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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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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2: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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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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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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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로 부르셨던 1:16~20에서처럼 다시 바닷가를 찾으셨다가 알패오의 아들이자 세무원인 레위(연합)를 부르시는데 공관복음에 다 기록하고 있지만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마태는 예전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의 이름인듯한 마태(하나님의 선물, 3:18)를 기록하는 반면에 마가나 누가는 레위라는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주님의 선택을 받음에 대한 감격에서 레위는 자신의 집에 잔치를 베풀고 이 잔치에 자신의 동료인듯한 세리들과 서귀관들이 볼 때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을 보고 역시 시비를 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다는 답변을 하심으로 이들의 비난을 잠재우신다.
꼭 같은 하나님의 생명의 교훈을 증거하심에도 그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시비거리로 삼아 항의하고 대항하는 반응은 그때나 마지막 역사를 향해가는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증거되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진리가 생명이 되는 못하는 이유에서 같은 생명의 교훈을 은혜로 소화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는 것이다. 영적인 교훈이 하나님의 내리시는 생명의 교훈이라면 그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향대로 생명의 은혜로 소화하는 믿음으로 사람마다 다르고 이런 입장에서 각자의 믿음의 그릇은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이유에서 생명의 진리는 감추지 않고 계속 증거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지만 오로지 싸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귀한 생명의 진리 마저도 싸움을 위해 대항하는 어두움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논쟁거리로 취급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다한 후에 조차도 울분을 다 풀지 못하는 결말이 될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극명한 대조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13:28)는 누가의 기록을 본다.
Ⅰ. 장소에 관계없는 생명의 증거(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의 활동무대가 갈릴리라고 했지만 그런 만큼 바닷가에서 가르치신 것은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생명의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있어서 장소를 가리지 않으셨고 어쩌면 자연을 가르치심의 도구로 사용하신 예는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실 죄인을 구원하는 생명의 복음만큼이나 인류에게 소중하고 긴박한 소식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대상의 사람들을 가리지 않으시고 道를 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활동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셨다.
1:14에서부터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3: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4:1“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5:21“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라는 기록들과 함께 1:21“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 1:39“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3:1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6: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라는 기록들은 회당에서의 전도나 가르치심도 이 마가복음에서 만의 기록들이지만 사복음서에 이런 내용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갈릴리에서도 바닷가에서뿐만 아니라 눅5:3에서는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는 앞의 4:1과는 상황은 다르지만 배에 오르시고 군중들을 바닷가에 앉아 말씀을 듣는 상황들도 상상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면 어디서나 천국복음을 증거하셨다.
마5: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요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라는 것처럼 산에서 자주 기도도 하셨지만 말씀을 전하시고 식사 때가 되었을 때는 오병이어와 같은 육신의 굶주림도 채워 주셨다. 이런 자연 속에서 꽃들과 새들을 가리키시면서 마6:26“공중의 새를 보라, 28“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시며 모델로 삼아 진리를 증거하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신 것이 바닷가나 자연속에서였다면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회당을 찾으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시대의 상황에서 모든 보이는 것들의 소망이 사라져가는 지구촌의 모습은 우리를 통한 복음증거를 더 긴박하게 요청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이 마지막 시대가 사라지지 않을 소망을 더욱 기대하는 영혼들 속에서 보게 된다. 마치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풍랑만난 배위에서 외치던 바울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 날 풍랑 속에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들은 삶의 소망조차 잃어버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잊어버린 절망의 모습을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27:20)고 표현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바울은 분명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소망을 담대히 선포한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절망 속에 소망이 더욱 가치가 있고 마지막 가는 최후의 삶에서 복음은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바다가 이건 산이건 회당이건 가리지 않고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복음증거를 중단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런 주님의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어떤 것 보다도 본받아야 할 신앙의 자세이다.
Ⅱ. 차별 없는 사랑(14~15)
1:16~20에서 네 사람의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3:13~19에 열 두 사도의 이름들을 거론하고 있지만 다시 레위를 불러 복음의 일에 참여시킴을 본다.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속에서 세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죄인들과 같이 대우했던 이유는 세리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부요하게 사는 이유(눅19:2~10삭개오)가 정직하지 못하게 로마의 징세에 임의적으로 돈을 더 거둬서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거나 어떤 곳에 통행세를 받는 옳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이렇게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았던 세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았을 때는 한결같이 감사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은 이 레위나 삭개오 역시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f) 우리 주님께는 어떤 일도 우연은 없으셨다. “또 지나가시다가…” 항상 만나는 시간이건 사건이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시간과 장소였을 뿐이다. 앞의 중풍병 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였고 오늘 이 마태를 부르신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는 상황을 볼 때 역시 가버나움에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로마의 관리들이 이 가버나움에 많이 거주했던 당시였기 때문에 역시 세관도 그곳에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판단이다. 또 한결 같은 주님의 제자 선택은 그들의 일이 어떤 것이든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때나 지금이나 부지런한 자들을 일꾼들로 쓰심을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b)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떤 대상에게 나 권위가 있으셨다. 심지어는 귀신들도 거절할 수 없는 권능을 앞에서도 이미 본 바 있다. 앞의 베드로나 요한 형제들에게 같은 명령을 주셨고 그들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 나섰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세관원인 레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업이라고 하는 데는 베드로형제나 요한형제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앞의 네 제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일이 없는 어부로 이스라엘 속에서 천하게 여기는 일이었지만 비난받는 일은 아니었다. 반면에 세관원은 극단적으로는 ‘매국노’ 취급을 받을 정도로 비난은 받았지만 그래도 경재적으로는 로마를 등에 업고 안정된 수익으로 어려움 없는 직업이었다.
