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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4:3~8, 14~20 2026-10-18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갈릴리 바닷가 부근의 땅들이 비옥했다고 알려 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덕 위에 밭들이 있었을 것을 추측해 볼 수 있고 그 밭에서 실제로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을 가르키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물 교육을 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연을 소재로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일상적인 교육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도 그렇게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한 알의 씨의 죽고 삶에서 열매가 없을 것과 많을 것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러나 오늘의 비유는 그 주제와 방향이 분명히 다르다. 씨 자체에 대한 말씀이기 보다는 그 씨가 떨어질 토양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 반대의 의미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뿌리는 자의 행동을 들어 말씀하신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3)하시는데 이 씨뿌리는 자를 병행 구절인 마13:37에서는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라고 하심으로써 그 씨를 뿌리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말씀의 해설을 시작하시는 v14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하신 것처럼 병행구절인 눅8:11에서는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심으로써 전체적인 요지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영혼에 증거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비유하고 계시다.

오늘 읽은 비유 자체와 그 비유를 해설하시는 말씀을 함께 토양으로 비유되는 네 가지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각각 다룸으로 이 말씀을 소화해 보고자 한다. 주님께서 이미 완벽하게 해설해 주신 말씀을 다시 해설하는 것 자체가 황송하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더 가깝게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기 때문에 나누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씨는 이렇게 여려 곳에 뿌려지지만 우리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입장이라면 이왕에 옥토 같은 심령으로 받아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이 말씀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말씀 농사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Ⅰ. 길 가에 떨어진 씨(4, 15)

실제적으로 무슨 씨앗이든지 밭을 갈고 뿌리다 보면 그 일부는 밭과 밭 사이의 주로 농사를 위하여 사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 밖으로 나가 떨어지는 씨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 길일수록 굳어 있어서 거기에 떨어진 씨는 더 잘 보이고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경우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성지곡수원지에 잉어먹이를 준다고 건빵을 던지면 그것이 물이 아니라 길바닥에 떨어지면 비둘기나 까마귀들이 재빨리 주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새들들 건빵이 물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가로 채 가는 경우들도 더러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길바닥이 어떤 것인가 특히 이 씨가 다름 아닌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때는 더 안타까울 수 있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4) 씨는 반드시 흙에 덥혀야 싹을 틔우게 되어 있다. 신기한 것은 흙 위의 돌에 눌려진 씨앗은 돌 밑으로 싹이 터 나오지만 흑덩이에 눌린 씨앗은 싹이 나지 않아서 예전에 씨를 뿌릴 때는 반드시 길다란 나무 망치 같은 것으로 흙덩이를 부수는 일을 함께 하였다. 밭이 아니라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농부의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먹이를 찾는 새들의 눈에 쉽게 띄기 때문에 씨 뿌리는 밭 부근에는 새들도 이렇게 떨어진 씨로 자신들의 요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눅8: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라고 길에 떨어지면 지나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의 발에 밟힌다는 이야기를 첨가하고 있다. 마5:13에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하신 주님의 경계가 생각나는 말씀이다. 생명을 가진 씨앗이지만 길바닥 같이 굳은 마음에 떨어지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밟힘을 당한다는 의미를 겹쳐서 생각하게 된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 여기서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말씀을 좀더 해설하고 계시다. 싹을 틔우지 못하고 길 위에 덩그러니 던져져 있는 씨앗을 그것이 생명의 베아이기 때문에 사탄이 즉시 와서 뿌려진 말씀 즉, 들려진 말씀을 빼앗아 버린다는 설명을 주신다.

마가는 그 빼앗는 자가 사탄이라 했지만 마태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하였고 누가는 8:12b에서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라고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복잡할 것 없이 길 가와 같은 마음은 굳어진 마음이요 여러 부류의 것들이 지나가는 심령이다. 아무리 생명이 풍성한 생명의 말씀을 들을 지라도 굳어진 마음으로 모든 것을 허용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면 말씀을 빼앗기게 되어 있는 것은 악한 마귀 사탄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움 티우지 못하는 말씀은 새들처럼 신속히 채 가고 말기 때문에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묵을 땅을 갈아 엎으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는 말씀에 순종해야만 할 것이다.



