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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2:18~22 2026-08-23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오늘 우리가 다루는 내용은 길지 않은 말씀이지만 OT과 NT의 간격을 완전히 이해하게 하는 세가지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태나 누가도 이 내용을 모두 함께 기록하고 있지만 부분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마9:14~17; 눅5:33~39). 앞에서도 이미 서기관들과 논쟁이 있었지만 여기서부터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은 본격적이다. 다음 시간에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인한 논쟁은 계속된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의 수치는 들어 나고 진리가 나타나면 거짓은 탈로 나고 그 어두움과 거짓이 빛과 진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다.

신앙에 있어서 구제나 기도, 그리고 금식은 산상보훈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마6:1~18)이면서 잘하면 의가 되고 잘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있는 내용은 OT의 사58장에서도 보는 모습이다. 특히 OT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하는 침례자 요한과 새로운 복음의 역사를 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간격이 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오늘 날에도 혼란의 여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는 세가지 비유를 통하여 분명히 하셨다. 즉, 혼인잔치와 생베조각과 낡은 옷 그리고 포도주부대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비유들을 들어서 저들을 가르침에도 당시에 이미 대항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음을 본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가치기준이 다르고 자신들이 이 젊은 선지자로 인하여 위치가 어려워지고 자신들의 이권을 다 잃게 된다는 공포심과 불만에서 듣는 답변은 그들의 마음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함을 이 사람들에게서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자세로 오늘 제목을 보게 된다면 벌써 시비거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어찌하여’를 왜 ‘왜’라고 줄였는가?” 이런 이해의 한계를 더 가까이 소화해 보는데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Ⅰ. 금식하는 제자들과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18)

여기 독특한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실 세례 요한을 존중하지 않았고 침례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금식의 문제에서는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도 또 하나의 모순이지만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마태는 세례 요한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이 마가(사람들이)나 누가(그들이)는 분명히 나타내고 있지 않다. 앞에서도 이사야를 거론한 바 있지만 OT의 이스라엘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금식하며 재에 앉는 일들은 더러 보는 내용들이다. 대표적인 예를 한 곳 보면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4:3)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복음 속에서는 완전히 금식이 배제된 것은 아님을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데서 금식을 하며 일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먼저는 이방교회 선교의 중심지라고 하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다른 곳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14:23) 라는 교회의 확장에서 보는 내용들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세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여기 “금식하고 있는지라”는 시제가 쓰인 것을 보면 저들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벌써 금욕적인 모습이었고 그의 제자들 또한 스승을 본받아 경건을 본받는 자세를 이유로 금식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복음에서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드셨던 성전에 올라와 기도하는 옳지 못한 바리새인의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눅18:12f)라는 기도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저들은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도록 저들의 종교적 계율을 정해 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바리세인들의 금식은 의식적인 내용들을 복음서들에서 보는 바이다. 이러한 저들의 의도를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바 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6~18)

NT OT을 막론하고 금식에 관한 논쟁은 하느냐 마느냐 와 사람을 의식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두가지가 금식의 문제에 대두되는 주 과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셨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수 있도록 사람 앞에 슬픈 기색이나 흉한 얼굴모습을 보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금식을 하라고 경계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렇게 질문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 보다는 주님의 제자들을 문제삼고 있다. 마태가 기록하는 대로 침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든지 아니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든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항의할 근거는 없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이렇게 금식이든 어떤 종교적 행동이든 ‘하느냐 마느냐?’ 묻는 것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는 결례를 행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하면 ‘왜, 당신은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쳐 놓았오?’라는 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세에 있어서도 어떤 계율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의무적으로 금식을 해야 하는 형편에 있을 수도 있고 진리를 따르고 순종한다면 금식에도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차이를 여기서도 깨닫게 된다.



