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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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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6:1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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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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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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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디모데 전서의 맨 마지막에 주어지는 당부는 마치 부록 같은 성격으로 보이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부분이 v15~16에 나타나 다른 서신들 같으면 이미 끝낸 것으로 보이는데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무엇인가 조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서 다시 부록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또 이어지는 부유에 대한 경계는 이미 v6~10에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에 다시 거론하는 것 역시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앞에서 v9~10에서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자들을 경계했다면 여기서는 이미 현재 부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계로 조금 다르다. 당시 디모데가 파견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수도 격인 에베소는 교통의 중심지인데다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상들이 지나는 길목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자 이렇게 부록을 덧붙였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부자에 대하여 직접 경계하신 내용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말씀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하셨다. 직접적인 언급이 눅12:16~21은 지난 번에 인용한 바 있었고, 눅16:19~31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도 유명한 부유(富裕)에 대한 교훈이다.
신앙의 실천부분을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혈육의 형제였던 야고보 역시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10) 하고 다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5:1)는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의 삶의 토대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사실 영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반석위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시지만 현재의 부유와 영원 속에서 부유는 각 사람의 선택에 따라 차이가 남을 이해할 수 있다(마7:24~27; 눅6:46~49). 그럼에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쉽게 포기하는 것 역시 말처럼 쉽지 않다. 이왕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보다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터 위에 부유(富裕)를 쌓으므로 허물어질 수 없는 진정한 부유를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Ⅰ.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17)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권면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아직 어린 디모데로 하여금 명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상당히 엄중하게 들리고 삶의 가치를 쉽게 변하거나 잃을 수 있는 물질에 두는 것 보다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 신앙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부자들에게 두번씩이나 부정적인 명령을 주라는 것이다. “말고, 말고” 거기에 중심이 되는 것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이다. 쉽게 표현하면 현 세대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다. 가진 것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지고 욥에게 있어서 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변화 무쌍한 것에 소망을 두었다가 그것을 잃게 될 때 그것들에 가졌던 기대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고 무모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경고이다. 특히 이들은 그냥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17f)라는 것에서 “마음을 높이지 말고”라는 표현은 NT에 여기만 쓰여진 표현이다. 마치 예수께서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스스로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12:19)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처럼 스스로 자신 만만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v20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움직일 수 없는 재산이라는 데서 부동산(不動産)이라고까지 하지만 이것도 주인이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특히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면 다음 날은 다른 사람의 소유로 빼앗길 수도 있다. 세상에서 한 때 부유와 영광이 극에 달했던 솔로몬은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23:5)고 이 현 세상의 부를 허무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받았지만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오히려 탄식함도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6:2)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지막의 비유가 더 인상적인 것은 “악한 병이로다” 한 것으로 치료될 수 없는 질병과 같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17b) 앞에서 두번씩이나 높이지 말고, 두지 말고, 했다면 이 뒷부분에서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어도 결코 손해보거나 피해가 있을 수 없는 확실한 소망의 바탕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확실에서 확실로 옮기라는 당부이지만 이는 역시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부족함이 없도록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모든 것을 후히 주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후히 주시는 사람은 주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하셨는데 뒤에 연결되고 있는 내용이지만 여기서도 “주라!” 즉, 베푸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 너무나 확실한 교훈이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을 두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라고 증거했다. 또 받는 것 못지 않게 “누리게 하시는” 것이 중요한데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5:19)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남에게만 끼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누리게 하시며”하여 즐거워할 수 있게 하신다는 확인이다.
우리의 일생 수고의 결과들을 변화무쌍한 세상의 가치에 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b)는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안전함을 권하고 있다.
Ⅱ. 장래의 생명을 위하여 쌓으라(18~19)
여기에서는 바로 앞에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에게 명했던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17b)라는 구체적인 사래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찌 보면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둔다는 것이 너무 막연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사실적인 방법을 지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이들보다 많은 재물을 받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남들을 위해 선한 일에 사용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18) 자신에게 모아져 있던 부유를 옆으로 나누는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먼저 “선을 행하고[ἀγαθοεργέω, = ἀγαθός, 선한 + ἔργον, 일]” 바로 뒤의 “선한 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NT에 여기와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14:17) 라고 단 두곳에만 사용된 낱말이다.
주님께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b) 라고 묻는 청년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답변하셨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근원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동들을 일컫는 말로 이해할 수 있고, 이런 바탕에서 “선을 행하고”는 단순히 착한 일 좋은 일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들을 행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예배나 섬김, 봉사를 비롯한 신앙의 행위들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세상적인 행동들 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하라는 넓은 범위로 이해할 수 있다.
