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벧전2:6~10 2026-02-01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 하는 제사장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심을 앞에서 나누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완벽하게 마련하셨으므로 이제 이러한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 각자의 의지로 옮겨졌다. 또, 앞에서는 미래형이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과 정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부딪쳐서 깨어지고 넘어지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결과도 사랑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있을 수 있음을 오늘의 내용 속에서도 읽게 된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중심은 왜,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모자라기 이를 데 없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는가 하는 이유도 말씀하고 계시다. 마지막에는 좀더 근본적인 이방인이었던 우리의 삶의 변화를 증거하고 있다.

중세의 종교개혁가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제들 만이 제사장인 것처럼 성사를 행할 수 있는 영적 권한이 신부들에게만 있다고 하는 마치 OT의 레위 가문의 성격 같은 제사장의 구별을 모든 믿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질 수 있다는 소위 말하는 만인 제사장 설의 근거로 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이제는 가톨릭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사역자들의 권위를 절대화한 것처럼 목사의 성례권을 철저하게 주장하고 있는 데서 자신들의 선배들의 애써 찾아준 권리를 다시 무익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의 모형이 되는 NT의 교회를 통한 하나님을 섬김에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라는 바울의 증거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데 차이가 없다. 물론 고전3:11b에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바탕일 뿐이다. 모든 계시가 완성되고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차별 없이 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복음의 완성속에서는 섬김의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권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결론은 없다.



Ⅰ. 제사장의 기초(6)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v4b에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했고 다시 v5b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는 당부가 있었던 것처럼 반석이요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도 이 불변하는 생명의 반석에 하나가 되는 원리를 연이어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먼저는 하나님의 귀중한 언약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님의 구원 언약은 절대로 즉흥적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신 인류 구원의 성취를 역사 속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고 확인해 오신 하나님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는 말씀이다. 이 인용된 말씀이 바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물론 바울 사도도 이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이 v6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은 당연히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재림하여 다시 오신다고 할지라도 당황하는 일이 없는 구원의 약속을 먼저 증거하고, 다음 두 구절(7~8)에서는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당할 안타까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꼭 같은 한 분의 하나님의 아들이 그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결과를 맞게 됨을 경계하고 있다.

“내가 택한” 여기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귀중한 언약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미 앞에서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했고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9f)라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계보에 함께 서게 된 믿음의 후예들을 증거하고 있다.

“보배로운 모퉁잇돌”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하였듯이 집을 짓는데 있어서 기촛돌이나 모퉁이 돌이 기초가 되기 때문에 귀중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기둥을 세우는 방식의 집이든(주춧돌) 그냥 돌이나 흙으로 벽을 쌓아 올리는 집이든 이 돌 위에 세워지고 쌓아지기 때문에 귀중한 집의 머릿돌이 되는 것이다.

앞의 v5f에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이루어 감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두는 장소도 “시온에 두노니” 함으로써 언약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와 더불어 말씀하신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는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확증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다.

바울 사도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한 것이나 이어지는 v10~11의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와 거기에 대응해야 하는 순종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다.



Ⅱ.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걸려 넘어지는 돌(7~8)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존재이유를 새롭게 하고 죄의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여 최후의 심판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는 이 귀중한 모퉁이 돌이요 주추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이어 증거하고 있다. 요긴하고 귀중한 것들도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이 역사 속에 오신 그들이 너무나 사모하고 기다렸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생명이 죽음이 되고 치료약이 오히려 독이 되는 사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유대인들의 거절에서 보게 된다. 물론 바울 사도는 이것이 이미 창세전에 정하신 이방인을 접붙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11:25b)는 말씀과 함께 로마서 9~11장에서 이 논리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7) 베드로 사도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를 선언한 바 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 이 말씀은 시118:22~23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것이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함께 인용된 사8:14~15에도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후에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에 결례를 행하러 올라 갔을 때 “시므온이 …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라는 예언에서도 증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앞의 v6에 이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보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제대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요즘 가치가 엄청나게 뛰어오른 황금에 비길 수 없는 가치가 되시는 것을 앞에서도 나눈 바 있는데 이생과 영원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진정으로 보배인가?

