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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2:11~17 2026-02-08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지난 ~v10는 개인의 신앙 생활에 대한 권면과 신앙의 성장을 당부해 온 베드로는 여기서 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관계의 삶에 있어서 어떻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비교적 여러 분야에서 교훈 해 주고 있다. 같은 신앙이나 이념을 함께 나누는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그래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전혀 이념이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함께 살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귀중한 과제가 된다.

먼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이치를 말하면서(11~12)도 이 v12이 삶의 중심을 가져야 하는 기초이다. 다음에 우리가 속한 국가의 권세에 대해 어떤 자세(13~17)를 취해야 하며, 당시에는 종으로서의 처신이었겠지 만 오늘 우리 시대에는 직장 윤리(18~25)를 생각할 수 있고, 좀더 가까이는 부부관계와 같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올바른 지표를 제시해(3:1~7) 주고 있다 물론 이런 주제들은 바울 사도도 같은 신앙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는 것들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신앙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자세는 육신적으로는 분명히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우리가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육신을 입고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처럼 자신의 위신을 위해서나 불이익을 감수할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잘 못 이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봐오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 내가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도 다르지 않다는 데서 다시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는 이유들이다.

언제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사랑의 역사들이 바르게 전달되기 원한다면 더이상 우리 자신이 존재해서는 안되고 나는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 베드로 사도가 격려해온 믿음의 성장이 제대로 된 것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믿음의 성장이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계속 어떤 불신이나 부정적인 일들에 부딪히면서도 지속적으로 성장을 계속 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순간에는 100%의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시간이나 조건속에서 든지 변함없이 주님을 의식하므로 믿음을 키우고 이렇게 지적되는 당부들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가르침들은 자칫 도덕이나 윤리 강연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영적인 삶의 바탕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이유이고 또, 주님의 명령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각 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세로 가능할 것이다.



Ⅰ. 불신자들 가운데서 선하게 행하라(11~12)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모든 사람들과 꼭 같이 거쳐가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 세상은 아닐지라도 나의 나 됨이 나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갖게 하신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나가고 나면 나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남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위한 선한 싸움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 베드로 사도는 바울과 비교하면 그렇게 길지 않은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4:12; 벧후3:1, 8, 14, 15, 17) 이것은 바울 역시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f) 하였고 야고보 역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약1:16, 19, 2:5)라는 표현들을 본다. 1세기에 사회적으로는 보호받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확신과 함께 서로 간에도 격려를 위한 칭호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11f) 그리스도인의 참된 본향은 하늘에 있음을 표현하기를 바울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f)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좀더 사실적으로 믿음 사람들을 표현하기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라고 베드로 사도와 꼭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필요한 기간만 거주하는 것이 허락된 비자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요 지나가는 나그네는 그 임시 거주지에서는 어떤 보장이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거처 가는 사람들의 행동이 의외로 사람들에게는 더 두드러지게 남을 수 있다. ‘그 사람 여기 머무는 동안 그랬었지!’ 라고 말하곤 한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b) 우리가 비록 믿음으로 살면서도 육신의 정욕으로 인한 제제를 많이 당하며 신앙하는 것이 사실이고 바울도 이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런 이유에서 평생의 믿음생활에서 싸우는 싸움은 사실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 삶에 영육의 싸움을 여러 곳에서 거론하는데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5:17f) 라고 하여 영과 육이 서로 대적하는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하는 것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딤전6:12) 이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육체의 정욕”은 그야말로 육신의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먹는 음식조차도 육신의 원하는 것으로만 먹는다면 육신의 건강을 망치게 되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교훈이다.

