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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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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3: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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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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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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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핍박과 말세의 신앙에 힘겨워하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결론적인 권면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건전치 못한 이단세력을 이기도록 신비한 생명과 경건에 속한 신앙의 성장을 격려하는 1:3~의 격려를 반복하는 듯하다. 어쩌면 오늘 마지막 절인 v18은 1:5~7을 다시 당부하는 것 같은 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기정 사실인데 그 복음의 절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된 성결의 삶을 지속적으로 당부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러한 신앙적 논리를 증거한 베드로는 자신 못지 않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한 바울의 증거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경계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 것은 이 주님의 재림을 증거하는 일들이 우리 사람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더러 있고 理性的으로나 感性的으로 옳지 못한 신앙의 자세로 이런 부분을 이해하려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억지로 풀다가 오히려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경계까지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를 미리 알았다면 영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된 데 미혹되지 말 것도 경계하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처럼 가장 심각한 이단으로 가는 부류들이 다루는 문제가 자의적인 종말론의 해석인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때에도 보고 깨닫는 바이다.
여기서도 강조되는 신앙적 자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 다르게 말하면 바른 복음의 이해에서 신앙을 키워갈 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언제나 신앙을 사람 중심, 자연 중심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복음은 훼손되고 구원을 잃게 만드는 이단들의 가르침이나 권면을 어느 때나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지금과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x
Ⅰ.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게 하시려고 믿음을 주시고 역사와 공간과 시간 속에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신 최종의 영광이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간곡한 당부를 주고 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당부는 바로 이 역사의 마지막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러 하시듯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사람들 역시 여기에까지 순종과 믿음을 지키면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14f) 바로 앞구절에까지 복음의 완성으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온전한 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기대하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임을 결론적으로 시작하는 표현이 먼저 “그러므로” 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들은 물론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데서 입에 붙은 말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προσδοκάω, 기다리다, 찾다, 기대하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며 찾는가! 여기에 “너희가”는 당연히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것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셔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을 한가지 밖에 없어야 한다. 바로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그럼에도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전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사라지고 없어질 이 땅의 것들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들이 더 많으니 믿음생활이 바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므로 성별 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과거처럼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제 세상을 떠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음의 사람들이면 예외가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는 성도라면 그냥 시간만을 흘리면서 소모하는 사람들이 아님을 권면하는 내용이 이어지는 말씀이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b) 언제나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자세는 “주 앞에서” 즉, 주님을 의식하는 삶이지만 여기에 쓰여진 “주 앞에서”는 단순히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만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이 땅에 다시 나타나실 주님 앞을 미래적으로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금 오늘의 삶의 현장 속에서 주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이다. 우리는 흔히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은 없다.’ 라든가 ‘점이나 흠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쉽게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사람은 흰 눈 같이 양털같이 정결하게 씻김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다시 주님 앞에 이를 때까지 이를 지켜가는 것이다. OT의 제사에도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레22:20) 하셨다. 이러한 덕목은 교회 속의 지도자들에게도 요구됨을 보게 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딛1:7) 베드로 사도는 이미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하여 주님의 순결함을 증거하였고 그를 따르는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도 같은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려면 그 영광의 처소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단속해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인 것이다.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사도는 이 베드로후서는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축복한 바 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방황하는 갈등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하나의 목표에 매진할 때 혼란없는 평강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Ⅱ.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15~16)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움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 없었던 일이며 육신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경건치 못한 종교를 빙자한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쉬운 것처럼 자신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사람들을 속인다. 이런 이유에서 이단자들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신비와 은혜의 역사인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었다.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요16:17)
