이르고 어리석고 해로운 마음의 시험이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떨어지나니[βυθίζω, 잠기게 되다, 빠지다]” 재물에 눈이 멀게 되면 결국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 교제가 단절되는 비극으로 가게 되어 있다.

“…곧 사람으로 파멸[ὄλεθρος, 멸망, 파멸, 죽음]과 멸망[ἀπώλεια, 멸망, 파괴, 상실]에 빠지게[βυθίζω, 가라앉다, 잠기게 되다, 빠지다] 하는 것이라”(9b) 했는데 비슷한 의미를 가진 두 낱말이 쓰였지만 파멸은 현세적인 육체의 멸망을 의미한다면 멸망은 영원 속에서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세와 내세의 멸망을 다 같이 거론하고 있다는 데서 절망적이다. 특히 빠지게 하는 것이란 배가 깊은 바다 깊숙이 침몰하여 절대로 다시 떠오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절망적인 표현이다. 이런 비극적인 사실을 알고도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혹시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 가운데 ‘그런 일이 나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이 세상의 철학적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오늘 마지막 말씀 역시 가히 절망적이다. “돈을 사랑함[φιλαργυρία, 돈에 대한 사랑, 탐욕]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10f) 이 말을 반대로 신앙적으로 바꾼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모든 선의 뿌리와 바탕이 되나니”라고 표현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라고 했다. 오해를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 만이 모든 악의 뿌리’는 아니다. 신앙의 사람이 재물을 지나치게 사랑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인 결과들이다.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10m) “탐내다[ὀρέγομαι, ~을 얻으려고 내밀다, 또는 얻으려고 애쓰다]”는 의미로 이것이 만약에 하늘을 향한 것이 된다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부를 사모하다가 여기 “미혹을 받아[ἀποπλανάω, 길을 잃다, 미혹되다, 빗나가다]”란 마치 궤도를 도는 별이 자신의 위치를 잃은 것과 같은 혼란을 의미하는 데서 믿음의 천로역정의 길을 잃어버린 신앙의 사람을 비유하는 것으로 믿음에서 떠나는 안타까운 결과가 되는 것이다.

“…많은 근심[ὀδύνη,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b) 근심은 적을수록 좋고 없을수록 더욱 좋을 뿐 아니라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권면하고 있다.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찔렀[περιπείρω, 꿰뚫다, pierce]는데 마치 고기를 꿰뚫어 걸어 놓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고통으로 마음의 중심이 구멍 뻥 뚫린 상태를 표현한다. 이래서 하나님과 자신과 물질이 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자 되려는 유혹으로 하나님을 떠나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은 물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은 다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이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항상 자신의 최고의 자리 첫째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은혜 때문에 생명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자신을 바로 이해하고 이러한 관계에서 물질을 바로 사용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의 삶은 만족과 행복이 되고 물질은 바른 가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