Ⅱ. 돌밭에 떨어진 씨(5~6, 16~17)

적당한 자갈이 섞인 돌밭은 물 빠짐이 좋아 오히려 그런 토양에 잘 되는 식물들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병행되는 누가복음의 기록에 보는 대로 그냥 돌밭이 아니라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서 싹이 나기는 하였지만 바닥에 습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눅8:6)는 기록으로 볼 때 흙 심이 깊지 못한 바닥은 바위가 깔린 얕은 흙에 그나마 돌이 많이 섞여 있는 농토를 말하는 것으로 갈릴리 부근에는 이런 땅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이런 땅의 특징은 비가 와도 빨리 촉촉해지고 바닥에 바위가 깔려 있기 때문에 온도가 빨리 올라 싹을 틔우는 것은 다른 땅보다 빠르다.

그러한 모습을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5)라는 묘사이다. 그러나 반대로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6) 하는 것처럼 흙 심이 깊지 못한 바위 위이기 때문에 태양이 좀 오래 쪼이면 물기가 마르고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는 식물들은 쉽게 말라 죽고 마는 그런 땅이다. 이제 여기에 대한 주님의 해설이 이를 우리에게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6) 앞의 길 가에 뿌려진 씨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라는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설이다. 길 가에 뿌려졌을 경우에는 전혀 이러한 생명의 맛 조차도 보기 전에 그 생명의 씨앗을 빼앗기고 만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결과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행17:19)는 호기심과 함께 v21에는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이들의 특징은 기쁘게 잘 들었지만 그들이 수없이 들었던 다른 철학의 한 이론으로 들었을 뿐 나중에는 v32에 보는 대로 부활을 전하는 것을 듣자 어떤 사람은 조롱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을 보는데 이렇게 기쁘게 들었던 사람들 중에 겨우 몇 사람이 믿음을 가짐을 보게 된다.

즉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것은 다른 세상의 철학이나 도덕 강연 중의 하나로 들었다가 깊은 신앙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음을 팽개치는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7) 신앙의 깊은 체험을 가지고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못하면 견딜 수 없고 특히 믿음이란 말씀과 함께 성령을 의지하는 데까지 성숙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 이기 때문에 믿음의 깊은 뿌리를 세상이나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 쳐도 흔들림이 없는 나무처럼 든든히 서야 한다.

특히 믿음으로 인하여 생기게 되는 박해는 절대로 아무나 견딜 수 없다. 1세기에도 핍박의 철퇴가 내리칠 때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믿음을 벗어 던지고 육신의 안전을 택하게 된 일들을 역사속에서 충분히 보는 내용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음의 내용이 세상에서 불이익에 대한 내용이지만 어느 시대에나 믿음 생활로 유익을 기대하는 뿌리가 깊지 못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어떤 박해나 환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Ⅲ. 가시떨기에 떨어 진 씨(7, 18~19)

세번째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비록 나쁘지 않은 토양이지만 주변의 환경에 많은 장애를 느끼는 것들로 돌밭에 떨어진 씨의 성장의 장애가 주변적인 것이었다면 가시떨기는 오히려 스스로에 의한 내적인 문제들임을 이해하게 된다. 비유에서는 단순히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해설에서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계시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해설에서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2b)라고 마가와 같이 기록하지만 누가는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8:14b)라고 살아가는 동안의 염려를 좀 더 구체적인 해설을 기록하고 있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7) 세상적 영향으로 신앙적 가치를 흐리게 하므로 열매를 맺는 데까지는 자라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장애의 부분도 점진적인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역시 지혜로우신 절대 지성의 가르치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맨 첫 비유인 길가에 떨어진 씨는 밟히고 새들이 먹어버려서 싹도 틔우지 못하고 마는 안타까움이었다면 두번째 비유인 돌밭에 떨어진 씨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싹도 틔웠지만 뿌리가 깊지 못해서 자라지 못하고 끝났다. 이제 이 세번째 비유는 어느정도 자라는 데까지는 가능했지만 열매를 맺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끝나는 안타까움이다.

이미 가시가 자라고 있는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미 뿌려져 있던 그 가시가 함께 질식시키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데까지 자라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보리나 밀밭에 함께 자라는 귀리가 심은 곡식들보다 더 왕성하게 자라고 키가 커서 많은 소출을 방해하게 됨을 본다. 논에도 마찬가지로 피를 잘 뽑아주지 않으면 벼보다 더 키가 크게 왕성히 자라서 역시 벼 이삭의 소출을 많이 감소시키게 되는 과거의 농사에서 더러 봐왔던 일들이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18) 비유와 별 차이가 없지만 비유 자체에서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를 말씀하셨다면 해설에서는 이 떨어진 씨가 바로 말씀임을 확인하고 “떨어지매”는 “말씀을 듣기는 하되”라고 설명하신다.

