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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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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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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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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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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김을 받고 거듭나서 땅에서 생을 끝낼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가는 나그네들임을 증거해왔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단순히 새로운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신 목적을 따라 신앙이 점점 자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요구나 기대에 미치도록 성장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의 문제는 성숙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적인 중보의 역할은 감당하지 못하고 여전히 유치한 어린아이로 머무르는 것이 문제이다.
신앙에 장성한 사람들을 만들지 못하고 직분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여전히 젖이나 먹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의 모습이다. 보이는 대로는 노령인구가 많아져서 부양할 문제를 정책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린아이도 부양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교회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을 부양하는 보육시설과 다름이 없다. 그런 모습들을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는데 조금 거친 음식은 소화를 하지 못하고 탈이 나는 것들을 보면 성장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결국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가 구성원들이 줄어들고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는 깊이 자성해야 할 우리들의 영적 과제이다.
물론 이런 안타까움은 1세기의 교회에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처음 탄생한 교회들이었기 때문에 은혜를 충만이 부어 주셨지만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바울의 모습을 본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교회가 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머무는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이다. 앞에서 보는 데로 고린도 교회처럼 그 구성원들이 성장을 거부하는 교회 구성원들의 문제이거나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처럼 어려움을 겪어오는 상황에서 환경을 마음에 두어 주로 위로나 소망만을 전달하는 말씀으로 계속 어린아이로 키워온 지도자들에게 있을 수도 있다. 원인이 어느 쪽에 있든지 반드시 신앙은 경건으로 자라야 하고 그래야 하나님과 세상을 중보 하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공제선상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적으로는 지위나 재산에서 성공을 한 듯 보이지만 그들의 살아온 모습은 전혀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에는 아니, 불신자들보다 더 간교하고 간악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중보역할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못 오해하게 하는 모습들이 바로 어린아이에 머무르는 신앙한다고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고린도 교회의 비록 유치함은 있었지만 1세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경건한 사역을 감당한 바울 사도는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인사말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빌4:22)는 문안을 보통의 문안이 아니다. 복음에 있어서 당시에는 철옹성 같은 가이사(Caesar) 즉, 로마 황제의 집안에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집안은 부나 권력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부족을 느끼지 못할 사람들이 빌립보 간수처럼(행16:31)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어떤 힘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을 비롯한 당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스러운 역할로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의 내용과 다음 시간에 나눠서 다루게 되는 말씀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성장의 목표치를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오늘 v5의 내용과 다음 시간의 v9의 말씀의 중심이지만 오늘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하였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시제의 차이나 단수와 복수의 차이를 보게 된다. 물론 여기의 제사장이란 OT의 의례적으로 제사장의 후손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대로 제사장이 되는 그런 제사장은 아니다. 그 부분에 가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오늘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제사장이다. 오늘은 두 제목으로 말씀을 다루고 결론을 맺는 것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Ⅰ. 신앙에 장성하라(1~3)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의 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충분히 자라야만 한다. OT의 율법 시대의 제사장들도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지 않았다(30~50세 민4:3, 23, 30, 35, 39, 43, 47). 장성한 제사장으로 자라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과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장성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 1. 그리스도인이며 제사장으로서 버려야 할 것들을 거론한다. 베드로 사도는 앞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 25)고 우리가 거듭난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이런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복음에 의해서 거듭 났다면 그러한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믿음의 장성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론적으로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 믿음의 사람들이 진작에 던져버렸어야 할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고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하고 믿음은 자라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당부가 아니라 바울 사도 역시 같은 당부를 수없이 주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위로부터 거듭 난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8) 야고보 역시 바람직한 경건을 제시하는 가운데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약1:21f) 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 믿음의 사람들로 입에 올리기에 그다지 행복한 표현들이 아니고 꼭, 원어를 짚어서 설명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낱말들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런 부정적인 단어들 앞에 “모든”이라는 말이 앞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것들의 모양이나 종류를 예외 없이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앞에서 거론한데로 오늘 유명인사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나 가지고 있어야 할 이러한 삶의 도구들을 버리지 못한 데서 수치를 당하고 있고 이것이 세상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까지 가지고 간다면 수치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저주에 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만 한다.
①‘모든 악독[惡毒, 마음이 흉악하고 독살스러움.]’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함으로 인간관계에 독을 끼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인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려는 중보의 역할을 해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런 것의 반대행위가 되는 것이다. ②‘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를 버리라 했는데 기만이라고 하는 것은 미끼로 유인한다는 의미로 속임을 의미하여 다음 절에 나오는 ‘순전하고’와는 반대의 의미이다.
