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례자 요한은 자신의 입장이나 형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역사 속에 나타내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려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향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었음을 사도 요한이 잘 기록하고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1:31) 세례자 요한은 사막화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을 향하여 회개를 외쳤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였음에도 나와 요한에게 침례를 요청했고 그의 역할은 대성황을 이루고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의 주 임무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지난 메시지의 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7~8)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그분을 나타내는 것이 세례 요한의 주 임무였다.
이런 선언이 있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요단강에 오셨고 요한이 종노릇 할 수밖에 없다는 그 분이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위로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인정하셨고 이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음에도 광야로 이끌리셔서 다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기고서야 진정한 복음의 수행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잡혀 감옥에 갇혔지만 드디어 복음을 선포하심을 본다. 물론 이러게 진행되는 과정의 내용들도 각 복음서마다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상호 보완적이어서 오히려 우리 주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
Ⅰ. 하나님의 인정(9~11)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오심을 수없이 선지자들로부터 들었지만 그 메시아가 당할 수난이나 고통을 마음에 두지 못했고 오로지 언약의 민족 이스라엘을 영원한 영광으로 다스릴 것 만을 알았던 것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3년간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도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절대로 고난은 피하고 영광만 누리는 것이어서 ‘꽃 길만 걸어라!’고 격려한다. 함에도 성경이 말씀하는 꽃의 영광은 짧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에 꽃 길만 생각한다면 그만큼 짧고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주님의 탄생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는 칙령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자 말자 헤롯의 간계로 이집트로 도망을 해야 했다. 헤롯이 죽자 다시 돌아오지만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시로 나사렛에 가셔서 자라시는데 그것도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마2:23)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주님의 행보 하나하나가 자신의 하고 싶은 것은 한가지도 행한 것이 없이 오로지 예언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9) 30여세의 나이까지 육신의 부모를 받들어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요단강에 나타나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던 바로 그때 사시던 나사렛으로부터 오셨다고 기록을 하는데 이 기록도 마가 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이 부분을 그냥 갈릴리로부터(마3:13)라고만 쓰고 있다. 단일 민족의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유대인들은 갈릴리는 물론 나사렛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침략을 받으면서 지금 우리 나라와 같이 다문화 인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소개할 때 “나사렛 예수라”하자 첫마디가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5b~46f) 할 정도였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한결 같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b)는 고정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반대하고 핍박했었다. 그럼에도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는 이렇게 유대의 지형까지도 세밀하게 기록하여 우리 주님 사역의 움직이심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9b) 세례자 요한은 앞에서도 이미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b) 하였던 것처럼 자신이 받들어 섬겨야 될 거룩한 분이 자신에게 침례를 요청할 때 순순히 응하지 않은 것들도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레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침례는 분명 회개가 전제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삶이 거룩하지 못했던 죄인이 받는 것이라는 데서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고 또 세례를 베푼다고 해도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태도에서 거절하였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반응이 요한을 감동시켰던 것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5) 어떤 것이든지 순종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모든 의를 충족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렇게 되지 못하는 데서 교회들에 문제가 생기고 그리스도인 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 우리 주님의 자세를 본받는 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은 구원될 것이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성경의 이 장면을 미리 읽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침례 후에도 이런 하늘의 반응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후의 하늘의 반응이 우리의 모두에게 이렇지는 않다. 또 이와 같은 반응이 없다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나타나는 모든 반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장면은 주변의 모든 사람이나 침례를 베푼 요한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b)라는 마가의 기록에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께서 보신 장면임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일어난 역사들은 영적인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모습들이었다. “하늘이 갈라짐과” 이 장면 자체가 우리 사람들이 표현하기에는 쉽지 않은 모습으로 대부분의 이런 장면을 묘사하는 기록에서는 “열리다[ἀνοίγω, 겔1:1; 마3:116; 요1:51; 행7:56]”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마가 만이 “갈라지다[σχίζω, 찢다, 요21:11]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사64:1) 한 이사야를 통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복음서에 한결같이 사용된 “찢어지다[σχίζω, 마27:51; 15:38; 눅23:45]”라는 표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구속을 완성하시고 운명하시면서 나타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표현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역사에서도 죄로 닫혀 있던 하늘이 찢기고 드디어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류가 소통을 시작하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b) 이단자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이었는데 세례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령이 부어져서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0)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하지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함으로써 역시 다르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만 “비둘기 같이”라는 묘사도 “마치 불의 혀처럼…”(행2:3ff)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비둘기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이 비둘기의 내려오는 것처럼 강대상 뒤의 의자들에 문양을 세기는 것도 지나친 것일 뿐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1; 눅3:22b) 앞에서는 나타나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위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된 산에서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9:7) 하였고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12:28b)라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인정과 사역을 확인하심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표현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시는 것이고 변화 산상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마17:5b; 눅9:35b) 것은 죄의 사람이 구원을 위해서 듣고 순종해야 할 선지자나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한정하시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인정 때문에도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시는 고백을 듣는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로부터 거듭난 우리 각 지체들도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함으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 사탄의 시험(12~13)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인정하셨지만 이제 대적 마귀로 부터도 인정을 받으심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공생애를 위하여 준비된 두번째의 과정인 광야의 시험을 공관복음들은 모두 다루고 있지만 마태나 누가와 같은 시험의 내용을 이 마가는 생략하고 있다. 다만 마가는 다른 두 기자들의 표현이 “성령에게 이끌리어[ἀνάγω, 인도하다, 데려오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한 대신 “몰아내다[ἐκβάλλω, 밖으로 내던지다, 쫓아내다, 내쫓다, 내보내다]”라는 박진감 있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앞의 v10에서나 여기서 “곧[εὐθύς, 즉시 41, 마18, 눅7회]”라는 낱말을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것도 마가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께서 억지로 시험을 당하실 수밖에 없는 강압적이었다기 보다는 자의적이고 기쁘게 감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광야[ἔρημος, 버림받은, 고독한, 적막한, 황폐한]”는 성경 속에서 언제나 고통의 장소요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외롭고 적막하며 어떤 기반 시설도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이란 스스로도 생명을 지탱하기 힘겨운 장소로 그 기간 조차도 40일 간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의 역사 속에서 힘겹게 버텨냈던 것으로 묘사된다.
