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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3:1~7 2026-02-22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인류의 시작이 부부인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규모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성경의 전체는 모두 가정으로 정의된다. 기초적인 부부로서의 가정이 시작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으로 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한 교회도 그리고 천국도 역시 다르지 않은 가정의 체계로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행17:26f) 최종적으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찾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거절하는 탕자들은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도 있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간격이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바울 역시 이 가정의 거룩성과 그 안에서 서로의 역할 그리고 서로의 자세를 거론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사랑은 식어지고 가정들이 깨어져가지만 이런 성경적 부부와 가족관계를 지켜간다면 오늘과 같은 가정들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특히 오늘의 내용에서는 아내들에게 순종하는 행동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코 아내라는 위치가 남편보다 못해서 이거나 열등한 입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만들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서 있게 된 기능의 차이 때문이다.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어쩌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도 한 것을 볼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b)

이렇게 질서를 말한 다음에는 여자들의 꾸밈과 치장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이것 역시 바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시대의 외모 지상주의 적인 영향들이 신앙에까지 들어와서 영원에 관련된 영적인 부분은 꾸미지 못하고 보이는 것들에 만 치중하는 것들도 경계하는 교훈이다. 이런 아내들의 영적인 단장에 대해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까지도 순종의 모범으로 제시함을 본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자세도 거론하고 있는데 어떤 자세로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그렇지 못하면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기도에까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남편으로서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Ⅰ. 말보다 행동하는 믿음(1~2)

이 서신이 기록된 당시의 로마 사회는 타락하여 기존 질서가 바로 서 있지 못한 사회였다. 여자들을 천시 여기는 불평등이 있는가 하면 귀부인들은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생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인 타락이 가정들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철학적인 이론이 무성한 상황에서는 말이나 이론은 많았지만 호소력을 갖지 못했던 것 같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의 가르침이라는 데 무개가 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f) 이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붙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와 같이”라는 말은 2:13의 ‘인간의 모든 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바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억울한 입장일지라도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사환들과 같이’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아무에게나 순종이 아니라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제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질서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ἀνήκω, 적합하다, 타당하다, 알맞은]”(골3:18)고 당부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이유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나이든 여자들로 젊은 여인들에게 가르칠 것을 당부하면서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4~5)는 이유를 덧붙인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1m) 함께 믿는 가운데 만나고 결혼을 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은 없겠지만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 한 쪽만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에는 자신이 행복한 만큼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3~14)는 바울의 실제적인 당부도 본다.

여기 중요한 것은 불신의 남편일지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한 것인데 우리의 말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말은 청산유수처럼 하면서도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말이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1b)라는 것을 보면 귀에 들리는 말보다는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역시 호소력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말씀을 확인하는 것이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2) 이것이 호소력을 갖는 삶의 모습이다. 앞의 v1과 여기 반복되는 표현하나는 바로 “행실[ἀναστροφή, 생활 방식, 행동, 처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행실이 나오는데 비록 믿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아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행동을 조심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정결한[ἁγνός, 순결한, 거룩한, 구별된 ← ἅγιος]” 행실로 당시에 많은 부녀들은 많은 우상숭배의 종교의식에 참여하면서도 비 도덕적이고 남편을 순종치 않은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을 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게 되고 복음에 순종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여성들이 말이 많다고 하지만 조용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아내의 모습은 같은 신앙의 남편이든지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남편에게도 호소력 있는 전도가 될 것이다.



Ⅱ. 썩지 아니할 아름다움(3~4)

남자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자들의 특성은 사실 생긴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눈에 예뻐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이고 그러다 보니 자신을 꾸미고 싶어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베드로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도 비용을 많이 들여 겉 보양을 꾸미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성이 있고 그런 것을 나타내는 것이 어쩌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시대는 화장법이 발달하여 거의 얼굴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부분은 수술을 해서라도 고칠 수 있고 이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주로 연예인들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말씀은 솔로몬과 바울의 가르침이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믿음 없이 이 말씀을 듣고 있다면 ‘또, 고리타분한 말만 하고 있네!’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참으로 귀중한 삶의 이치이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3) 그리스도인으로 옳지 않은 치장을 먼저 거론하고 있다. 바울도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딤전2:9)라고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베드로나 바울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도임에도 신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가르침이 같다고 하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복음의 이치를 가지는 사람들의 관점은 사람이 아니라 역시 사람의 마음과 눈을 주장하시는 마음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이치가 되기 때문에 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3) 이러한 표현은 비용을 많이 들여 머리를 꾸미고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고급 의상을 걸치는 것을 삼가 할 것을 권하는 의미다. 왜, 이래야 하느냐 하면 사람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b) 우리를 우리 되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먼저 의식한다면 우리의 삶이 구별되고 많이 자유로워질 것으로 확신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4f) “오직”은 앞의 v3과 대조되는 것으로 앞에서는 “말고”라는 부정적인 당부를 줬다면 여기서는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한다. 물론 이러한 메시지가 우리의 귀에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은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삶의 부분부분을 항상 말씀의 가르침에 비춰봐야 한다는 데서 반드시 살펴야 할 교훈이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7:22)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우리의 내면의 사람이며,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6b)라는 것처럼 항상 키워야 할 영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b)함으로써 낡아져 가는 겉 사람과 새로워져 가는 속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 역시 외모만 꾸미는 것보다는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10) 당부를 듣는데 여기에 단순히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하였지만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골로새서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설명을 본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썩지 아니할 것” 이것이 육신처럼 썩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까지 남을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4b) 분명히 당시에는 겉모양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좋은 옷을 입고 비싼 귀금속을 차는 액세서리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하겠지만 그것은 사라지고 없어질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치 있어 보이는 이런 자기 치장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 이 땅의 나그네들로 영원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임을 추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속한 사람이라면 겉모양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워하실 가치로 단장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다.



