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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2:18~25 2026-02-15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신앙의 사람들의 사회에서의 관계를 믿음으로 행할 것을 권면해온 베드로는 이제 이러한 과제를 좀더 좁혀서 집안으로 가져온다. 먼저는 가정의 일을 총괄하여 일하는 사환들에게 권면하고 다음 장에서는 좀더 가까운 부부간에서의 신앙적 관계에까지 접근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세기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당시에는 자유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거느린 종들이 그들의 4배 정도였었고 이들은 주로 채무자이거나 전쟁에 잡혀온 포로들로 OT의 표현과 같이 주인의 가축이나 다름이 없는 재산의 일부로 대하는 일이 많아서 인격적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주종의 관계이기 보다는 한 인격체로 대우를 받았고 온전히 거듭나지 못하고 이런 복음적인 내용을 육신의 삶의 유익으로만 생각했던 종들의 문제가 교회밖으로 오해를 일으키는 일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 전반의 이런 문제들 때문에 복음의 완성 후에 주종의 관계를 믿음으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한 권고도 NT에서 더러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본다(엡6:5~9; 골3:22~4:1; 딤전6:1~2; 딛2:9~10). 그럼에도 대부분 바울에 의해서 당부 되어 지고 있는 이런 내용 들에서는 종과 주인 상호 간에 올바른 신앙적 자세를 권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주인에게 주는 권면은 없고 다만 받들어 섬기는 사환에게 주는 당부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좀 다르다.

주로 종들에 의해서 나타난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 대로 주님 안에는 종이나 주인이 구별이 없다는 것만 것 강조하여 함께 신앙하는 주인에게 불순종하는 종들이 있었던 것 같고 이런 자세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당시 로마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주인들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누리는 종이나 사환들에게 신앙안에서의 평등이 무질서를 만드는 불순종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로서의 주인일지라도 스스로의 고난을 믿음으로 참고 섬기는 것이 복음을 나타내는 데도 더 호소력이 있음을 권면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과거에 직장생활 할 때 제 자신에게도 대단한 격려와 위로가 되었던 말씀이다. 3가지 제목으로 생각하고 마지막 v25을 결론으로 생각 한다.



Ⅰ. 부당한 대우에 까지도(18~19)

베드로 사도는 그냥 사회제도의 말단에서 재산의 일부로 취급당했던 당시의 종들보다는 그들을 이끌면서 주인의 집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환들에게 바울의 표현으로 초등교사[갈3:24~25 παιδαγωγός, 관리인, 안내자]와 같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섬기고 받들어야 하는 주인이 다행히도 그리스도인 이거나 도덕이나 윤리규범이 분명한 사람이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비록 그렇지 못한 대상일지라도 순종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이 집안 관계속에서의 첫번째 내용이다.

“사환들아…!”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의 종[δοῦλος, 노예, 종- δέω 묶다. 엡6:5-7; 골3:22-25; 딤전 6:1; 딛2:9]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이 부리는 사람들의 다수였지만 NT에 단 4번 쓰인 “사환[οἰκέτης, 눅16:13; 행10:17; 롬14:4, 집의 것, 하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그가 범사에 종들을 주인의 일에 복종시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18f) 이러한 당부는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행해야 할 자세를 그대로 당부하는 표현이다. 모든 일이나 시간 속에서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주인에게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더해지고 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b)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을 섬기고 산다면 별로 마음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지만 여기 “까다로운 자[σκολιός, 굽은, 구부러진, 비뚤어진, 부정직한]”란 마음이 뒤틀린, 삐뚤어진 사람을 표현하는 것으로 쉽지 않은 대상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 시대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나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주인이나 상사가 선하고 관용하는 착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라면 어려움이 없겠지만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못 된 상사를 모시고 일한다면 분명히 편치 못하고 행복하지도 못할 것이지만 그런 사람에게 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세로 대한다면 비록 섬기는 상사는 기쁨을 주지 못하고 힘겨운 대상이 되겠지만 믿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주인이나 상사가 보상할 수 없는 것에도 갚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 여기는 어려움을 한가지 더 포함하면서 그런 상황과 처지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든 대우가 바로 부당하게 당하는 어려움이다. 자신이 잘 못한 것이 있어서 거기에 문책을 받는다면 기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잘 못한 것도 없는 문제로 갑질을 당하면 그것은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 세상말로 억울해서 못 견디겠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것 까지도 수용하라고 당부하신다.

그 방법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19m)이다. 사회 체제에서 부하이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복종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러한 일을 견디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입장에 우리가 있든지 그 상황을 빠짐없이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상황도 아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라고 그 부당한 대우조차도 하나님께 넘겨드린다면 오히려 부당하게 대우한 그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는 아름다우나”(19b)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사실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며 칭찬받을 일이다. 비록 주인은 부당하게 대해 놓고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성된 백성이 부당하게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거기에 대한 보상을 준비하실 것이다. “네가 그런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도 나를 생각함으로 참고 견디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칭찬하실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20~21)

