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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2:1~12 2026-08-09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와 치료의 기적들은 가버나움은 물론 온 갈릴리에 유명해졌고 이 2장에서도 여러 질병의 치료는 계속되지만 자신들의 위기감을 느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문둥병자와는 다르게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면서도 어떤 것도 불가능한 중풍병자를 그의 가까운 사람들의 사랑과 우정으로 데려와서 고침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권한에 불만인 서기관들의 도전을 받게 된다.

다음 시간에는 세관직원이었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금식문제와 안식일에 밀이삭을 따서 비벼먹은 제자들로 인하여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하게 되고 그럼에도 3장에 이어지면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으로 다시 바리새인들의 죽이려는 모의까지 받게 된다.

치료를 위하여 몰려드는 군중들로 인하여 잠시 한적한 곳에 피해 계시던 주님은 또 다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나서심을 본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이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셨고 이 소문은 빨리 퍼져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마가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도저히 우리 주님께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네 사람의 중풍병이 걸린 사람의 친구들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이들의 믿음이 주님께 받아들여져서 그들의 무모한 행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인정받고 고쳐 주신다. 이 과정에서도 날로 인기가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허점을 잡으려고 벼르던 교권자들 앞에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심으로 오히려 주님의 권위를 나타내신다. 즉,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만이 사죄의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



Ⅰ. 믿음의 사랑(1~4)

이 장면은 마치 치밀한 작전을 진행시키는 군인들과 같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치료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앞에 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불가능 속에서도 길이 열림을 이 내용은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남의 집의 지붕을 뜯는다는 것은 물론 ‘지붕을 뜯게 되면 예수께서 계신 곳에 흙먼지가 쏟아질 것임에도 과연 주님께서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주실까!’ 그럼에도 이런 모든 상상을 접어두고 이 일을 감행하는 5사람의 믿음을 주님께서도 아셨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1)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1:38) 하셨던 주님은 그럼에도 다시 가버나움에 오신 것은 분명 우리 주님의 뜻이 계셨을 것이다. 물론 “수 일 후”에 라는 말도 정확한 날 수를 예측할 수 없는 어간(於間)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2) 문 입구까지도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기를 위해 질병 치료를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고 계셨음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의 도를 증거하시는 그 와중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3) 마태나 누가는 네 사람이라 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라고 만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의 보다 섬세한 기록을 본다. 예부터 중풍병 걸린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네 사람”이 가족인지 친구들인지는 정확한 언급이 없지만 이 사람의 치료를 서로가 그렇게 바라는 마음과 믿음들은 한결 같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네 사람이 들것의 한 모퉁이씩을 감당하여 이 부자유한 친구를 주님께 데려 가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완전히 치료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4f) 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은 모여 있는 무리들을 핑계하거나 장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이나 처지를 인하여 자신들이 손해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자체가 칭찬받을 자세이다. 어쩌면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이다.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4m)

마태는 이런 기록을 생략했고 누가는 이 구절을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눅5:19) 우리 대한 민국의 기와집 지붕과는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지붕 옥상의 위를 걷어낸 것은 분명하고 이런 발상을 한 것 자체가 기발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찌 보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께도 불편을 끼쳐드릴 수 있지만 이들의 믿음은 그만큼 주님 앞에 다가가기를 갈망했고 그런 가운데 이런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도 모르긴 해도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신기해하고 부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 말로는 ‘궁하면 통한다.’ 했지만 얼마전에 외웠던 말씀이 생각난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8~30)

마침내 저들의 소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4b) 네 사람은 여전히 지붕위에 있고 중풍병 든 사람만을 예수님의 바로 앞으로 침상 째로 달아 내렸다는 한 단계의 성취이다. 사실 그것이 영육의 어떤 문제이든지 모든 문제는 주님 앞에까지 가져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 주님께 맡겨지는 것이다. 치료의 과정은 다음에서부터이고 다음 구절에 보는 대로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인정하심을 본다.



Ⅱ. 사죄와 치료(5~9)

오늘 우리가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치유와 사죄가 모두 가능한 하나님이시지만 당시의 서기관들은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신성모독의 행동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봤던 것이다. 갑자기 갈릴리에 나타난 남자 그것도 나사렛에서 왔다는 선지자가 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단자로만 보였을 것이다. 또 오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떨까 를 생각해 보면 이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나 말이 이해될 수 없었을 것 같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우리 주님은 여기서도 다른 모든 것 사실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다면 먼지를 일으켰을 것이고 기침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런 모든 행동들이 오로지 자신을 만나기 위한 믿음의 행동이었음을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불굴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그 사람과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치료의 어떤 행동이나 기도보다는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다소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 대한민국의 불신자들이나 유대인들은 치료될 수 없는 질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성경에서 이런 성향을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요9:2이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 넓은 의미에서 죄의 영향이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고 그런 입장에서는 이런 말이 그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는 기록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 주님의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서기관들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6) 머리를 굴리며 이리저리 우리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이 생각은 율법적으로 생각하면 그르지 않은 생각이다. 레24:16에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한 것처럼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모독이고 그런 사람은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죄를 하실 수 있지만 사람은 사죄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지금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위는 바로 나타난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8f) 분명히 그들은 단지 생각했을 뿐이고 표정에는 몰라도 아직 입으로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닌데 그 중심을 주님께서 읽어 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주님을 알아봤어야만 했다. 사람은 절대로 마음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8b)

