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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1:13~19 2026-01-11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비록 이 땅에서 거쳐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지만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별된 백성이 된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서론을 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하늘의 백성다운 삶을 살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다음 ~2:10는 주로 개인의 경건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교훈들이다. 교회는 분명 세상에서 불러낸 백성들이지만 이 구별된 공동체 속에서 각 지체들의 경건 역시 전체 무리를 거룩하게 하는 기초임에 틀림없다.

각 개인의 성결이 전체의 공동체를 결정한다고 하는 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 이 교회 속에 들어오고 교회의 지체로서의 삶의 자세가 또한 전체의 질을 만든다는 데서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전체는 또 개개인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데서도 각 지체로서의 경건이 서로에게 성결에 도전을 주는 관계로 가야만 한다.

우리가 거듭난 근본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태어남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면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믿음의 사람들의 성별의 문제는 이런 원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 나타나는 모습들이 육신으로 난 땅의 성품인지 아니면 거듭난 하늘의 성품을 행하며 사는지가 지금 우리의 사람됨의 상태를 가장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듭 난 하늘의 본성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고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영적인 성품으로 변화되고 천로역정의 길을 함께 가는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은 썩지 않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도전 되는 것이다. 평생동안 지속되는 이 영혼의 나그네 로서의 삶을 오늘도 이 말씀은 도전하고 격려하고 있다.



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라(13~15)

여기서도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육신의 사욕이 아니라 죄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는 이유가 먼저 나타나고 과거 세상에서의 죄의 삶이 아니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는 거룩한 나그네 로서의 삶을 도전하고 있다. 뒤의 두절(14~15) 속에는 각각 먼저는 과거 세상의 자세를 본받지 말고 라고 부정적인 당부를 준 다음에 좀더 적극적으로는 거룩한 자가 되라는 권고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앞에 v3~12에 이미 가르쳤던 산 소망을 갖게 된 사실을 전제로 해서 주는 당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라는 연결된 서두로 시작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누리게 된 성도라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그 약속이 완성될 주님의 재림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연결되는 내용의 서론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한 자세의 시작은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이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의 단장이다. 이집트에서 종 되었던 자리를 박차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이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출12:11f)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를 말씀하시면서 주시는 당부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바울 사도는 하늘의 군사 된 성도들의 무장을 당부하면서 이런 표현을 썼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6:14)

항상 움직여야 하는 나그네로서의 삶의 기본 자세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가는 성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으로 온전치 못하다. “근신하여[νήφω, 침착하다, 술취하지 않다, 정신차리고 있다]” 이런 준비된 상태가 되었을 때 소망할 수 있는 은혜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b)라는 기대이다. 나그네의 고달픈 삶을 마치게 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영광은 우리의 기대이상이 될 것이다. 육신의 죄의 욕망이나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영광의 약속을 그 때에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14) 여기서부터 다음절은 과거의 육신의 삶과 새로운 성도의 삶(15)을 비교하여 증거한다. 먼저는 “순종하는 자식처럼”이라는 모범을 제시한다. 바울도 “…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b)하였다. 이 v14은 경계로서 주어지는 표현으로 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7~18)라는 믿음의 사람들로써 옳지 못한 자세를 경계하는 내용을 본받지 말고 라는 권면이다.

“전에 알지 못할 때”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람을 향한 뜻이나 구원의 의지를 알지 못했던 더 직접적으로는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났으면서도 인류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배은망덕을 행하는 유대인들이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민족을 향하여 같은 호소를 증거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3:17) 믿음에 들어오기 이전의 꿈이나 이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물론 이 말은 앞의 순종하는 자식처럼이 아닌 과거의 자기 중심의 삶의 형태에 돌아가서는 안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같은 경계의 표현은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들이기 위해서 본 삼지 말아야 할 경계와 같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라는 경계에서도 나타난다. 성도나 교회는 세상의 어떤 그럴싸한 위인이나 이론이 절대로 모범이 될 수 없다. 오직 본 삼아야 할 대상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여기에 오직은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는 데서 쓰여진 것이고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이란 죄와 절망의 어둠에 있었던 우리를 그 저주의 삶에서 불러내 주신 엄청난 사랑을 기억할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종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신 것도 헤아릴 수 없는 은혜였지만 이 엄청난 은혜를 생각지 못하고 하나님을 순종치 않으므로 잃게 된 이스라엘을 모범으로 두고 말씀하신 것으로 들린다. 이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 상관없이 같은 은혜로 세상 밖으로 불러내 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다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을 나타낸다.

그 대상은 “거룩한[ἅγιος, 구별된, 흠없는] 이처럼”인데 과거 하나님을 모르는 삶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상태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불러내어 구별하신 하나님의 뜻에 모자람이 없어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무언의 명령이다. 성도나 교회는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도 어느 때나 장소 즉, 예배나 경건의 모임에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실에서 구별되어야만 한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구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불러내신 자를 본받아 구별되어야만 할 것이다.