외식은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으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말이며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은 방해하는 행위로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을 의미한다. ③‘모든 비방하는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해 악의에 찬 중상모략으로 악담을 하는 언어생활이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빛의 백성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의 하수인들의 행동방식이다.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당부와 같은 권면이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 2.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모해야 할 것들을 말하고 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당부했다면 반드시 가져야 할 천국 백성들의 하늘을 향한 자세를 이르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기쁘게 먹고 잘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젖이다. 과거에는 모유로 아이들을 키웠고 모유에 문제가 있을 때만 분유나 우유나 그것도 불가능하면 미음으로 키웠었다. 이것이 사실 하나님의 만드신 육아양육방법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그것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말이 별로 행복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순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f) 사실 성장을 주제로 다루면서 여전히 젖을 다루는 것도 조금은 부조화로 보이지만 어린아이 단계를 건강하게 거쳐야 바른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 당부를 듣고 있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오늘 우리들이 감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갓난[ἀρτιγέννητος, 방금 낳은, 갓난, ἄρτι, 방금, 금방 + γεννητός 난, 된]” 아직 눈도 보이지 않고 사물을 분별할 수 없는 유아가 사랑하는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어머니의 젖뿐일 것은 모두가 아는 이치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난 사람이 오직 사모하며 바래야 할 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어떤 것도 섞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요즘은 과거처럼 유지방이나 단백질이 부족할 때와는 다르게 우유를 먹어도 저지방우유를 선호하고 있지만 갓난 아이의 어머니의 젖은 건강에 필요한 모든 것이 면역체계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다. 어떤 것도 첨가하거나 빼 버릴 것은 없다. 주신 그대로가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대한 이유를 하반절에 말하고 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b) 이런 자세가 지속될 때 마지막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나라에 데리고 가시려고 다시 오실 때까지 또,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모자람이 없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갓난 아기들 같이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요 이러한 말씀의 사모는 어느 순간이 아니라 우리 생명이 다하도록 또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모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여기에 그 이유를 다시 확인한다. 갓난 아기가 젖을 처음에는 찾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머니의 젖을 맛보았다면 그것을 사모할 것이다. 실제로 모유수유를 하다가 분유를 먹이면 나중에 배가 고파지면 어쩔 수 없이 먹지만 처음에는 거부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생명의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보았다면 그것을 꾸준히 사모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모하지 못한다면 마침내는 맛을 잊어버리고 마치 분유에 익숙해진 어린 아이가 모든 것에 익숙해져서 구별하지 않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은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인자하심[χρηστός, 온화한, 유쾌한, 친절한, 선한]”을 맛보았다면 그것을 지속적으로 사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 데는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고백하고 있다. 시편에는 이런 표현이 많지만 대표적인 한 곳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하였고 다윗은 그 가치를 칭찬하면서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감격이 가능한 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생명의 말씀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Ⅱ.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4~5)
과거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속량하신 후에 그들에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b) 하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다만 백성으로만, 아들로만 부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때까지 자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먼저는 앞의 1장 말미에서도 증거한 바 있지만 우리가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그런 다음에 우리를 구별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4) 이것은 우리를 제사장 삼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 근거에도 2가지로 대칭이 되고 있다. ‘버린 바가 되었으나’와 “택하심을 입은”이라는 거절과 선택을 받은 분이 바로 신령한 젖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하려 하셨다. 그럼에도 어느 때든지 어둠과 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려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버렸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4f) 선택하신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에게 조차도 버림을 당하신 주님은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11:51) 탄식하신 바 있다. 오늘 그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또한 세상이 버린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기뻐하셨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4b)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거듭난 것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19)고 확인한 바 있다.
“보배로운[ἔντιμος, 영예로운, 귀중한, 존경받는, 소중한, 가치 있는]” 온 갓 귀중한 의미를 다 담고 있는 낱말이다. “산 돌이신 예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m)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돌이나 반석으로 묘사는 하는 표현은 NT에도 흔하다. 몇 군데만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21:42; 시118:22) “신령한 반석”(고전10:4)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벧전2:8) 등과 같이 어떤 환경이나 시간 속에서도 불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께 나아가”했는데 불변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 지속적으로 나아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속적으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수를 마신 것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계속해서 자랄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 이제는 신령한 젖을 지속적으로 사모하여 성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한다. 여기서는 같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두 가지의 다른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신령한 집으로”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5f) 앞 절(4b)의 “예수께 나아가”에 연결하여 산돌이신 예수께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자가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인이다.
먼저 신령한 집이라고 할 때는 교회 공동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고 세워져 간다고 하는 데서 바울 사도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할 때는 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섬김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이 세우는 직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져 가기 때문에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5m)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확인이다. 아무리 사람이 복음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지라도 주님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4:11, 16; 골3:17)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b) 이것은 세상의 모든 제사와 구별되는 예배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우리는 하늘의 백성들로서 당연히 내어 버려야 할 것들을 아직도 못 버리고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믿음의 사람들이 사모해야 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어떤 것도 섞지 않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온 갓 선하심을 다 맛보았다면 이제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죄악 된 세상은 자기 땅에 오신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를 버렸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항상 택하심을 받으셔서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신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항상 나아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공동체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별된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데까지 성숙해야 할 것이다. 이 당부에 부끄러움이 없는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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