Ⅱ. 혼인잔치에 금식을 하는 일이 있는가?(19~20)

혼례식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귀중한 행사이고 이러한 행사는 이 지구촌에 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된 때까지도 지속되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럴 것이라고 말세를 예언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마24:38~) 언제나 혼인은 사람들의 사회에서 최고의 기쁨으로 묘사되는 것이 사실이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신랑에게는 모든 의무조차도 해방을 주었던 것을 율법에서조차 본다. 혼인예식이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특히 혼인 잔치에서 함께 금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 과거에는 혼인 잔치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함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런 잔치의 만찬이 지나치다 보니 요즘은 혼인예식의 축의금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비유의 요점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동안에는 슬퍼하거나 괴로워 부르짖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임마누엘의 삶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임을 바울 사도도 강조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묘사하고 자신을 신랑의 친구인 우리말로 우인대표(혼례식에 참가하는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19f)는 표현을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좀더 분명히 하고 있다. “…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5:34)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혼인집에 하객으로 참여한 사람에게 금식을 하게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b) 요즘은 결혼식을 당일에 끝내고 말지만 지금의 예식장 문화가 없던 시절에는 대개 혼례식을 사흘정도는 동네 잔치가 되었다. 성경에 특히 혼례식의 이야기들이 많지만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일주일간 지속되기도 했다고 한다. OT에서는 과거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관계로 표현하는 내용들이 더러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한곳을 인용하면 “…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2b)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지만 성실하지 못함을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당시부터 도 그랬지만 NT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부부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내용이다. 역시 대표적인 한 곳을 인용하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11:2f) 역시 가장 구체적인 표현을 다루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우리의 신앙이 항상 천국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잔치하는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하고 특히 당시로서 제자들과 있어서는 주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한 고통과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전까지는 결코 고민하고 슬퍼해서 금식을 하면서까지 기도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 당시로서는 멀지 않아 닥쳐올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구속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래적으로는 이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두 번 쓰인 “빼앗길 날[ἡμέραι]”과 “그 날[ἡμέρα]”이 각각 복수와 단수로 쓰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수난의 날들은 여러 날이지만 인류의 마지막 날은 한 날로 그것도 순간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데서 그렇다. 또 달리 이해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빼앗기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후로 안타까워할 제자들의 상태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약간 표현을 달리 하여 “그러나 그 날(ἡμέραι)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ἡμέραις)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눅5:35)라고 둘 다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세상에서의 혼례식에서의 기쁨은 신랑과 신부 당사자이거나 하객들 모두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신 신부인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 기쁨이 끝나지 않고 오히려 이 역사가 끝난 후에는 더욱 감격과 기쁨이 충만한 신혼의 삶이 될 것을 요한 사도는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럼으로 당시에 제자들에게는 주님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빼앗기고 탄식했지만 구속을 이루신 후에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성도로서 신부의 지조를 지킨다면 절대로 신앙을 빼앗길 일은 없을 것이다.



Ⅲ. 손해볼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21~22)

특히 여기에서는 과거의 율법과 복음의 간격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중요하고 이채롭다. 요즘이야 옷을 수선하는 것은 대부분 돈을 주고 전문가들이나 세탁소에 맡기게 되지만 과거의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옷을 잘 사 입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떨어진 옷은 다른 낡은 옷 같은 데서 뜯어낸 성한 부분을 덧 데어 꿔 메어 입는 일들이 우리의 가난한 때나 이스라엘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주님께서도 평소 이런 일을 자주 보셨기 때문에 이런 비유를 하신 것인데 바울의 “우리 주 예수 …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는 고백처럼 감격이 된다. 뒤에 연결되는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 비유는 우리 나라의 문화에서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원리는 누구든지 바로 듣기만 한다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비유도 아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물론 반대로는 낡은 베 조각을 새 옷에 붙이는 것도 하지 않는 일이다. 이런 말을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나 특히 아이들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세대에서는 오히려 ‘왜, 옷에다가 천조각을 붙여?’ 라고 질문할 만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과거의 낡은 종교에 새로운 생명의 교훈을 함께 짜 집기 할 수 없다는 유대교와 복음의 혼합은 생명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복음 시대에 그러한 주님의 지적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과거에 청렴을 미덕으로 삼고 살았던 때에는 오히려 옷을 많이 기워 입은 사람이 존경되기도 했다. 신라지대의 거문고명인이었던 백결선생(百結先生)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 사람은 가난하여 옷을 백 번 이상 기워 입었다는 데서 ‘백결’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유명메이커의 옷을 입어야 학교에서도 기를 펼 수 있다는 우리 시대는 분명히 보이는 모습에서는 많이 부요해졌다고 해도 속으로는 많이 피폐해져 있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보며 영원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결같이 지극한 평안과 감사를 누릴 영원한 혼인의 삶을 기대하게 된다.