여기에 ‘믿는 너희에게는’ 말과 정 반대로 대조되는 표현이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받드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치를 발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아무 가치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분이시다. 마치 주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 회당에 가셨을 때와 같은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조차 감춰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과 함께 나고 자랐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사실 때문에 가지신 영적 지식조차도 의심하고 불신하여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6:5) 다니시는 곳곳마다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이셨지만 유독 자라신 고향사람들이 믿지 못해서 같은 능력의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f)라는 두려운 경계를 본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믿음의 대상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것은 그 주신 하나님께 배은망덕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는 당연히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8f)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우리 주님을 향해 침례자 요한이 초창기에는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요1:29) 증거하던 믿음을 팽개치고 제자 둘을 보내서 묻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눅7:19)라는 불신을 들으신 후에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 하심으로써 자신이 실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심도 증거하신 바 있다.

이미 OT에서부터 메시야 이신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으므로 실족하게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8b) 했지만 베드로는 미문이라는 성전문에서 나면부터 걸어본 일이 없는 지체 장애자를 일으켜 걷게 하는 능력을 나타냈지만 이 일조차 불신하고 비방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3:17)고 좋은 말로 격려해보지만-

오히려 더 완악하게 베드로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꾼들을 때리고 가두면서 예루살렘의 복음 확산을 막아보려고 불의한 짓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것 보다는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려는 인간적인 수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역사로 인하여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이미 불신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그의 후손으로 보내실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관건으로 그를 ‘믿느냐’ ‘불신하느냐’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도 차별이 없는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인용된 사8:14 본문에서도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라고 북쪽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이스라엘이든지 남쪽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유다이든지 불신의 대상에는 차이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생명과 영광으로 모퉁이 돌로 디디게 되지만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저주의 돌이 되고 마는 것이다.



Ⅲ. 제사장으로 세우신 이유(9~10)

불신하는 사람들에게는 형벌일 수밖에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다시 거론하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왜, 이방인이요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상숭배 하던 우리에게 긍휼을 입히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는가 하는 이유와 이 일이 결코 우리 사람에게서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셨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오늘의 말씀은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9f) 앞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지만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다시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앞의 내용과 반대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러나” 혹은 ‘그렇지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신분적인 변화를 4가지 정도로 거론하고 있다.

①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사43:19f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시고 20b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시는데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장막절 마지막날 외치셨던 말씀과 같이 들린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f~38) 장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자신의 구속을 통해서 죽음의 사람들이 믿게 되어 생명수를 마시게 될 것을 증거하시는 말씀이다.

②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OT의 율법시대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 각각 따로였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창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기록에서 보는데 멜기세덱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음을 히브리서(7장)가 증거하고 있는 내용들을 더러 본다. 그럼에도 멜기세덱에게서는 선지자 적인 소양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거듭 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얻게 되는 사실은 바울도 증거하는 내용들이다.

다만 격이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를 힘입는 제사장으로서 가치에 있어 서나 신분에 있어서는 결코 못하지 않는 엄청난 위치[히2:11b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를 가지는 것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한 제사장을 감당하는 데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의 사역자들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래의 내용과 비교할 때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왕 같은 제사장들인 것이다.

③거룩한 나라요, 과거에 이집트를 탈출시키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6f)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도 전제는 있었는데 바로 앞의 v5m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실천하지 못하여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로 새언약이 주어지게 된다(렘31:31~33).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들과 구별된 거룩한 나라여야만 하고 우리를 나라로 삼으신 하나님께는 여전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말씀이 조건이 되고 있다. 이 지상에서도 어떤 나라의 백성이냐 하는 것은 공항 출국장에서조차 대우가 다른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법이 아닌 완전한 사랑과 공의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데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④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앞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인용한 바 있지만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는 기록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지도자가 이끄는 백성인가 하는 것도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한 요소이다. 역사 속에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 받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 왜, 인가? 이스라엘의 그 소유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면에서는 두려움도 있지만 영원까지 우리의 안위를 지키신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b) 이제는 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여기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라는 말씀이나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10f)라는 말씀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빛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캄캄한 죄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음을 확인하신다. 나머지 v10b도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이런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빛의 백성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의 신분의 변화에 당연히 감격하고 자랑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b)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예를 갈릴 바다 거라사인의 땅에 군대 귀신이 들렸다가 주님께서 낫게 하신 사람에게서 본다. 귀신들렸다 치료된 이 사람은 막5:18b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주님께서는 v19에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셨고 이 사람은 이러한 주님의 당부에 철저하게 순종함을 v20에서 보게 된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우리가 이 사람보다 낳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도 이 사람 처럼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