Ⅲ.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여인들의 모범(5~6)

이제는 겉사람을 꾸미려 하는 것보다 속 사람 즉, 숨은 사람으로 단장했던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을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로 열국의 어머니라고 이름을 바꾼 사라가 모델로 거론된다. 이렇게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던 여인들은 주변의 변화에나 상황의 변화에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어떤 위기에서도 놀라지 않는 하나님의 딸들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여인들이었음을 칭찬하고 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5f) 여기에 벌써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그 삶의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독특한 것은 모델로 거론하는 사람은 사라 한 사람뿐인데 거룩한 부녀들로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내였던 사라 역시 같은 기대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고 족장들의 후예들인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야곱과 그의 아내들 역시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살았던 것을 증거함으로써 OT의 모든 믿음으로 순종하는 여인들이 그렇게 살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라질 땅에서의 기대가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았던 모든 여인들이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성품으로 살았다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5b) 사라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것이었다. 여기 “단장하다[κοσμέω, 꾸미다. ← κόσμος, 질서, 꾸밈, 장식, 세계(세상)]”라는 말이 영어의 화장품(Cosmetic)의 어원이다. 사라는 인간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부탁이 합당하지 않은 것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는데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창20:13)는 그랄왕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어쩌면 그러한 철저한 순종이 사라의 가장 아름다운 매력이었다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6f) 당시에 남편을 주인(창18:12)이라고 칭하는 것이 관습이었을지라도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받들어 섬기는 모범을 그녀의 후손들인 믿음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으로 아내 된 여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는 증언이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만드신 위계질서를 순종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모범이다.

여기 제시할 수 있는 여인 하나가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이야 말로 만고에 남편에게 순종의 여인이었다. 그녀보다 나이가 적은 브닌나가 아들을 낳는 것 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의 마음을 휘저어 놓지만 그러한 서러움 속에도 한나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그 설움을 온전히 하나님께 기도로 하소연할 뿐, 남편인 엘가나에게 불만을 토하거나 원망함을 볼 수 없고 결국 그러한 한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 인정되면서 들으심이라는 이름의 사무엘과 뒤이어 5이나 되는 자식을 낳음으로 브닌나의 조롱에서 해방됨을 볼 수 있었던 실제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6b) 여기에 선이란 세상의 착한 일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한나를 예로 들었듯이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나 자극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의 조상인 사라의 딸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믿음을 지키고 그것들에서 떠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잠3:25) 격려함을 듣는 것과 같다.



Ⅳ. 남편 된 자들에게(7)

하나님은 절대로 어느 한편에만 일방적으로 명령을 주지 않으신다. 지금까지는 아내들에게 믿음으로 단장할 것을 권했다면 이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7f)라고 당부한다.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여 순종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라는 의미로 이와 같이 로 시작한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일체를 이루게 하신 질서를 따라 아내와 모든 삶을 나눌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OT에서는 이미 일부일처 제도가 무너져 있지만 복음 속에서는 이것이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의 자격에 있어서 꼭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3:2, 12; 딛1:6)로 한정하고 있다.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7m) 남편이 가져야 할 아내에 대한 지식들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연약한 그릇” 분명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남성보다 유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남편을 순종하고 내조하며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고전7:2~5) 육신의 관계만이 아니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귀히 여기라는 당부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철학적인 이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여자에 대한 평가이다. 남편과 동등하게 영생에 함께 들어갈 귀한 존재로 대우하라는 당부이다. 이런 입장에서 더 연약한 그릇이지만 함께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릴 자이기 때문에 “귀히 여기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당부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신앙에 치명적인 손해를 겪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b) 지식을 따르지 않은 아내 대우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영적인 호흡인 기도가 힘들게 됨을 경계하고 있다.



이 서신이 쓰여지던 시대는 사회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인종차별이 심했던 때이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서 아내들에게 남편을 순종할 것을 당부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렇다. 남편이 비록 아직 불신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럴싸한 말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아내의 행실을 봄으로 함께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젊음도 한 때이고 유행도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내면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숨은 사람을 하나님의 교훈으로 단장하여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갖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단장이며 이것은 썩지 않는 화장법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구별된 부녀들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을 단장하여 어떤 위기나 두려움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움이나 놀라지 않는 삶을 살았고 오늘도 그녀들을 본받는다면 같은 아름다움을 갖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순종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심과 같이 주님의 진리로 여성을 이해하고 함께 살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육신에서 끝나는 동거가 아니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영적인 호흡인 기도가 막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