이런 신령한 과제인만큼 전체적인 성경과 복음의 계시에 무지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부분들을 억지로 해석하려 다가 오히려 멸망으로 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바르게 이해함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을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으로 가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15f) 앞의 v4~5에서는 조롱하는 자들은 주님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비웃고 조롱하였지만 v8에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하면서 이 말씀을 적용하면 구원을 위해 참으시고 천 년이 하루 같이 기다려 주신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기다리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결국 멸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15b) 사실 바울 서신에서는 베드로를 칭찬하거나 천거한 일이 없다. 오히려 갈2:11에서는 안디옥에서 소신 없는 행동으로 인하여 베드로를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했다는 기록을 본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바울과 자신의 신앙이 다르지 않음을 증거하면서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지혜대로 쓴 것이라고 증거한다. 좀더 깊은 영성이 필요한 주님의 재림을 말하면서 이런 깊은 신앙적 부분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복음의 동역자임을 증거하는데 그의 배려를 본다.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는 말은 이 베드로의 서신들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바울의 서신들도 이미 받아 읽은 사실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물론 바울도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갈2:9)라 고백한 바 있다. 게바 즉,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증거하였다. 특히 “사랑하는 형제”라 했지만 “사랑받는 형제”는 바울 사도의 즐겨 쓰는 표현이었다(엡6:21; 골4:7, 9; 몬1:16).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16)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기록한 사실들을 말하면서 이런 글 역시 신앙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나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이나 다른 성경의 바탕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장이나 유익을 위해서 억지로 해석하다가 진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으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16f) 이것은 물론 바울이 쓴 서신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앞에서 이미 바울을 분명히 거론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관하여는 이 세상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관한 말세 적인 교훈에 대하여 가르친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16m)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나 예배에 관한 교훈이 아니라 말세에 나타날 일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일 수 있고 이것이 바른 진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나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더 큰 문제는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16b) 한 것인데 베드로 사도는 이미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경계를 준 바 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1:20) 성경은 신비의 책이요 생명의 책이지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주님의 뜻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음을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시험하던 마귀가 성경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하는 것에서도 보는 내용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울이 쓴 서신들을 OT의 책들과 함께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이것은 앞에서 벧후1:20을 인용했지만 다시 v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는 사람으로부터 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가르치고, 바울도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 증거한 바 있다. “억지로 풀다[στρεβλόω, 뒤틀다, 왜곡하다, 곡해하다]”는 뜻인데 성경은 다른 이 세상 사람들이 쓴 글들과 달리 더욱 악용하는데 더 쉬운 책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유는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늘로부터 명령되어지고 주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는 성경의 악용은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Ⅲ.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다면(17~18)
마지막으로 주는 당부로 지금까지 말한 권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 미리 안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갖지 못한 그릇된 교사들의 유혹에 떨어질 것을 경계할 것과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욱 깊은 영적 지식에서 성장해 갈 것을 당부한다. 오직 영광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 만 돌려 드릴 것도 당부하고 있다. 이러한 마지막 당부가 중요한 것은 에덴에서부터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려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17f) 베드로 사도의 사랑의 고백은 계속된다. 이렇게 “사랑하는 자들아!”를 반복하는 것은 이 서신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귀하며 사랑하는 가를 확인시켜서 저들로 하여금 절대로 어려움을 겪게 하려고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임을 확신케 하여 더욱 호소력 있는 당부를 주고자 하는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으로 호소한다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앞에서도 우리는 미리 안다고 하는 것이 분명 특권임을 말한 바 있다. 미리 안 자들에게는 특권만이 아니라 책임도 주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있게 될 재앙이라면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들도 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OT에서는 이를 파수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6) 사실 우리는 이 멸망당할 역사의 파수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좀더 진지한 이야기가 다시 v8에 이어지는데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33:8) 우리 옆에서 죄인됨을 일깨워 주지 않으므로 악인이 죽는다면 그 피를 우리에게서 찾겠다는 우리 사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17b) 지금까지 경계해 온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떨어져 바른 믿음에서 미끄러질까를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무법한 자들”이란 당연히 법을 갖지 못한 사람들 즉, 건전한 복음적 진리를 가지지 못한 왜곡된 신앙의 논리로 믿음의 사람들을 어지럽히는 일련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앙의 성패는 건전한 복음적 진리를 갖고 있는가 그렇지 못 한가에서 판가름 난다. 그렇지 못하다면 역시 “무법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추김에 따르는 사람들까지 멸망으로 이끄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18f) 믿음의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은혜와 지식의 출처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혜”라는 선물도 신령한 지식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다. 앞에 “오직”을 붙인 것도 다른 경로나 출처가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물론 뒤에 나타나는 하나님께 영광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려드리도록 하셨다. 이미 벧전4:11b에서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이라는 같은 가르침을 주신 바 있다.
이것은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같은 가르침을 준 바 있다. 여기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한마디는 “자라 가라[αὐξάνω의 현재 능동형인 αὐξάνετε가 쓰였다.]” 이 시제가 의미하는 바는 은혜나 지식은 지속적으로 믿음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은혜와 지식을 지속적으로 누림으로 믿음이 장성하여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는데까지 성장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끝나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까지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은 ‘이만(그만)하면 되었다.’는 자만이나 칭찬은 있을 수 없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b)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지만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사탄의 부추김으로 오히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자신보다 못한 존재에게는 불가능하고 자신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한 존재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땅에서 있게 되는 스포츠에서부터 모든 탁월한 기술이나 예술에 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땅에서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그 영광스러운 존재가 생을 마감하는 데까지뿐이다.
그럼에도 시간으로 계산될 수 없고, 이루신 구원이 사람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이신 하나님께는 지금까지 하신 일에도 영광이 합당하지만 앞으로 영원속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 왜 그러냐 하면 영원에서 순간으로 떨어진 사람을 다시 영원으로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랑의 역사가 없으셨다면 사람은 영원이 있음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운명을 바꾸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지금도 영원까지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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