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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1:14~17 2002-07-15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 역시 수없이 들어온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과 우리 각자의 관계 속에서 주님을 생각해 보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고백만큼 나의 삶의 왕좌의 자리에다 모시고 있는가를 한번 다시 확인했으면 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귀한 존재로 계시는가 이것은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인되어야 하는 귀중한 과제이다. 적어도 나와 주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들어 주님보다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찬밥 신세를 느낄 정도로 대우하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오셔서 "네가 이 사람(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다면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인가. 우리가 "주여!"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영광을 주님께 돌리기는커녕 주님께서 나의 생의 뒷자리에서 서운함을 느끼게 해드린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主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곧 잘 입술로는 [102:2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라고 찬양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는, 마치 어린아이 취급을 항 때가 많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물으신다면 나는 과연 무어라고 답변할 수 있겠는가?



Ⅰ.이 질문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물으신 질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시도했고 그러나 철저하게 실패했다. 자신의 앞날을 염려한 나머지 주님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벗어 난 것이고 첫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며 실패의 출발이었다. 그러므로 그 밤에 고기를 잡아 만선이 되었어도 주님께서 오셔서 같은 질문을 던지셨을 것이다.

신앙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행해지는 것들은 어떤 결과와 상관없이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인생에게 주님께서 다시 찾아 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더러 생기면 과거의 결심과 상관없이 마구 마음이 흔들리기 쉬움을 본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한 한 모두 실패한 인생들임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러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판단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보이는 면에서 사회 모든 사람들보다 성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성공은 이미 의미가 없으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성공과 실패의 바른 판단은 가능할 것이다. 누가복음 12:16~21의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자신의 일에 돌아가 밤새 헛수고를 한 베드로도 실패했지만 쌓을 곳이 없어 창고를 헐고 다시 짓는 하나님을 배제시킨 부자도 실패한 인생에 있어서 꼭 같다.



Ⅱ.이 질문은 오늘 나에게 묻고 계신 질문이다.

디베랴 바닷가에 동트는 시간에 찾아 오셔서 베드로를 찾아와 물으셨던 주님은 이 역사의 어둠이 끝 나가는 이 역사의 현장 속에 베드로와 동일 한 모습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대우하고 있는 나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계신다.

성경의 모든 교훈은 그 당시의 대상이 누구였든지 오늘은 이 자리에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교훈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의 말씀들조차도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읽게 된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고전9:9~10f)

그러므로 동트는 아침에 베드로를 찾아가 연거푸 물으신 것은 오늘 바로 나를 앞에 두고 묻고 계신 질문이다. 주님께서 오늘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동일한 질문을 주고 계신다. "( )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실 베드로는 당시에 우리보다 무지한 상태에서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와 우리의 결정과 고백의 모든 것들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오늘 과연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우리 각자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 바란다. 여기에서 만약에 베드로 처럼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이다.



Ⅲ.나에게 예수는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가?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진실 해 질 필요가 있다. 예수는 나의 인생의 우선 순위에서 몇 번째인가?

나의 다급할 때면 언제나 뒤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하셨을 때 "이 사람들보다"[ ( 의 남성, 중성 복수 소유격) (사람이거나 사물)이들, 이것들 of these]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통틀어 비교하고 계시는 의미이다.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이러한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비록 한 때나마 주님을 떠나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해보려다가 실패하여 면목이 없었지만 거침없이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과 다니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통해서 주신 十誡命 가운데서도 하나님 다음으로 귀중한 존재가 부모임을 못박으셨지만 그 귀중한 부모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나 딸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면 기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들은 다 배제하고 예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지 않는가? 다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이고 이것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세상의 것들 때문에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은가? 부모나 자녀보다도 못한 것들 때문에도 주님을 곧잘 외면할 때가 많다.

늘 "이것만 해 놓고…" 라고 하면서 밀고, 밀리고 해서 내 인생의 맨 뒷줄에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는가?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하찮은 존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적어도 자신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지불하시고 영원히 죽을 형벌과 절망에서 나를 구원해 내셨다. 오늘 요한 사도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고 기록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66:2 세상 헛된 신과 영화 모두 내어 버렸네,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3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계획 맨 뒤에 주님을 두며, 조금만 나에게 바쁘거나 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신간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계신 것이다.



Ⅳ.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의 자리에 모셔야 한다.

우리 각자에게 시간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은 언제나 나의 인생에 영순위로 계셔야 한다.

주님을 제일로 대우하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존귀함을 받을 것이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주님이 때로 필요할 때만 심부름 쎈타의 용역회사 직원처럼 불러지는 그러한 분으로 대우하다가 이 세상이 마지막이 되었을 때 떳떳이 "주 예수여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사람들에게도 잘 대해 주지 못하던 사람에게는 부탁이 있을 때 자신 있게 찾아가지 못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오히려 어린 아이 취급을 할 때가 많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다.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의 자리를 내드릴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Ⅴ.결론.

많은 믿음의 가정들의 액자 속에 성경 말씀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고 되어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상당히 모순된 표현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는 어떤 일들에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간에 먼저 주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로 계시는가가 점검되어져야 한다. 주님 없이 이루는 어떤 영광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어떤 인생의 과제이든지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성공한 결과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답변을 드릴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일보다도 우선적으로 나의 인생의 자리를 드려야할 대상이다. 만약에 어떤 일 때문에 주님을 등한히 여긴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 있어서 그 일만도 못한 존재냐?"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서운하게 해도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에 주님을 서운하게 해드리는 일은 더욱 없어야 한다.

주님은 나의 인생의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주신 분이시다. 믿는가?

언제나 우리는 신앙의 귀중한 부분을 깨닫고 행하는데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곤 하는데 역시 주의 해야할 잘못된 자세다.

언제나 주님을 뒷전에 세워 둔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우리의 영원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인생의 가장 귀중한 자리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위치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주님은 과연 나의 가장 좋은 자리와 모든 계획에 우선 순위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가? 여기에 자신 있게 아멘 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