또 아무나 가능한 직장도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별로 유명세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따르라!”시는 한 마디에 자신의 보장된 직업을 던져버리고 순순히 “일어나 따르니라,”는 선택은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다음 반응은 많은 죄인취급을 받은 사람들이 따르는 이 이름없는 나사렛의 선지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식탁을 베푼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레위의 선택은 단순히 이름없는 선지자를 대접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는 평가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함께 접대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명예에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평판을 들을 수도 있는 별로 득이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어지는 서기관들의 평가에서도 보게 된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15f) 조금이라도 계산적인 레위였다면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주로 받는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식사를 대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만찬은 OT의 엘리사처럼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잔치일 수도 있다(왕상19:20~21).
나중에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할 정도로 영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다면 자신에게 손해나는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접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레위의 집에 앉아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이 사람들도 당시의 분위기에서 레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레위를 비롯한 이들은 당시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는 도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수로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 함께 앉았으니”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b)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는데 특히 뒤에 연결되는 “예수를 따름이러라”라는 표현에서 “따름이라[ἀκολουθέω, 함께 가다, 따라가다, (의견)을 따르다, 동의하다, 순응하다]”는 의미로 삶의 목표나 방식을 완전히 같이하는 사람들임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이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평가를 받은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심을 본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11:19; 눅7: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데리고 다니셨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도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판단이나 평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주님이신 덕택에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데도 감사할 이유가 된다.
Ⅲ.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16~17)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에 치우치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 법의 중심이 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이는 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늘 충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서 계속해서 우리 주님과 부딪힘을 보게 된다. “פָּרָ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은 ‘분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분리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저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주신 계명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 분리한데서 이런 별명을 갖게 되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분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비극이 된 것이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교의 보수주의자들로 율법 그대로를 문자대로 지켜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데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했던 바리새인들과 보이는 종교의 산물인 성전을 관리하면서 현실의 실리를 챙기려고 했던 사두개인의 두 당파가 있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천사나 부활을 믿고 영생을 받아들였지만 사두개인들은 오로지 성전을 중심으로 현실의 실리를 챙기면서 천사나 미래의 영적인 세상을 부정하는 현실주의 적인 종교관의 두 극단적인 당파로 있었고 교회의 탄생이후에도 이 두 당파는 서로 충돌하는 모습들을 사도행전 속네서도 볼 수 있다(행23:6~10).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16f) 서기관들은 주로 율법을 필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구적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먹는 것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 땅에 오심은 의인시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신 데서 이 종교지도자들의 오해를 받기도 하셨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b)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언제나 연약한 제자들을 향하여 항의하는 졸렬한 종교꾼들이었다. 이들은 뒤의 v24에서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분리하여 두고 그것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상21장의 다윗의 예를 들어 책망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날도 너무 성경의 자구적인 내용에 집착하다 보면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다 귀한 뜻을 거역할 수도 있음을 경계하여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17f) 이렇게 정죄에 익숙하여 단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정죄하는 이들에게는 주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명쾌한 답변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단순히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자세보다는 이미 앞에서 v8에 기록했던 대로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라고 한 것처럼 이미 영으로 아실 뿐 아니라 저들의 정죄하는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7m) 당시에 이스라엘 속에서 일반적인 격언일뿐 아니라 이 역사에 대대로 귀중한 격언인 교훈으로 저들의 정죄를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이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으로 일깨우셨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병들지 않는다면 의사라는 직업은 생겨날 필요가 없고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는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 하신 것처럼 영과 몸의 불편한 질병들이 생겨났고 환자들이 늘어나는 것만큼 의사들과 병원은 더 많아지고 있다.
물론 당시 이 말씀을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영적으로 자신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스스로는 의인 인체 하는 잘못된 판단을 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겠지 만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영육의 만병의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오셨다는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7b)고 답변하셨다. 사람은 어떤 종교적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결코 의인일 수 없고 스스로 의인 인체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흘리심의 효력은 미치지 않는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시편14:1~3을 인용하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증거한 바 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 자체에 대해 철저하게 죄로 절망하는 사람에게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씻어 깨끗케 해 주실 것이다. 이것은 비단 복음 속에서만이 아니라 OT의 율법 속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물론 일반적으로는 흰색의 반대는 검은 색이지만 여기서 주홍이나 진홍같이 붉은 색으로 표시되는 것은 죄는 붉은 피를 요구하고(히9:22) 계시록에 보는 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을 ‘붉은’ 색상으로 표시한다(계12:3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계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하셨고 장소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복음을 가르치셨던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급하고 귀중한 교훈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잃고 얻게 하는 교훈이었기 때문이고 마지막 시대일수록 사람이 사는 문제 즉, 영원히 사는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조롱 듣는 사람들일지라도 구별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그들과 함께 죄인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셨다. 그들의 기뻐하는 일에 함께 하셨고 자신을 따르는 데서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사랑을 실천하셨다.
스스로 의인인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를 의지하도록 버려 두시고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시고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속죄의 피를 흘려 주셨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어떤 사람도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허락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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