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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당부하시기를 "거룩하라!,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너무 심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계속 비틀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하셨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18:13)는 명령을 주셨다. 히브리서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5:2)고 평하고 있는 율법 속의 제사장들에게 '완전'을 주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헌장이라고 일컫는 산상 보훈을 말씀하시는 첫 단락의 마지막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오늘 읽은 말씀 자체도 우리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부담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44~45f] 주님은 조금도 양보치 않으시고 "너희도 온전하라!"고 못박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당시의 제자들에게나 주신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온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믿는가?' - 여기에서는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아멘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마무리 할 때 여러분 모두는 다 확실히 아멘이 될 것이다.
Ⅰ.사람이 완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11:44~45)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을 중보하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레21:8, 21:15, 22:16)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 불완전 투성이요 스스로의 미래를 책임질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성경은 이미 선언하기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하였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이미 가련한 인간 군상을 평가하고 있다.
범죄한 인간이 자의 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완벽하거나 거룩할 수 없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바른 평가다. 욥기서에서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4~6)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을 향하여 "너희는 온전하라!, 너희는 거룩하라!"고 억지를 쓰시고 계시단 말인가?
Ⅱ.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은 이제 이렇게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자인 당신은 온전한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전하라거나 거룩하라는 말씀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신 것이라고 믿어야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며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으로 우리는 온전할 수 있다. '이점을 여러분은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한번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시다. 만약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다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가능하도록 역사 하셨다.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하시던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신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응답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평가하여 이르기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우리)는 몇%나 완전할 수 있는가?' 아니 '완전'이라는 말 자체가 100% 일 때만 쓰여야 옳다.
Ⅲ.온전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구약 적인 표현은 [tameem (문자적 상징적, 또는 도덕적으로)온전한, 진실, 흠 없는, 완전한, 성실, 건전한, 점 없는, 순결한, 올바(른, 르게)] 이고, 신약에서는 [teleios 완전한(노동, 성장,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다양한 적용에 있어서) 온전한, perfect, complete. (이 낱말은 "결과, 나중, 마지막, 종말"을 의미하는 'telos'에서 왔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고전2:6)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
그러므로 온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산 결과요 100% 완전이다.
Ⅳ.오늘 우리에게 완전 하라는 명령은?
사람이 완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느냐 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 나의 삶에는 신앙이 몇 %나 지배하나? 30%, 50%, 70%? 어떤 사람은 교회 올 때만 주님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20%도 주님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1.나(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100%)을 주님께서 지배하실 때 우리는 완전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먹고 마시는 일, 건강, 가정, 직장, 학교, 오락, 휴식, 인간 관계, 장래의 계획,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은 100% 주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우리 삶을 100% 지배받을 때 완전할 수 있다. 여기에 있어서도 주님은 언제나 모범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받아들인 모범을 보이셨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2.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때 자신이 완전해 진다.
앞의 말씀과 비슷한 것 같지만 우리는 언제나 완전히 순종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질에서는 순종하면서도 교육에서는 세상의 다른 불신자들을 두려워해서 완전히 순종 못하고 예배는 빠지지 않고 온전하면서도 경제에 대해서는 온전히 순종치 못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다른 말로 온전히 맡긴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 주님께 맡기기에 불안한 거이나 아까운 것이 있는가?(갓 결혼한 아름다운 아내조차도 맡길 수 있어야 그 아름다운 아내를 하나님께서 나의 것으로 지켜 주신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온전케 하실 수 있다.
3.하찮은 것들이 모여서 완전을 이룬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되고 빗방울이 모여서 홍수를 이룬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찮게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는 작은 부분이 오히려 중요할 수 있다. 주님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는 말씀은 여기에서도 중요하다. 특히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더욱 그렇다. 언제나 큰 것은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곧잘 "이것은 작은 거니까" 라거나 "다음부터" 라고 미루게 되는데 대단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의 무시해 버리기 쉬운 작은 부분에서부터 영적으로 잡혀져 가야 한다.
Ⅴ.결론.
주님께서는 나(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의 다스림 속에 둘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할 수 있고 주님과 매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 자신이 온전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맡기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100%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며 힘겨워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 일을 나에게로 가져와라!, 아니 너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에게로 가져와라! 온전히 내게 맡겨 보아라!"
죄로 인하여 절대로 온전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해서 복음으로만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매일 매 순간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내가 온전해야 되는데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늘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물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 인생을 향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19:21) 하셨다. 광야에서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도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온전히 드렸을 때 모두가 풍족하게 먹고 남았던 것처럼, 하찮은 내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면 그리스도께서는 풍족하고 만족한 인생으로 우리 모두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내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삶이다. 모든 상황에서 나를 부정하고 주님을 세우며, 나는 종의 자리로 내려앉고 주님을 나의 주인의 자리에 온전히 모시는 것은 누구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온전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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