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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반대 세력은 점점 기세를 높이고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복음 증거에 바쁘신 주님을 친족들은 급기야 예수님을 미쳤다고 붙들어 나오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데 이것은 교권주의 자들의 기세를 더해가는 것에 대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도 이 사실을 함께 기록하고 있지만 미쳤다고 하는 친족들의 반응은 이 마가복음만의 기록이다.
오늘의 내용이 바알세불이 지폈다며 주님을 모독하는 서기관들의 행위가 성령과 더불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유를 들어 있을 수 없는 일임을 해설하시고 이러한 비방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을 넘어서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는 사실을 ~v30 기록하지만 분량을 조절하기 위하여 ~v27 끊어서 나눈다.
나머지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찾은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어머니와 형제라는 가르침을 다루게 되는 ~v35 내용과 함께 다음 시간에 이어가고자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취급을 당하셨다면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 우리들이야 이보다 더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섬긴다면 많은 부분에서 당하는 어려움들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을 수 있다. 세상이 언제나 진리의 편이기보다는 어둠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는 판단과 믿음으로 이런 처우를 당할수록 하늘의 상급은 클 것이라는 감사로 신앙해야 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친히 말씀하신 언약을 더욱 확신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하였고 다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권면하고 있다.
Ⅰ.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바쁘심(20~21)
“집에 들어가시니” 했는데 이미 1:29에서 봤던 대로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몰려 들었고 주님과 제자들은 그러함에도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불편을 해소해 주는 데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하늘의 권위를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참 가치 있게 채우셨음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이 마가복음이 증거하는 주님의 행적만 봐도 이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6:31에도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오히려 분주한 제자들에게 여유를 찾아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언제나 계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사람들이 몰려 들었지만 그 분주함 속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소외된 감정을 받은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께서는 사람을 섬기는데 분주하셨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분주함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행복과 기쁨과 의무감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을 치료하시는 일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살았던 모세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고 우리의 시간을 바로 사용할 수 있게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주님의 사역을 생각하는 바울의 당부도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7)거나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는 당부를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각 다른 인생의 길이와 시간을 주셨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분주함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21f) 여기서 다음절은 그야말로 주님께 더욱 안타까움을 드릴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아버지 요셉을 도우며 지냈을 시간들은 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고 묵상을 많이 할 수 있는 한가로운 시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목수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주함은 없었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떤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해 분주히 일을 해야 할 성격의 일은 아닌 것이 당시의 목수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예수의 친족들은 쓰여진 의미로는 그냥 주변 사람들이지만 뒤에 v31에 나타나는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일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먼저는 친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러 왔다가 못해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직접 찾아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육신적으로 볼 때는 식사도 챙겨먹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이 30세 정도까지의 고요한 모습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붙들어 나오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여기 “붙들다[κρατέω, 붙잡다, 체포하다, 굳게 지키다]”는 상당히 강제적인 뉘앙스를 풍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1b)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정신을 잃은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이 지금 시간을 다 지내 놓고 우리가 볼 때는 오히려 비 정상적인 사람들이고 바로 다음절에 연결되어지는 내용 하고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 “미쳤다[ἐξίστημι, 깜짝 놀라다, 정신이 나가다 = ἐξ + ἵστημι 서다, 세우다, 멈추다]”는 표현은 사람의 마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와 있다는 의미이다.
왜, 예수님의 친족들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이해할 때는 소문으로 그렇게 들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소문으로 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마태는 이 내용을 침묵하는 대신에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마12:22~23)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진리와 생명을 위하여 분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신이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듣고 그를 강제로 붙들어 아마도 나사렛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오해는 세상에서는 더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에 의해 죄수의 신분이 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향하여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26:24)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실을 보면서 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복음의 일꾼들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오해이지만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위해 일한다면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Ⅱ. 서기관들의 불경건(22)
예수께서 계시는 어디나 이미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경계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하여 사람들은 파견했던 것 같고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부터 파견된 사람들은 시골에서는 권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막7:1에서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병행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이 사람들을 “바리새인들”(마22:24ff)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2:16에서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라고 하여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f) 문제는 이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을 훼방하는 두려운 행동이다. 다음 시간에 여기에 대한 결과를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시만 성경을 그렇게 오랫동안 상고해온 사람들이 예언을 따라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엄청난 오해는 저들의 영원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m) 성경 속에 바알은 아합 때에 그의 아내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에 의해 들여온 가나안의 주신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격하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아는 한 가장 더러운 영이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 “바알세불[Βεελζεβούλ, בַּעַל זְבוּב, 똥의 주, 오물의 주, 파리의 주, 에그론 사람들의 특별한 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지켜지고 움직여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혹독한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다. “지폈다[ἔχω, 가지다, 지니다, 소유하다, 획득하다, 점유하다]”는 표현 역시 그러한 더러운 영에 의해 지배당한 사람이라는 혹평이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b) 이 또한 저들의 신앙 속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억지인 것은 모든 어둠의 영들; 사탄일지라도 하나님의 통제아래 있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일반적인 신앙적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욥을 시험하려는 사탄 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가능한 것을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1:12)거나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귀신의 왕이 귀신을 좌우하고 관리한다는 생각은 합당치 않은 자신들의 믿음조차조 무너뜨리는 엄청난 실책이다.