모세는 두번씩이나 산에 올라가 40일간을 하나님과 함께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출24:18, 34:28; 신9:9, 18)라는 기록을 볼 수 있고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스라엘 백성의 후예들이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 광야생활한 기록은 너무나 유명하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기손 시냇가에서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들어갔고 천사가 가져다주는 떡과 물을 먹고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에까지 가는 기간이기도 하다(왕상19:8).
믿음의 사람들의 어떤 경우의 시험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버려졌다는 생각까지 갖을 정도까지의 적막한 상황을 당해볼 때 그럼에도 믿음을 지켜내고 회복될 수 있다면 역시 검증된 믿음일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으려는 모양들을 더러 보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3) 시험의 기간에 있었던 3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원초적인 데서 점진적인 시험의 종류를 마가는 생략하고 있지만 기간과 대상과 함께 한 피조물들 까지를 언급하고 있다.
기간은 앞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영원의 호령자요 주인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에서 최초로 있었던 시험들을 모두 당하신다. 뱀에 의해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f)였었고 이를 다시 요한 사도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2:16f)라고 부연한다. 시험을 받으시는 대상이 “사탄[שָׂטָן, Σατανᾶς, 악한 상대, 적, 대항자, 대적자]”이라 한 것은 OT적인 용어이다. 마태나 누가는 사탄이라 하지 않고 “마귀[διάβολος, 중상자, 비방자]”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다르지 않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유대 광야에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야생의 동물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아서 힘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동물들로 부터의 위협은 한층 더할 것이지만 함께 계시니 라는 표현은 오히려 좋은 관계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모함을 당하여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과 같은 입장(단6:21~22)과 같은 상태였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표현은 마태와 같은 표현이지만 반면에 누가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4:13)는 의미 있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시험은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최후까지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마가는 이 시험의 종류를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인류구원을 위한 시작으로서의 시험을 간략하게 다루었고 얼마 동안 떠난 마귀는 이 역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 시험을 가할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Ⅲ. 복음의 선포의 시작(14~15)
구속의 역사를 이룰 메시아 로서의 검증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복음을 방해하려는 대적자 마귀로부터 인정받으시고 드디어 사람들 속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을 여기서부터 ~9:50 마가의 특별한 표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잡힌 후” v14~5:43는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말씀들이고 6:1~9:50은 주로 갈릴리의 북동쪽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시점은 세례자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후부터였다. 이제 ~v20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까지 기록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14)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길을 준비하라던 침례자 요한의 역할은 역사 뒤로 흐르고 이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일선에서 복음을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마태는 사9:1~2를 인용하여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증거한 바 있다. 이 마가복음에서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이적들도 어쩌면 소외된 사람들에게 베풀어 진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14)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요 좋은 기별이다. 지금 ‘우크라이나나 이란에 전쟁이 멎었다.’라는 소식이 온 지구 촌에 기쁜 소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 이루어지는 일들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일 수밖에 없다. 질병으로 고통하고 죽어서 썩어지고 소망을 잃어버린 일류에게 최고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와 생명의 회복밖에 없다. 이것은 가장 진실되고 사라질 수 없는 영원한 복음이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다. 그럼으로 세상에서 흘러오는 기쁜 소식은 상대적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복음의 주체가 영존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뿐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5) 주님의 처음 증거의 내용이다. 여기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생명의 복음과 그것이 사람에게 효력을 미칠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고 계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15f)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9:1~2처럼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시고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b)라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가르침이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가장 적절한 때를 놓치면 안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5) 이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이 귀중한 언약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아무리 좋은 기회도 흘려버리면 소용이 없고 오히려 나중에는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귀한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은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죄악으로 가던 삶을 돌이켜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했지만 이것은 적어도 나의 삶 전체를 맡기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변의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인정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게 귀로 들을 수 있게 나타내셨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하심으로 기뻐하심을 입었다면 같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오늘 우리도 그런 인정을 늘 감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정받는 주님께서도 인류구원을 위하여 대적 마귀에게 까지도 시험을 감당하시고 이기심으로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셨다. 오늘 우리 또한 어떤 고독이나 위험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넉넉히 이김을 약속하신 주님을 신뢰한다면 아무리 맹수 같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천사들의 도움까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시험을 감당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회를 우리도 100% 활용하여 다른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요청하여 마지막 때의 추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