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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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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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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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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복을 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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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바로 앞장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b) 권면하고 다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9f)라고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지위와 역할을 확인해 준 바 있다. 이 부분에서는 어쩌면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서 자세를 다시 확인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함께 동료 된 그리스도인의 관계 속에서 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까지도 도전해 주고 있다. 바로 이어지는 3:13~4:19에서는 제사장 된 우리가 당할 수 있는 고난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세를 여러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왜, 그런 가 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삶에서 끝날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최종적으로 마련하신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5b)는 영원한 영광의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이 세상에서부터 가져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이 많고 이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어둠 속이나 감춰진 세계 까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백성 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변화된 하늘의 시온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비록 제한된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불합리한 세상일지라도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꼭 같이 의식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을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하나님의 복주시는 얼굴을 의식하는 삶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을 불순종하고 죄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공의로 진노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는 꼭 같은 한 분 하나님의 눈이나 얼굴이 전혀 다른 두려움이나 진노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도 역시 사람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속성이다.
Ⅰ. 하며, 하며, 말고(8~9)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의 개인의 경건과 사회생활을 바르게 감당할 것을 권면해온 베드로 사도는 이제 이 서신을 쓰는 가장 중심적인 내용에 이르고 있다. 앞의 서론에서도 거론했던 것처럼 당시의 지속되는 박해 속에서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믿음 생활을 격려하고 시련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을 의식하며 믿음을 튼튼히 세울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이 편지가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서신의 목적이며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저주할 수 없는 축복의 사람들이라는 데서 저주를 당할지라도 오히려 욕으로 되갚지 않고 축복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의로우신 우리 주님께 죄를 씌워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온 갓 조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이 오늘부터 주어지는 말씀의 모범이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앞에서 말한 개인의 경건과 믿는 사람의 사회생활에 대한 결론일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말의 긴밀성을 의미하는 표현일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고후13:11f)라는 표현과 비슷한 이해를 갖게 한다. 마치 세상을 하직하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불러 놓고 주는 유언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간절함과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그 유언 같은 내용이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6가지와 2가지의 부정적으로 하지 말라는 행동들이다.
“… 너희가 다…” 이것들은 사실 믿음의 사람들의 일반적이어야 하고 사실적이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두고 이르는 자세들이다. 또 여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될 수 없는 예외일 수 없는 표현이 바로 “너희가 다” 한 것이다. 직분을 가진 자들은 이러해야 하고 직분을 갖지 않는 사람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의 대상들을 두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고 거듭나 형제와 자매가 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이래야 할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다” 이러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8) 여기에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타내야 할 삶의 5가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같이하여는 뒤에 거론되는 4가지가 가능한 이유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①마음을 같이하여, 이것은 믿음 안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모임이든지 성패를 좌우하는 일반적인 자세이다. 사도행전 속의 교회의 유무상통이 가능했던 이유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②동정하며, 과거의 성경에서는 “체휼”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던 표현이다. 함께 고통을 나눠 가진다는 표현이다. 믿음의 사람들 간에는 천국과 기쁨만이 나의 것이 아니라 고통도 너의 것일 뿐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초라함과 불쌍함과 부끄러움을 동정하시는 모습으로 쓰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한글) 그런 다음 우리가 그러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히10:34f)라는 모습으로 도전한다.
③형제를 사랑하며[φιλάδελφος, φίλος, 가장 사랑하는, 존경하는 + ἀδελφός, 형제], 물론 이것은 자매들을 제외한 형제들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에 차이가 없는 형제애를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교제를 다루는 로마서 12장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라고 격려하고 칭찬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나가 형제들을 향하여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4:9) 칭찬하고 있다.
④불쌍히 여기며[εὔσπλαγχνος, εὖ, 잘 좋은, + σπλάγχνον, 내부, 내장, (감정의 자리인) 심장, 마음, 사랑], 이 표현은 우리가 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낱말이다. 튼튼한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야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고 불쌍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에 ‘내 코가 석자다.’라는 표현처럼 자신에게 여유가 없으면 남의 괴로운 입장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장기(臟器)의 건강함을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살아 계신 믿음으로 중심이 잡혀 어려운 처지의 다른 지체들을 볼 때도 주님처럼 긍휼이 여기는 자세로 이것이 변화된 삶의 실제적인 모습일 것이다.