믿음의 백성들이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다시 한번 그러한 행동이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러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격려하고 있다. 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이라면 이미 이런 모범을 친히 보여 주신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당연함을 증거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0f) 앞 절의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 라는 반대입장을 지적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잘못이나 부족함으로 문책을 당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칭찬이 아니라 잘못을 책망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 이런 입장에서는 자책도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20m) 앞의 말씀이 부끄러움이었다면 다시 믿음의 자세의 아름다움을 반복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뒤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런 자세를 격려함을 본다. 4:13에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고 다시 v16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 두 구절 속에서도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했다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증거하면서 땅에서의 기쁨과 하나님께 영광됨을 동시적으로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0b)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19),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삶이 된다면 세상에서도 바람직하고 복음전파에 기여하겠지만 사람 앞에서 보다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여 세상에서조차 안타까움이 되는 일이 더 많다. 사실 이런 삶이 되기 위해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21f)라고 확인한다. 좀 더 적극적인 권면이다. 이렇게 살 때는 때로 오해를 받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행한다면 결국에 가서는 이런 오해 조차도 밝히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21f)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초청을 받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다스리시고 간섭하셔서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조차 기쁘게 감당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같은 권면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여기에 분명한 모범을 제시하시는 내용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21m)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만큼이나 불합리한 고난은 역사 속에 없었다. 선택받았다는 자기 땅에 오셨음에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가 어쩌면 출발이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분의 죽음의 원인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 때문에 바로 죄인 된 너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당시의 불법의 사형언도에도 결코 대항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인류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의 철저한 불법이나 빌라도의 불의 한 선고에도 오로지 선으로 대응하심으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즉, 우리가 있다. 그런 이유에서 결과는 영광이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본이 되신 것이다. 빌립보서2:5~8이 불의 앞에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라면 그 결과가 v9~11로 만고의 오고 또는 역사의 모범이 되신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b)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할 뿐만 아니라 역시 오고 오는 역사 속에 믿음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모범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남은 자취는 그분이 죽음에서도 불신자들조차도 찬양하게 하는 모범이셨다. 그의 사형을 집행하던 불신자였던 로마의 백 부장 조차도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b),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b) 그럼으로 우리가 불의한 세력 앞에서도 믿음으로 바로 대항할 수만 있다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일꾼)이었도다” 라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아름다운 자취를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b)는 모범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우리 이후의 그리스도인들, 그것이 우리 자녀일지라도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남긴 자취가 그리스도의 보다 선명한 교훈으로 후대에 남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부당한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선을 행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은 믿음으로 신앙하는…



Ⅲ. 우리 믿음의 모범(22~24)

여기에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의 원리로 이해한다면 어쩌면 이것은 바보스러운 모습이지만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늘의 가치와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죄로 만신창이가 된 세상에서 이런 삶의 논리는 절대로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이치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실천하신 아름다운 모범이셨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이러한 자세가 결코 낯설어서는 안될 모습이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22)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사53:9f)라는 말씀의 인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가 없으심을 밝힘으로써 그분이야 말로 애매이 고난당하신 자의 본이 되심을 증거한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22f) 우리 주님의 무죄는 당시의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당시 빌라도는 어떤 명목이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덮어 씌울 죄목을 찾으려 했지만 요한복음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선포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이 선포가 진실됨을 보이기 위해서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고까지 주님의 무죄를 증명했다. 우리는 허물투성이지만, 우리 주님은 이런 순결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 주님의 사죄를 입은 우리도 죄를 남겨서는 안된다.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22b) 로마시대의 노예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죄가 바로 거짓이고 불평이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는 거짓과 욕이 일상이 되어 있다. 또 사람이 가장 쉽게 범하는 죄도 입술로 범할 수 있는 죄다. 이런 이유에서 야고보는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10)고 저주나 거짓이 찬송하는 사람들에게 합당치 않음을 당부하였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23f) 앞에서 “…그 입에 거짓도 없으”(22b)실뿐 아니라 애매히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도 옆의 강도를 비록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오직하신 말씀은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f) 안타까워하셨다.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23m) 우리는 작은 권력의 사람과 알고 지낸다는 것 만으로도 큰소리 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자신을 욕하고 조롱하는 하찮은 사람들의 저주하는 것을 들으시면서도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예언된 대로 잠잠히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심을 본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23b) 죄 없이 가장 극형을 받으시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의탁하심을 보이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처럼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오늘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백성이라면 역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가장 사실을 깊이 아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고 처분대로 결과를 기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처럼 좀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24f) 여기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으로써 그리고 그 제물 되심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를 위해 친히 저주를 받으신 주님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지신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역사는 역시 메시야 예언구인 사53:12의 말씀에서 본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m) 그 십자가의 희생의 효력을 증거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사망의 죄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살고 의롭다 하는 선언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거듭난 자라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라는 의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의식에 의해서 우리의 새로운 삶을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b) 이 말씀 역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는 예언의 확증이다.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메시야 예언구인 이사야53장을 오늘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Ⅵ. 결론(2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말씀의 적용으로 ‘각기 제 길로 갔던’ 과거의 범죄 상태와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사죄의 은총을 누리는 현재를 대조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v25의 “전에는”과 “이제는”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결과로서도 “잃었더니”와 “돌아왔느니라”는 대조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b) 양과 같이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의 목자는 바로 우리를 죽음과 저주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자[ποιμήν]”와 “감독[ἐπίσκοπος]”은 같은 대상을 일컫는 단어들이다. 우리의 삶을 친히 이끄시고 보살피시는 이중적 역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누린다.

우리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선언하는데 이런 선언이 말에 있지 않고 삶에 나타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긍심과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믿음과 영광을 드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