“선한 사업[ἔργον, 일, 행위; καλός,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 앞의 “선을 행하고”와는 출처가 다르고 그 어순이 바뀌어 있는데 앞의 ἀγαθός라는 표현이 주로 복음 속에 사용된 낱말이라면 καλός는 주로 LXX의 OT에 많이 쓰였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범주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많이 하고”라고 격려하고 있다. 우리의 아름답고 좋은 행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복음을 순종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εὐμετάδοτος, 기꺼이 나누어 주는]” 역시 NT에 여기만 쓰인 단어이다. 배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에 대해서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는 표현이 이와 같다.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κοινωνικός, 흔쾌히 나누어 주는, (κοινωνία, 친교, 교제, 참여, 나누어줌)]는 표현은 많이 의역이 된 감이 있다. 여기서는 단순한 물질의 나눔이 아니라 마음의 나눔 즉, 받는 자의 형편에까지 마음으로 동참하는 삶의 나눔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런 내용을 참고하여 이 구절을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새번역]라고 번역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 이제 이렇게 기꺼이 베푸는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마치 산상보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0f)는 당부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앞에서 부정적으로 쓰였던 “이 세대에서” 했다면 여기에는 “장래에”로 바뀌었고 v18에 오로지 남들에게 베푸는 그 아름다운 행동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기를 위하여”도 복되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하여 오히려 생명을 잃는 비극을 말씀하셨다면 이것이야 말로 반전이다.
“…좋은 터를 쌓아…”(19m) 이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져주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만 가능한 약속으로 세상의 방법으로는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한 약속이다. “터[θεμέλιος, 기초, 자본, 보화]”는 모든 세움의 바탕이 된다는 데서 소중하고 든든하게 닦아야 그 위에 흔들림 없는 세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터는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께서 확실히 가르치신 바 있다. 마태복음7:24~27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26)이라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오늘 주어지는 교훈 역시 다르지 않은 교훈이다.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b) 생명에도 최소한 두 가지 정도의 생명을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생명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사회에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생명이다. 그보다는 나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유익을 줄 수 있는 생명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명이지만 그것을 언제 잃어버릴 지 모르는 데서 참된 생명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잃을 염려가 전혀 없는 영원 속의 생명을 기대하는 고백을 듣는다. 물론 오늘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b)는 고백은 이미 믿음 속에 있는 부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주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b) 말씀하심으로써 육신의 가진 유무형의 소유로 생명을 누릴 수 없음을 증거하셨고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눅12:33f) 하심으로써 세상에서 가진 부유를 가지고 참된 생명을 취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Ⅲ.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하라(20~21)
마지막으로는 다시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대한 경계로 마무리를 주고 있다. 당시에 신앙에 많은 혼란을 일으켰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의 이론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권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어 생활은 심중해야 하는 것은 야고보를 통해서 경계한 바 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반드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오히려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야고보서3:1~에서 본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20) 여기서는 강조하기 위하여 이름을 불러 당부하고 있다. 딤후2:16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다시한번 당부를 주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는 건전치 못한 사람들과의 변론도 유익되지 못함으로 오히려 반론 조차도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스스로는 충분히 우리의 믿음을 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르지 못한 교훈 때문에 오히려 감정이 거칠어지면 바른 진리를 증거하기 어려워지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야3:2)의 말씀도 생각할 수 있다. “망령[βέβηλος, 신성하지 않는, 세속적인, 모독적인, 불경스러운]되고 헛된 말”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거짓된 지식”이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든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만든 교리이기 때문에 구원의 진리와는 당연히 같을 수 없고, 영지주의 같은 경우는 본래 철학을 바탕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야 신을 감지할 수 있다는 지식주의를 주창하고 있지만 지식도 참된 지식이 아니라 거짓된 지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대적하는 비 성서적인 철학사상이면서 종교형태가 영지주의이다(假現說).
이런 모든 옳지 못한 것들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20b) 당부하고 있는데 “피함으로[ἐκτρέπω, ~로부터 얼굴을 돌리다, 외면하다]라는 의미로 쉽게 말하며 ‘외면해 버려라’라는 정도에까지 몰인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감당하지 못한다면 도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또 이 서신에서 당부한 것들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신앙에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고 결국 계시된 성경의 진리 외에 새로운 진리는 없기 때문에 배우고 확신한 일만 충실히 한다면(딤후3:14)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나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증거한다.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21) 바울은 이렇게 디모데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경계를 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믿음을 저버리고 이런 옳지 못한 교리에 붙잡힌 사람들이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이성적인 지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히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어느 시대나 이런 간교한 종교들의 내용은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세상주관자들인 어둠의 영들의 사악한 역할 때문이다(엡6:12).
그럼에도 그런 대상을 물리치고 죄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나 노력이나 철학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이러한 안타까움을 당부하면서도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21b)라고 축복으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1세기 디모데의 때는 물론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현재의 경우도 부유한 사람은 많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빈부(貧富)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안에서 자칫 자신이 가진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나누는 즐거움보다는 그것을 지키는데 집중하는 경우 교만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사랑받는 근거로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은 책망 받아야 마땅하다.
없는 사람은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른 지체들보다 많이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과 사람을 구원하는 선한 사업에 힘쓰고 나누고 베풀며 어려운 지체들과 삶을 나눔이 된다면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자신의 터를 쌓고 빼앗길 수 없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
우리가 성경의 계시를 통한 구원에 확실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거짓된 영적인 지식의 논쟁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오직 계시된 진리를 지키는 것만이 유효하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믿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잃는 일들이 수없이 있어왔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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