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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후 2:8~13 2025-01-19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지난 시간에 나눈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지만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과 함께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세상에서 받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상급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몰입한 사람을 말할 때 ‘그 사람은 지금 그 일에 죽을 듯 살 듯이 매여 있다.’ 하는데 사람들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각오로 그것에 집중하고 이런 죽기까지 인생을 걸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땅에는 없다. 그럼에도 과거 우리 나라의 애국투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 덕택에 우리가 이 문명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에 당연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믿음 속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영원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제물로 주시므로 우리가 죄를 청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영광의 결과물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를 위해 희생해 주신 그 주님께 우리의 모든 가치를 드릴 순서이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엄청난 약속이 있는 것을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죽는 다면 그분의 영광과 부활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언약을 확인해주고 있다. 앞에서는 군사로 소집을 받은 병사로서 운동경기자로서 또 농부로서 우리 신앙의 삶을 비유하였다면 여기서는 그러한 임무를 잘 수행함에 있어서 스스로의 애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이든 영광이든지 함께 감당할 때 주어진 영적인 삶을 감당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Ⅰ. 복음의 중심(8)

짧은 이 한 구절 속에는 우리를 위해 드려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만 할 당연한 이유를 먼저 지적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위대한 신앙적 선포는 언제나 앞의 1:11에서도 증거한 바 있지만 “내가 전한 복음”이나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롬2:16; 16:25) 한 것처럼 자신의 삶에 확인되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분명히 복음처럼 귀한 것은 없지만 그 복음이 그냥 성경속에 있는 복음이나 그 복음으로 어떤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이 오늘 나를 구원하고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내가 그 불변하는 생명의 약속인 복음을 나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확신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증거는 어느 누구의 증거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중심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죽으실 수조차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기꺼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엄청난 사랑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 이 말씀이야 말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고백하는 감격이다.

이 땅에 어떤 죽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가치는 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아무리 귀한 목적을 위해서 죽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사람됨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 주님의 죽으심이야 말로 온전한 무죄의 죽음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다윗의 씨로 죽은 자”라는 것인데 이것은 실제적으로 다윗에게 언약된 내용으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2~13)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확인한 바 있다.

그냥 어느 때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죽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거쳐서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영원한 언약의 후손인 다윗의 씨로 오셔서 죽으신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언약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죄의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를 디모데에게 확인하는 것은 마치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는 선언과 같다.

다른 한가지 동전의 양면 같은 복음의 또 다른 면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4:25에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라고 죽음에서 부활의 귀중한 신앙적 원리를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라는 당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각자의 삶의 새로운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장사되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 이것을 기억하고 환기할 필요가 있다.



Ⅱ.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수 없다(9)

앞에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인했다면 하나님께서 이방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선택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힘으로 이제 복음은 묶임을 받고 더 이상 땅끝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 오늘 두번째 내용이다.

바울 사도가 당하는 일은 언제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뿐이었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당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으로 말미암아였다. 복음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었고 그 복음을 위해서 보내진 바울은 그런 이유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는 한가지 소원뿐이었다. 오늘 같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 각자의 실제적인 고백도 과연 그러한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셨고 바울 역시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결코 어떤 죄 때문도 아니었다. 그러나 독특한 것 하나는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라고 할 때 여기의 죄인은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허물로 죽어야 하는 “죄[ἀμαρτία,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잘못, 실수,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와 같은 낱말이 아니라 “죄인[κακοῦργος, 잘못을 행하는 자, 범죄인, 악인, 악한]이라는 일반 사회법을 어긴 범죄자와 같은 말이 사용된 것이다. 바울이 세상의 윤리적이거나 도덕의 근본이 되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된 내용은 마치 사회를 교란시키는 범죄자라고 고발하였지만 나중에 가이사에게 상소한 후에도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일러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행26:31~32)는 기록에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결국 바울은 복음 때문에 죄인과 같이 매였고 고난을 받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이유 때문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복음은 그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방법이나 도구로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복음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에 갇힌 것 조차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복음전파를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요 능력이었음을 이를 직접 경험한 바울은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으로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역사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간증이다.