Ⅱ. 거룩함을 지켜가라(16~17)

바로 앞 구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했다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실이 어떠해야 할 것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라면 이 거쳐가야 하는 나그네 인생길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기록되었어 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후에 제사 법전이라고 하는 레위기에서 주로 주신 말씀이다. 제사법전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짐승의 피를 받아 뿌리고 용서를 받는 하나님께서 직접 일러주신 귀중한 사죄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나타나는 곳은 레위기11:44에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기록되고 있는데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먹는 문제 즉, 섭생의 문제에서 불결한 곤충으로 부터라도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었다.

이제는 이 동일한 명령이 과거의 우상숭배와 죄의 어둡고 더러운 상태에서 불러내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한 것이지만 과거 출애굽의 사람들에게는 육신적인 성결이었다면 이제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성결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전인적인 영과 육을 모든 세상의 불결에서 구별될 것을 당부하시는 명령이라 더 무게감이 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잘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그의 자녀된 된 백성이라면 당연히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오늘도 많은 메스미디어나 SNS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행동하고 살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또,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자위하고 위로하며 세상을 본받는 삶을 오히려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은 그런 연예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친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별된 모습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앞에서 세상과 달라야 될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또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신다면 이 거쳐가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17f)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 “외모로 보시지 않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헤롯 당원들과 함께 우리 예수님을 시험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당신은…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마22:16; 막12:14; 눅20:21) 그러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이미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주님을 향하여 이런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시험을 했던 것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17f) 바울은 사회규범을 제시하면서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9b)고 증거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보이고 나타난 것으로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 볼 수 없는 감춰진 이면의 부분까지도 모두 보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고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잘 보일 수 있도록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분을 우리의 아버지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b)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니라 거쳐가는 사람 답게 우리의 행동과 언어 생활을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해야 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여기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당부는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독생자를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그의 아들 삼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는 당부이다. 이러한 정신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당부한 말씀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그들이 신앙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살라는 권면이다.



Ⅲ.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룬 구속(18~19)

여기에서 v~21에서는 앞에서 우리에게 권면한 내용들의 바탕을 밝히는 내용들이지만 역시 분량으로 봐서 다음 시간에 이어서 나누게 될 것이다. 앞에서부터 보는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즉, 말세를 두려워하던 우리가 이제는 그 마지막 때를 오히려 기다리며 사모하게 된 근거나, 삐뚤어지고 어그러지며 거스르는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으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기초를 밝히고 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 믿음의 사람들이면 경건하건 그렇지 못하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의 기초를 말하고 있다. 먼저 시작이 “너희가 알거니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고후8:9f)라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우리를 부요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루신 일들은 적어도 복음을 들은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삶에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믿음의 깊이의 차이가 될 뿐이다.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18f) 이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는 앞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는 당부와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대속함을 받은 것은”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아담으로부터 우리 육신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들은 한결 같이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것들뿐이다. 그것이 비록 육신을 부요하게 하는 재산이었을 지라도 사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없이는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헛된 행실”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우상숭배를 물려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런 모든 죽고 멸망하고 사라지고 말 것들로 부터 값을 치르고 사 주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b) 앞에서 세상의 최고 가치인 금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7f) 이 글이 쓰여졌던 1세기에 노예나 종들은 물론 은이나 금으로 사고 팔 수 있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은이나 금도 당연히 세상의 가치의 귀중성을 의미하는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의 최고의 가치인 은이나 금은 없어질 것들임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으로 사 주신 대가는 이 세상에서 만 가치가 있는 은이나 금이 아니라 영원속에 계시다가 이 역사에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도 이 영원한 대속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고 확인해 주고 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9) 우리의 죄와 저주를 해결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가치를 증거하고 있는데 다음 시간에는 이 귀중한 가치의 역사성을 증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OT에서 사람들의 단 한가지 사죄를 위해 바쳐졌던 동물들 조차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것으로만 드릴 수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일어버린 말라기 시대에는 저는 것이나 병든 허물투성이의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치다가 오히려 책망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6달 먼저 나서 주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b) 앞에서 레위기에 속죄를 위한 제물로서의 양은 흠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한번의 죄를 위해 드려진 속죄의 어린양이기 보다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땅인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피 흘려 그 피를 문의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발라 죽음의 저주가 지나가게 한 유월절 양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바울도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b)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유월절 양은 무엇보다도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출12:5f) 라고 명시되고 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슬픔의 세상에 다시 오셔서 데려 가실 것을 소망하며 바라며 산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 주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날마다 예수를 몰랐던 과거의 삶처럼 자신의 욕망을 벗어 던지고 우리를 구별하신 주님을 본받아 거룩한 훈련을 지속해야만 한다.

나타나는 것 만을 보시지 않고 우리의 드러낼 수 없는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산다면 세상에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들 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세상의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육신의 조상이 물려준 것은 우리의 육신이지만, 영생에 이르도록 죄와 저주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대속해 주셨다면 우리의 노력만으로 갚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사랑의 빚을 말씀과 성령과 또 성도들과 더불어 갚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