여기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권위를 알지 못하는 저들의 판단이 옳지 못함을 지적하신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은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있다고 믿지만 그리스도를 단지 사람 중에 위대한 사람으로만 보는 불신의 입장에서는 이들과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함을 말하게 된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 여기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질문이다. 말로서 선언하는 사죄와 사실적으로 치료하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는가 물으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 중에 전자는 서기관들이 생각한 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이지만 결과가 당장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 스승들도 할 수 있는 말이면서 보다 근본적인 치료이다. 반면에 후자는 당장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에 권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선언이지만 사죄의 결과라는 데서 전자보다는 덜 중요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가지 내용을 먼저 그리스어로 비교해보면 “Ἀφίενταί σου αἱ ἁμαρτίαι!”와 “Ἔγειρε καὶ ἆρον τὸν κράβαττόν καὶ περιπάτει!”로 전자가 역시 말에 있어서는 더 짧고 뒤의 말이 더 길다.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서 히브리어로 비교를 해 보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נִסְלְחוּ לְךָ חֲטָאֶיךָ”(Nisleḥu lekha ḥata’ekha) 즉, נִסְלְחוּ(nisleḥu): 용서받았다, 사함을 받았다. לְךָ(lekha): 너에게. חֲטָאֶיךָ(ḥata’ekha): 네 죄들. 직역하면 “너의 죄들이 네게 용서되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קוּם שָׂא אֶת־מִטָּתְךָ וְהִתְהַלֵּךְ”(Qum, sa et-mittatekha, vehithalekh) קוּם(qum): 일어나라. שָׂא(sa): 들어라, 가지고 가라. אֶת־מִטָּתְךָ(et-mittatekha): 네 침상을. וְהִתְהַלֵּךְ(vehithalekh): 걸어가라. 직역하면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어느 말로 비교해도 전자가 더 짧고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다는 데서 쉬운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쉽게 말씀하신 것이 뒤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역시 하나님 모독이고 거짓선지자 일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이 말씀하신 바를 바로 나타내심을 연이어지는 말씀에서 확인하심으로서 하나님 되심의 권위를 저들 앞에서 나타내신 것으로 치료의 근본은 죄를 해결하는 것임을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Ⅲ. 도무지 볼 수 없는 권능(10~12)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론이 다만 말로만 들려졌다면 반론을 제시했던 사람들은 모르긴 해도 바로 돌팔매질을 할 기세였지만 주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이 듣기 좋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임을 그들의 보는 앞에서 나타내신다. 이 결과는 문 앞에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던 사람들에게는 놀람으로 이런 권세를 가진 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불신으로 주님을 책잡으려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분노만 키울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교훈이나 행하시는 이적에 대한 반응은 이렇게 두가지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2천여년이 지난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10f)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인류의 사죄를 위하여는 죄인 된 사람이어야만 했다. 이처럼 영육의 사죄의 역할을 위하여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오셨고 이런 입장에서 ‘인자’라는 호칭을 쓰시는데 이런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란 표현이 쓰여지고 이 마가복음에 14회 사용되고 있다. 이런 아들의 순종과 역할을 요한은 표현하기를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5:27) 하였다. 같은 의미에서 뒤의 v28에도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주님의 행하시는 역사나 말을 책잡으려는 서기관들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일깨워 주심에도 물론 저들은 자신들의 권위나 인기가 예수님 때문에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만 생각할 뿐 이러한 우리 주님의 깨우치심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것도 역시 육신의 유익을 잃지 않으려는 것 만을 생각하는 전혀 영적이지 못한 저들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 그 집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 말씀에 “아멘!” 하고 감격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해 주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은 오늘 이 역사 속에 모든 사람이 알아야만 할 귀중한 생명의 교훈이기도 하다.

그런 다음 그 권위를 가지심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 보이신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10b~11) 앞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셨던 사실적인 결과를 보이신 모습이다.

만약에 우리 주님께서 이런 권위가 없으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트집잡던 서기관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셨을 것이다. 그냥 ‘일어나 가라!’ 하실 수도 있었지만 완벽한 회복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자신이 눕고 네 사람이 메고 와서 지붕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달아 내렸던 그 침상을 들고 가라 하신 것이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이 중풍병을 앓던 사람은 그 말씀이 생명이심을 믿고 바로 행동으로 표현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12f) 의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는 과거의 불치의 병들이 치료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침상에 누운 체로 사람들에게 들려왔던 이 사람이 당장 일어나 자신의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이 시대에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 어떤 수술을 했더라도 수술 자욱이 치료될 기간이 필요하고 재활치료가 치료기간만큼 물리치료를 통해서 회복할 때까지 계속 해야 할 과정들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권능은 말씀하신 것들이 즉각적임을 보는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그러지고 비정상적인 것도 말씀 한 마디로 회복됨을 보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2m)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또 이런 치료를 비롯한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마술가들과 같이 눈 속임이 아니라 사실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치료나 이적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는 요한 사도의 기록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 치료의 역사를 본 발 디딜 틈이 없이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2b) OT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볼 수 있지만 400여년의 예언이 없던 암흑기 후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본 사람들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서도 본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통해서 종교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이런 권능의 역사는 불가능했음을 랍비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행할 수는 없이 OT의 말씀들 만을 읽고 해석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면서 큰 소망을 기대하는 바람이었다.



이 중풍병 걸린 사람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모한다고 해도 스스로는 절대로 주님 앞에 올 수 없는 불구였지만 그의 이름없는 네 사람의 가족인지 친구인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올 수 있었고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이런 중풍병자 같은 사람은 있을 수 있고 그들은 우리가 자신을 주님 앞에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믿음으로 자신의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기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사죄에서부터 사람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육신적인 것이든지 회복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또, 근본적인 죄의 해결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바탕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죄의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 육신으로 오셔서 이런 권능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행하심으로 우리의 죄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심이 증명되었다. 오늘도 주님을 만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은 당시에처럼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