(21f)“…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b) 새것과 헌 것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여기 표현대로 낡은 옷의 떨어진 곳에 새 천을 붙인다면 그 새 천의 강도에 의해서 낡은 옷을 잡아당겨 옷이 더 빨리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은 이해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새 옷을 다른 것에 의해 찢겼다고 할 때 낡은 천을 갖다 붙인다면 새 옷의 끌어당기는 장력으로 인하여 곧 떨어져버릴 것이다.

세상적인 원리일지라도 서로 비슷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단순히 육신적인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치를 말씀하시는 데서 더 귀중성을 깨달어야 한다. 근원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면 생명의 법인 복음에 과거 OT시대의 의례적으로 행해야 하는 금식 같은 것은 어울릴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새로운 복음에 낡은 유대교의 교리를 덧붙여서 편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내 문제를 일으키고 말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2) 요즘이야 포도주이든 값이 나간다는 술은 그 담는 병도 특별하고 고급스럽게 만들고 포장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포도즙을 짜서 담아 두거나 옮기는 도구는 양 가죽을 벗겨서 다리 부분과 머리 부분을 묶어서 포도주를 담는 도구로 사용했는데 그런 가죽부대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장력이 약해져서 강하게 발효하여 가스가 팽창하면 포도주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서도 이런 지혜는 거의 일반적인 것이었다. 구태여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한다면 가죽으로 커버를 만든 성경책 같은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22f)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기본적인 교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단호한 말씀이다. 최근까지 유럽에서는 포도즙을 발효시키는 도구로 Oak나무 즉, 참나무 통에 오랜 숙성을 거친다고 한다. 포도즙은 본래 발효의 성분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에는 강하게 발효를 한 다음에 일정기간이 지나게 되면 발효는 멈추게 되어서 그렇게 튼튼하지 않은 새 부대가 아닐지라도 터지는 일은 없다고 한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22m) 이것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예상이다. “만일 그렇게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한다면~’이라는 경계를 이름이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2b) 앞에서 “만일”이라는 가정이 있었다면 여기에 “오직”이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다. 여기 두번씩이나 사용된 새것을 의미하는 “새”도 우리 말로는 같은 말이지만 본래 쓰여진 내용으로는 조금 차이가 있는 표현들이다. 전자(새, 포도주 νέος, 새로운, 젊은, 신선한)는 시간적인 의미로서의 새것이라면 뒤의 것(새, 부대 καινός, 새로 만들어지거나 출시된, 확실히 더 낫다)은 질적으로 새것을 의미하는 낱말들이 쓰였다.

복음적인 의미에서는 “새 포도주”는 발효력이 왕성한 것이므로 성령이 이끌고 주도하는 믿음을 의미하고 “새 부대”는 담는 도구라고 하는 데서 사람의 육신을 상징할 수도 있는데 과거의 육의 삶에 그대로 성령을 모시려 한다면 결국 감당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하늘로부터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생명과 진리의 복음은 드디어 진가를 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다. OT의 율법은 주로 육신의 삶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법이었다면 NT의 복음은 포도주의 발효력과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법이라는 데서 이 생명의 법을 과거의 율법 속에 담을 수 없는 깊은 의미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확한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의 질문에 당시의 문화와 일상에 있을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서 명쾌한 답변을 주시 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역사에 주어지는 복음은 과거 영적인 것보다는 주로 육신적인 삶을 관장하던 낡은 법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금식의 시비에서부터 풀어 증거하신다.

혼인예식 이야말로 율법에서도 그렇거나 와 절제와 경건을 위해 금식하는 행사가 아니니라 기쁨의 행사이다. 혼주나 손님을 막론하고 금식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인류의 신랑 되신 주님의 제자들이 침례자 요한의 제자이거나 한주간에 두 번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바리새인의 제자들처럼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일지라도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과거의 낡은 짖어진 옷에다 새로 개발된 새 섬유에서 잘라낸 천을 대어 깁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오래 사용한 낡은 가죽부대에 발효력이 왕성한 새 포도주를 넣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창세전부터 예비되고 준비된 모든 날 마지막에 완전히 새로운 복음에 이집트에서 나올 때 세웠던 옛 언약을 붙인다면 구원이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위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복음은 그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요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자들 만이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모순속에 있지는 않은 지 우리 각자 스스로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성령께서 발효하는 포도주처럼 역사하시게 하도록 나의 인생의 모든 삶의 도구도 방법도 하늘로부터 거듭난 모든 것으로 복음을 수용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