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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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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1: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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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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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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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경건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앞의 v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죄에 절망하며 죽음에 바쳐지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속죄 양이 되신 창세전부터 예정되고 계획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과 그의 희생을 힘입어 영원의 소망과 생명의 기대를 갖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의 기초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날 수 있었던 것은 사라지고 없어질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원에 계시다가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다시 영원으로 데려가시려고 무한의 시간과 영광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시간 속에 내려오시고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 되셔서 저주와 죽음과 절망의 원인이 되는 죄를 단번에 해결하신 헌신과 사랑을 사람의 표현으로는 다 감사할 수가 없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한 경건은 당연히 옆으로 지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전달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눌 뒷부분의 내용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물불을 못 가리고 불타오를 수 있지만 그것은 다만 젊은 한때뿐이라면 그것은 꽃같이 피어난 청춘의 아름다움에서 절정에 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사랑도 정으로 바뀌면서 점점 식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은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열정을 넘어서는 세세토록 이어지고 변함이 없는 것은 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 실증으로 오늘 우리의 시간까지 그 사랑은 지속되고 불타올라 우리가 같은 사랑의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풀의 일생에 비교하면서 복음의 영원성과 비교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갖게 된 소망(20~21)
온 인류의 저주의 비극을 바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준비된 사실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이 우주의 전 역사가 다 나타나고 그 바탕을 확실히 지적하고 있다. 시간 적으로는 Α와 Ω인 시작과 끝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류사랑은 창세전에서부터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즉, 창세전에 계획된 것인데 그 효력은 이 역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모든 인류에게 미칠 정도로 우리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된 이나…”(20f) 여기 대칭이 되는 것은 알린 바 된 것과 나타내신 바 되는 것으로 창세전부터 이미 사람이 범죄할 것을 내다보시고 귀중한 인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된 것으로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말세를 예언하시면서도 증거하셨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말씀하셨다. 교회의 신비를 증거하는 바울 사도 역시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1:4~5f)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20b) 보이는 세계는 어쩔 수 없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물질은 반드시 쇠해가기 때문이다. 이제 v24~25오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를 대조시키고 있음을 본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물질을 입지 않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으신 것이다.
말세라고 할 때는 바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부터를 말세로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날 이 땅에 최초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는 OT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바 있고 히브리서1:2f에서도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마지막의 마지막 즉, 末世至末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을 통해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아직도 물질에 메여 있는 구별된 사람들을 완전한 영원의 사람들로 변화시켜 쇠하지 않을 영원한 영광에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우리 현재의 이 몸으로는 구름 속으로 올라갈 수 없다.
이 신비를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1~52) 현재로서는 꿈같이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다음 절이 바로 여기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21f) 우리의 가진 믿음이 확실함을 증거하고 있다. 이 말씀의 구성을 보면 “너희는… 믿는 자니”라는 시작과 끝은 믿음의 사람들을 말하고 이런 우리가 ‘어떻게 믿는가’가 가운데 정리되어 있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셔서 영광을 입히신 하나님을 또 사죄와 의로움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b) 앞에서 말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의 바탕을 하나님께 두게 하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믿는 믿음과 소망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탕이 아니라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Ⅱ.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22~23)
스스로의 경건에서 개인의 성별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도 경건이다. 거듭났다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처럼 뜨겁게 사랑하라 당부한다. 이어지는 v23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좀더 확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시에 이 서신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견디기 힘든 박해로 인하여 세상에 대한 소망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정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약속은 이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며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설명함으로서 격려를 주고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 사람이 거룩할 수 있는 것, 깨끗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오로지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해질 수 있고 이렇게 깨끗케 된 사람이라면 같은 과정을 거쳐서 함께 성별을 받은 형제를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먼저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22f) 우리의 성결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성경에 거론되는 다른 진리(하나님, 말씀 등등)가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5)
이 진리를 순종하여 깨끗해진다고 하는 것은 침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례는 바로 복음에 순종하는 가장 구체적인 자세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은 침례를 통해 거듭남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구원의 실례가 기록되고 있는 사도행전 속에서 예외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22m) 진리에서 나온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척할[ἀνυπόκριτος, = α, ἄν, + ὑπόκρισις] 수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b) 진리를 바탕 하지 않은 사랑은 마음이 아니 라도 가능한 것은 배우처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한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의 가르침을 함께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여기서는 먼저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데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이미 생명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v16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하여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이러한 사랑이 가능해졌노라고 증거하고 v18에서는 이 베드로와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을 가능케 하신 근거가 바로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음을 확인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v18의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육신의 태생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육신에 속한 것은 썩어질 것이기 때문에 영원에 연결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23m) 한 것인데 모든 씨는 곧 생명의 시작이 된다. 비록 이 땅에 썩어질 것들일지라도 살아있는 식물들은 씨로서 번식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사실이다. 또 씨의 신비는 풀이나 나무로는 흙과 단절된 상태에서 생명이 보존될 수 없이 죽고 말지만 씨를 보관한 것을 흙에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은 역시 씨 속에 생명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때 이집트에 7년의 가뭄이 끝나고 최소한 7년 전에 추수해 뒀던 곡식의 씨앗을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다시 농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창47:23b) 모든 나무나 풀들은 긴 가뭄에 타 국고 없었지만 씨들은 그대로 생명을 가지고 있었었 것이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b) 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v25에서 다시 한번 거론된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 밭을 4가지의 토양으로 비유하시고 그 마음 밭에 뿌려진 씨를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8:11; )라고 제자들에게 해설을 시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근원이시지만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처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것들뿐이다. 사실 우리 육신의 이성으로는 살아 있고 항상 있다는 말씀이 이해될 수 없다. 살아 있는 것들도 겨울철에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살아 있는 생명은 이 땅에는 적어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기 때문에 계절에 관계없이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본다.