어떤 이유나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능력의 차이 때문이다. 복음전파를 방해하려는 것은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의 간교한 저항이지만 인류를 이 복음으로 구원을 이루시려는 계획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감히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은 이 해 아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오히려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방법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을 방해하려던 수많은 인본주의자들이나 복음의 대항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꾀에 빠져 절망으로 가는 것들을 역사 속에 수없이 보여주셨고 그런 저항의 운동이 있을 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욱 힘을 얻고 능력 있게 증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모두 감옥에 갇힌다고 해도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거처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 말씀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련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주신 매일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Ⅲ. 주님과 함께 한 고난은 그분과 함께 영광(10~13)

이렇게 검증되고 막힐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을 받았다면 또 최종적으로 순종하여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면 그러한 복음과 함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동고동락(同苦同樂)하여 살라고 하는 당부를 주고 있다. 생명과 능력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마지막으로는 영광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한 이상 현재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고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 보장되는 영광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10) 이 말씀에는 역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희생이 담겨져 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서도 참고 견디는 이유를 보면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

바울의 신앙인으로서 위대한 것은 언제나 자신이 우선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일꾼이나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여 비록 자신에게 고통이나 불이익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기쁘게 감당하는 자세로 늘 섬겼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 이 v11~13은 초대교회의 세례시의 신앙고백 이거나 찬송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주경학자들이 더러 있다. 내용 자체가 깊은 신앙적인 고백이면서 운율은 음악형태로 되어 있다는 데서 그렇다. 꼭 같은 표현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라는 말씀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는v11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역시 육체에 대하여 믿음으로 영원히 죽었고 지금도 계속 죽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는 바울 사도의 사실적의 삶의 고백이면서 다른 믿음의 사람들 또한 그러해야 함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미쁘다[πιστός, 신뢰할 만한]”라는 말은 1:15; 3:1; 4:9과 바로 앞의 v11에도 하나님께 쓰여진 같은 표현들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분명히 죽기만 한다면 반드시 살게 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12) 앞부분인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12f)는 마치 우리 주님께서 직접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으면[ὑπομένω, 견디다, 참다, 버티다]”이 과거 완료나 미래의 시재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계속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나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럼에도 이 참음은 소망적인 견딤이 되기 때문에 감당해 볼만한 인내가 된다.

또 하나 참고할 것은 그냥 승리하거나 영광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는 표현이다. 우리가 이 육신에 있으면서 자연을 다스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항상 그렇지 못한다. 때로는 요즘처럼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엄청난 재해를 당하기 때문에 감히 왕 노릇 한다고 큰 소리칠 수 없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오신 후에는 자연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라는 예언이 성취될 때는 자연은 온전히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f)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계승해서 이어가는 선지자로 제사장이나 왕으로서 역할 해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삶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뒷부분인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12b)는 말씀은 안타까움을 주는 전혀 반대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친히 하셨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마10:33) 예수님의 수 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주님과 제자들 앞에서 자신은 절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큰 소리 쳤지만 불과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나중 울며 탄식했던 사실은 믿음생활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경우였다.

적어도 베드로는 그때까지 만해도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육신의 혈기나 노력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그런 노력을 영적인 면에서는 가치가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시의 베드로와 다른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의지한다면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했을 때는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b)고 대응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3) 이것은 바울이 지금 우리의 가진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3:4f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라고 비슷한 증거를 한 바 있다. 비록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그리스도인 조차도 변할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미쁘신 분으로 우리 모두가 자신을 맡겨도 결코 손해날 것이 없는 신실한 분이심을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사람과 대조시키고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13f) 이것은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함의 안타까움이었지만 언약의 민족이 그랬다면 우상숭배를 일삼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의 미쁨은 전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일지라도 신실하게 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현이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3b)는 찬양이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시다. 그런 주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신7:9)실 것이라 하셨고 복음 속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일1:9)라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침저녁 변화무쌍한 사람과는 절대로 비교될 수 없는 신실한 분이시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