⑤겸손하며,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ταπεινός, 낮은, 지위가 낮은, 신분이 천한, + φρήν, 마음, 정신, 생각] 빌립보서2:6~9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극치에서 보는데 신앙이 바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스승이요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위해 겸손해지신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삶의 자세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러셨는데…”
요한복음13장에서 스승이시면서도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모습 속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겸손을 본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 스스로 높아지려고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초라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9) 여기에서는 2번의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지만 다시 축복하는 자가 되라는 긍정적인 자세를 당부하면서 이것을 위해 우리를 주님의 백성삼아 주신 것을 확인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9f)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셨던 직접적인 당부이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여기에 그러나 하신 것은 오늘 본문의 도리어 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같은 이치를 주님으로부터 배운 바울 역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9m)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의 별명은 바로 복을 빌 수 있는 축복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귀한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바보스러운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은혜로 사죄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불신의 사람들과 이 자연에게 복을 끼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귀한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를 복을 비는 축복의 사람으로 부르셨음을 믿는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복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을 저주하고 정죄하는 것은 제사장의 직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신령한 복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들이다. 믿는가? 그러므로 내가 복을 받기 위해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에 그 복을 나누는 것이고 모두가 저주하는 어두움의 세력과 더불어 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축복할 수 있는 자체가 복이고 이런 축복의 행위는 내가 축복함으로 확인된 데서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9)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Ⅱ.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10~11)
여기에서부터 ~v12는 시편34:12~16의 자유스러운 인용이다. 다윗이 자신의 생명이 위태한 가운데 지은 시라고 하는 데서 의미가 있고 앞에서 말한 저주보다는 축복해야 할 제사장으로 서의 삶의 이유를 증거하는 가르침의 바탕이다. OT의 다윗의 시에서는 이 땅에서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베드로는 이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까지 확대하고 있음을 본다. 영생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벌써 현실의 삶에서부터 차이를 가짐을 보는 것이다. 영생을 확보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 땅의 순간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세계를 가진 것에 대한 여유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대의 확신을 사실적으로 가지는 사람들과 막연한 기대와 바램을 가지는 것으로 단지 소망뿐인 안타까운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생명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것은 생명자체가 죄와는 관련이 없는 거룩과 무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고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다.
생명을 가지신 분이 우리에게 바로 이렇게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럴 수 있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8b) 이런 우리 주님의 엄청난 배려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고집을 부리고 이를 외면한다면 또 다른 방법은 없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10) 그럼에도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야고보는 이 부분에 대하여 사람으로 불가능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조금 더 진행하여 v6에서는 이미 참소하는(계12:10 밤낮 참소하던 자) 죄에 사로잡힌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비관적인 사실이다. 사람 스스로 자신으로서는 이미 성품에 배어 있는 언어 습관을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에서 진실보다는 쉽게 거짓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1) 이것은 좀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악에서 떠나[ἐκκλίνω, 벗어나다, 떠나다, 외면하다, 돌아서다]” 죄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의를 행할 용기조차도 쉽지 않기 때문에 대담하게 그곳에서 떠나야 하고 과거의 삶에서 돌아서야 하는 입장에서 회개라는 말과 어울리는 자세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되어야 한다.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삶이 가능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주셨고 교회는 세상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여기 “구하며, 따르라”는 당부는 열심으로 그리고 힘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선한 의지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을 힘입어 그 자신을 죽이려는 절망의 자리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물론 그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는 것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서 이런 위기에 빠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죽음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구해 주셨고 그런 경험을 자신의 시로 대대에 이 역사 속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Ⅲ. 주의 눈, 얼굴(12)
여기에서는 마치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묘사하여 의인화하고 있다. 주의 눈, 귀, 얼굴을 거론하는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들으시고 향하시는 얼굴은 양면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묘사를 같이 하고 있는 내용을 모세의 고백 속에서 함께 볼 수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앞의 내용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축복을 위해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한 바 있지만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복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원하시는 대상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신비를 증거하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6:13)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공의의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대상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오히려 진노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됨도 역시 신비인 것이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는 이 하나님께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6:15~16 )는 무서움으로 뵙게 되어 그 얼굴을 대하는 자세가 오직 두려움으로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본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더 쉽게 비유를 한다고 하면 꼭 같은 자식들이 한 아들은 좋은 일을 하고 칭찬을 기대하며 집에 돌아오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과 잘못을 저지른 후에 회초리 맞을 것을 생각하며 집에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아버지가 다른 분이 아님에도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서 꼭 같이 아버지를 기다리면서도 칭찬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아들과 매맞을 것을 인하여 두려움으로 아버지를 기다리는 자식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가 온전치 못한 것은 이것이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완전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사랑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하늘의 백성이라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는 자세로 저주를 당하면서도 복을 비는 사람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남아야 한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혀를 저주하는 일 보다는 찬송하고 축복하는데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매진하는 삶을 위해 달음박질해야 할 것이다.
사랑과 긍휼이 무한하시고 주님을 순종하려는 사람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며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얼굴을 들어 평강 주시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만 의식하도록 복받은 자들로서의 삶을 지속하여 두려움 대신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임마누엘로 즐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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