Ⅲ. 풀과 같은 인생, 영원하신 말씀(24~25)
마지막으로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미약한 육체의 생명과 어느때나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비교하고 있다. 특히,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인 것을 난외주에 나타내고 있다(사40:6~8). 분명 우리의 육체는 매년 죽고 사는 풀과 다르지만 소멸하는 데는 다르지 않은 생명 없는 존재들임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사람을 영원의 생명으로 이끄는 복음의 진리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 나타나는 대조에서도 역시 육체나 풀은 보이는 것인 반면에 복음이나 말씀은 무형적인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비교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24) 왜, 하필이면 같이 꽃이 피는 나무를 비교하지 않고 풀의 꽃인가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럼에도 나무는 수 천년을 살아있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짧은 육체의 생명을 비교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육체의 생명이 한 해 살이 풀과 같이 덧없고 그럼에도 이듬해에는 그 자리에 전년의 씨에 의해서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이 역사 속에 지속적으로 나고 또 죽는 사람의 덧없는 생명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영원을 사모하지만 복음이 아니면 영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땅에는 없다. 이런 끝없는 생에 대한 집념은 권력을 쥔 사람들이 더했다. 중국의 진시왕(秦始皇帝, Qín Shǐ Huáng Dì, B.C. 259~210, 진나라의 제31대 왕 이자 세계 최초의 황제)이 그랬고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그랬다. 그럼에도 별별 수완과 방법을 다 동원했어도 풀과 같은 생명은 흙에 묻히고 썩어 없어지고 말았다. 왜,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었는가 하는 이유를 베드로 사도는 생략하였지만 인용된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 이스라엘에 아라비아사막의 열풍이 불어 꽃과 식물을 말리 우듯이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가 인생의 생명을 소멸하실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아무리 영원을 사모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에 의해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마르고 떨어지는 꽃처럼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육신의 생명인 것이다. 여기에 대비되는 또 하나는 모든 육체와 모든 영광이다. 어떤 육체의 어떤 영광도 반드시 마르고 떨어지는 것에 예외가 없기 때문에 이 땅에 났던 모든 영웅호걸들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같이 흙 속에 썩어지고 만 것이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 앞의 소멸될 수밖에 없는 육체에 대비해서 절대로 소멸되거나 그 가치가 떨어질 수 없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25f) 인용된 이사야40:8b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한 것을 베드로는 ‘하였으니’ 라고 인용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본래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13:31; 눅21:33) 하신 것과 다르지 않은 같은 권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b)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 역사의 시작 때나 약 3천년 전의 이사야 시대나 약 2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 계실 때도 그리고 이 역사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 우리의 시대에도 v23에 본 대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나 권위에서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런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께서 이 땅에 최초로 임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사도행전의 때나 지금이나 어떤 땅에 존재하는 것처럼 능력이 쇠하거나 약해지지 않은 데서 동일하게 오늘도 같은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인 것이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b) 당시 베드로가 로마의 혹독한 박해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증거하던 그 말씀이 오늘 또한 여러분에게 증거하는 꼭 같은 말씀이다. 아니 오히려 그 말씀을 변개시키거나 다른 것을 섞는다면 그 말씀은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오늘 저를 통하여 증거되는 이 메시지가 또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b)는 확신을 가지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어느 시간 어느 곳에서나 그 구원의 능력이 전혀 감소하지 않으며 또 누구를 통해서 증거되든지 빼 버리거나 더하지 않는다면 생명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생명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시고 이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내셨다. 범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생들에게 대속의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의 영광으로 되돌아 가시고 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언약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받아 영혼이 깨끗함을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심으로 살리신 그 큰 사랑으로 같은 은혜를 함께 누리는 형제를 하나님의 주신 그 같은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주신 것이 썩어질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의 차이일 뿐이지만 풀과 같이 마르고 영광은 꽃처럼 떨어져 사라질 것이지만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복음은 창세전부터 이 수천년의 역사가 흐르고 흘렀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다시 오실 때까지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 어느 사람을 통해서 든지 불변하는 꼭 같은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으로 이끄시는 말씀이다. 믿으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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