이런 배은망덕을 행하는 저들을 향하여 이 말씀의 병행구절인 마12:28에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저들의 지적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말씀하심으로써 저들의 사악한 저의를 반박하신다. 우리 나라 민속신앙만금이나 이스라엘도 귀신의 역할을 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이러한 어둠의 영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음 안다면 하나님의 진리 된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입지를 더 귀하게 생각하는 저들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어둠의 귀신의 역사로 말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배우는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이다.
바르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종교인이 되면 충분히 이렇게 부끄러운 행동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행하게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저들의 영향으로 우리 주님께서 귀신들렸다고 군중들로부터 오해를 받은 일은 요한복음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요7:20, 21; 8:48; 10:20).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엄청난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Ⅲ.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다(23~27)
친족들은 자신을 붙들어 데려가려 하고 예루살렘에서 파송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더러운 귀신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오해와 멸시를 받으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차분하게 저들의 논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가장 일반적인 예를 들어서 조용히 일깨우신다. 한 마디로 스스로 분쟁하는 단체는 절대로 든든히 설 수 없다는 교훈으로 이 단순한 교훈이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단합의 교훈이다. 저들의 잘못된 지적을 되받아서 가장 일반적인 논리에서부터 저들의 지적으로 접근해가는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23f) 요즘 우리 시대의 유명하다는 종교 지도자였다면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들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시고도 너무나 차분히 대응하는 모습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게 해 주신다. “불러다가[προσκαλέομαι, πρός, ~에서부터, ~을 향하여 + καλέω 부르다, 초대하다]” 조금도 분내심이나 흥분됨이 없이 차분히 저들에게 그들의 말이 문제됨을 가장 일반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비록 땅에서 있어지는 일이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 충분한 이해를 주고 계심을 이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b) 비록 사탄일지라도 스스로 수하에 있는 마귀나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며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안타까운 것은 이 땅에 있는 사람의 단체나 정치세력들은 이렇게 사탄도 하지 않는 일들을 너무나 자주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다. 다만 빛이신 우리 주님만이 분쟁과 질병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 어둠의 세력을 쫓아내는 것은 당연하고 최종적으로는 저들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생명을 위해 희생해 주신 것이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24) 이 또한 간단하지만 만고의 진리인 이런 잘못된 일들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들을 본다. 정의와 발전을 위하여 잘 못하는 것을 견제하고 바로 세우기 위한 정의의 정쟁은 있어야 하겠지만 스스로를 헤치고 상하기까지 분쟁하는 것은 어린이아들이나 하는 짓임에도 오늘 우리 시대에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무한 경쟁의 마지막 시대에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기술을 자신만 위하여 다른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도 너무나 근시안적인 자세로 최종적으로는 나라도 자신에게도 손해날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옳지 못한 일들은 우리 주님처럼 덕스러운 자세로 조언하고 그것이 옳다면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세야 말로 자신이 살고 서로가 사는 공생의 묘약일 것이다. 누가는 이 v24~25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눅11:17)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25) 이제 논리의 범위를 점점 가까이 가져오심을 듣는다. 나라는 모든 가정들이 바탕이 되는 집단이기 때문에 나라의 일에 앞서서 집안의 분쟁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집은 단순히 성씨가 하나인 집안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마음에 두고 이르심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는 가르침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안에서 분쟁하는 것은 사탄을 돕는 일임을 명심하고 화평의 일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을 통해서 주는 권면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당부한다.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26) 바로 앞의 v24~25의 결론이면서 바리새인들의 지적에 더욱 가까운 답변이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귀신들의 결속을 더욱 분명히 하는 기록을 본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5; 눅11:26) 마귀 사탄일지라도 자신들에게 손해날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만이 당장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이 서기관들처럼 내뱉고 나중은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7) 앞선 두 가지의 비유는 서기관들의 비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오히려 사탄을 박멸하고 그 간악한 역할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사탄과 비교될 수 없는 권능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능력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이다. 이 비유도 평범한 비유이지만 마귀 사탄의 사악한 역사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놓임을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비유 속에서 강한 자는 사탄이라면 힘이 없어 세간을 강탈당하는 집 주인은 사탄에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고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세간을 지켜 주는 더 강한 자는 바로 사탄을 제압하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서기관들이 비방하고 모욕했던 귀신을 쫓아낸 것도 바로 이런 원리로 귀신의 왕을 힘 입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의 하신 일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이나 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주신이의 뜻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고난으로부터 자유 하는데 합당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비록 미쳤다는 오해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 속에 삶을 드리므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주님처럼 누리는…
바른 진리를 순종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영광을 위한 오해임을 확신하고 빛의 백성이라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진리나 생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절대적인 창조주의 권위를 위임받은 것에 합당하게 사람보다 강한 마귀 사탄을 복음으로 결박하여 삶을 강탈당하는 사람들을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에 주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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