여기 “제어하라[ἀπέχω, 멀리하다, 억제(자제)하다, 떨어져 있다]”는 낱말이 대부분 멀리하라로 번역되고 있다.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멀리하는 것이 가능한 좋은 방법이지만 육신에 담겨 사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멀리하는 것 조차도 쉬운 방법은 아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도 영육의 삶에서 갈등하던 바울 사도의 권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말의 순서나 낱말의 배열은 다르지만 마치 마5:16의 산상보훈의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다만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12f) 한 것인데 중요한 것은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이방인 중에서 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선한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에서 착한 행실로 사는 것이 어렵다. 죄를 죄로 모르는 저들은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 때문에 자신들의 부끄러운 것들이 들어 나는 것으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 자체가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b) 1세기의 불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대부분 매도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네로 황제처럼 로마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운 것처럼 대부분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리의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자신들의 생각이 옳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다면 오시는 날에 즉, 주님의 재림의 날에 깨닫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비극이 될 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행실을 자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가능하게 될 것이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버리신 주님께 욕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Ⅱ. 육신이 속한 제도에 순종하라(13~15)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육신을 벗고 그곳에 돌아가야 할 때까지 이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동안 이 육신의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국가 제도에서 바른 처신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또 하나의 귀중한 과제이다. 특히 이 서신이 쓰여지고 있을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적인 박해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런 당부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박해 아래서 열심당원 같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국가에 반항해 왔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견디는 것이 힘들어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을 상황에서 이러한 당부는 후일을 기약하지 못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 역시 귀중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을 듣는다. 롬13:1~7의 내용인데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b)는 전제아래 그런 권세를 불복하는 것은 정하신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2m)라고까지 말하고 그런 이유에서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당부를 하고 그들이 매기는 세금도 반드시 부담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물론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권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오른 가에는 이론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베드로나 바울 모두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14) 라거나 바울 사도도 v4에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고 같은 원리를 함께 말하고 있다. 권력이란 이렇게 賞善罰惡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라는 것이다. 사실 정치(政 정사, 칠, 治 다스릴)는 한문자로 볼 때도 법이나 규칙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라는 사전적인 이해를 봐도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13) 여기서는 권력에 왜,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앞에서 권력이 하나님께 정하신 것이라 하였지만 그 보다는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 賞善罰惡을 행하지 못하는 권력에 순종할 수 없다는 우리 기준 보다는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주를 위하여 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무죄한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이나 빌라도 앞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19:11f) 자신의 당하시는 일이 사악한 사람들의 의향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총독에게 하라”(14) 하나님께서 권력을 맡기신 이유를 앞에서도 생각했었다. 사실 정치가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탄의 악행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이해이다. 역사 속에 과연 이런 정치가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런 권력의 위임에도 사람이 사악하기 때문에 어느 때, 어디서나 바른 정치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폭정에도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던 것도 보아 오는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는 무능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15) 원문에서는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되어 있다. 문제는 여기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인데 v12의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 즉 진리에 대해서나 복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진리와 복음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그런 반응에도 바른 대가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것이고 바울 역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복종할 것을 당부하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권력 아래에서도 바른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Ⅲ. 가진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라(16~17)

여기 기록되고 있는 자유는 원문의 문장 구조 상 앞의 “선행으로”에 연결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스스로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그런 이유에서 반드시 주신 분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이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게 되면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되어 심한 경우에는 죄를 가리는 도구로 진리를 남용하는 일까지 신앙 속에 더러 나타나고 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 바울의 당부와 다르지 않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16f)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b~32) 본래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 원리에서는 이방인들인 우리도 다르지 않다. 사실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고 온 갓 미신과 헛된 것들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경험해본 사람들 만이 누리는, 북한과 같은 독제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는 또 다른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16m) 분명히 1세기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베드로 사도가 이런 당부를 주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쓰이는 “악[κακίας]”은 v12의 오해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행한다”고 할 때나 v14의 “악행 하는 자” 모두와 어근이 같다. 지난 말씀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는 바울 사도를 통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또,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여기 ‘죄를 지으리요’라는 말을 ‘악을 행하리요’라는 말로 바꿔서 읽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b) 믿음의 사람들이 자유를 바르게 사용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모든 것을 행하라!” 다른 말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을 의시하여 행하라는 당부의 교훈이다. 사람들의 종 즉, 정지나 이념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이기적인 자신의 종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잊지 않는다면 주어진 자유 조차도 바르게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사용하든지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17) 여기서는 이제까지의 결론적인 권면이다. 4가지의 자세를 대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①“뭇 사람을 공경하며” 이것은 명령형으로 쓰여 사뭇 강조적이다. 사람이라는 피조물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라면 그 대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당연히 공경해야만 할 대상으로 거기에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으로서 인격을 존중하지 말아야 할 존재는 없다. ②“형제를 사랑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특별한 관계로서의 형제애로 영원한 세계에까지 지속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3:8, 4:8).

③“하나님을 두려워하며” ④“왕을 존대하라” 이 두 권면도 지속성을 가지는 형태의 시제를 가지고 있는 명령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는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세상의 절대권력인 왕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왕은 하나님께서 권력을 위임해 준 자이기 때문에 뭇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 대상에 들 뿐이다. 앞의 “뭇 사람을 공경하며”나 “왕을 존대하라”할 때 여기 공경이나 존대는 꼭 같은 낱말[τιμάω]이 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은 공경의 대상으로 그리스도안의 형제 된 지체들에게는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께는 공경을 하나님의 다스림의 권력을 위임받은 땅에서의 권력자의 주문에도 존대하여 순종해야 할 것을 사람이 아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러냄은 받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이 임시 거류지요 나그네로 거쳐가는 곳이지만 항상 영혼을 거슬러 대항하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 행실을 선하게 가짐으로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

우리가 비록 임시적으로 거쳐가는 이 세상이지만 우리가 거쳐 하는 나라의 제도를 주님을 위해 순종하고 선한 사람들을 포상하여 독려하고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는 이 땅의 법에도 잘 순종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비방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들에 얽매어 살지만 그런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 하는 우리는 가진 자유를 하나님을 섬기는 자 답게 오직 복음을 전하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공경하고 함께 형제 된 지체들을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권력자들에게도 공경하는 겸손의 삶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