진정한 해설은 v19에 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9) 여기서는 자라고 결실을 막는 가시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해설하신다. 같은 병행구절인 눅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라고 같은 내용이지만 보충적인 기록을 주고 있다.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과 다름이 없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주로 여기 3가지의 유혹을 가시떨기로 해설하시는데 현실의 삶에 대한 염려, 재물(富)에 대한 욕심 그리고 이 땅에서의 향락의 유혹들로 신앙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받는 약속보다는 주로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언약들이다. 사람은 항상 급하고 빨리 이루고 싶어하는 육적인 욕구를 대부분 다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영광스럽고 자유스러운 사람들을 부러워하다 보면 미래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 막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쉽게 받게 된다. 이 3가지 모두는 언제나 신앙의 장애요소들로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특히 바울을 통한 경계에서 자주 거론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에 어떤 것도 염려하지 말 것을 믿음의 사람들에게 당부하셨다(마6:25~34 먹는 것, 입는 것, 키 크는 것).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하였고 베드로 역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확인해 주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했고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장애요소가 됨을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고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을 보면 이 우리 주님의 비유는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삶의 모습 속에서는 절대로 믿음의 열매를 맺는 데까지 신앙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Ⅳ. 좋은 땅에 뿌려 진 씨(8, 20)

마지막으로는 바람직한 옥토 같은 마음 밭을 비유하는데 결과는 기대되지만 이런 자세의 삶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땅은 가만 묵혀두어도 굳어지고 거칠어져서 곡식을 갈기 위해서는 앞에서 인용했던 호10:12의 말씀처럼 수시로 갈아엎지 않으면 곡식의 싹을 틔우고 자라고 열매 맺는 옥토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비유나 해설이나 사실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비유에서는 “무성하여”라는 말이 또 다른 이해를 할 수 있게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잎이 무성하여 그 모습을 볼 때는 분명히 과실이 풍부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열매 없는 무성함으로 끝날 수도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경계하신 바 있다.

이 마가복음 11장에 보면(마21:18~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성전으로 들어 가시다가 v13에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새) 그때는 무화과 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말라 죽었다. 그런 이유에서 “무성하여”만으로는 믿음에 온전치 못하다. 무성하여는→ 반드시 결실하여로 가야 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이 기록의 톡특성은 마태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기록하는 반면에 누가는 이 결실의 배율을 생략하고 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8) 우리 주님께서도 생명의 씨앗인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지길 바라시고 아니 말씀을 받는 마음 밭이 옥토인지 박토인지도 사람은 모르지만 이미 아실 것이다.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결실하였으니[ἐδίδου καρπὸν, 미완료 능동태]”라는 표현으로 쓰여진 시제가 열매를 한번 맺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면 그 결실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영적인 결실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은 비록 이 열매 맺은 결과를 말씀하고 있지만 이 결과에 집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있어지는 이 세상에서의 유혹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열매를 결실하게 된다는 신앙의 도전에 대한 긴장감이다. 믿음 생활은 끊임없는 이 세상에서의 도전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수 없는 도전을 이기고 열매를 맺는데까지 장성하는 것이다.

요즘은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 비율이 큰 것이 아니지만 이 글이 쓰여지는 시기의 농법기술로는 이 비율이 결코 적지 않은 풍성한 비율이다. 그렇지만 꼭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만이 칭찬 듣는 것이 아니라 열 배나 스무 배도 책망받을 결실은 아니다. (마25장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칭찬을 받았다. v22) 아브라함은 소돔성에서 열 명의 의인을 인하여 형벌을 하시지 않기를 원하였지만 불가능했던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역시 이 마지막 아름다운 비유도 생명 없는 뿌려진 씨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씨앗을 절대로 길가와 같이 옆으로 흘려듣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그것은 다만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들을 때만 기쁘게 듣고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어려움이나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이 믿음으로 승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사는 염려나 육신의 재물과 건강, 이 땅에서 영광스럽고자 하는 유혹에 이끌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가볍게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왕에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옥토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들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은혜에 합당하도록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맺는 믿음 생활이 되어야겠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갑절의 결실이라도 맺도록 수시로 마음 받을 갈아엎는 영적인 도전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