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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범사에 기한과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 “…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3:3b) 라고 가르친다. 어떤 경우에 분명히 허물어 진 것들을 반드시 다시 쌓아야 할 때가 있다. 홍수에 무너진 제방과 엘리야처럼 “…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 하”(왕상18:30)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헤이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다시 쌓아야할 과제이며 그 중에서도 허물어져 버린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다시 쌓아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 아닌 우상이나 거짓된 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더럽히고 죄와 타협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까닭에 반드시 헐어야만 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앙에 경성하는 신앙의 지도자들이 헐어버린 그 우상의 제단을 다음 세대에 어김없이 다시 세우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자주 자주 읽게 된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가장 완벽하게 회복했던 히스기야의 전무후무한 신앙회복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싫어 하셨고 자신의 아버지가 헐어버렸던 우상의 제단을 다시 세우는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을 열왕기하 21:3에서 보게 된다.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대하33:3)
그리고 바로 이어 요시아가 다시 쌓은 이 우상의 전각들과 도구들을 헐고 회복 시켜 놓자 그 뒤의 악한 왕들이 다시 쌓는 어리석음으로 마침내 멸망해 버리고 마는 것을 본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을 헐어 버리고 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어리석음을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흐리며 버렸던 세상의 악습들을 처음 감격이 희미해 질 때면 다시 찾는 추한 모습을 더러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고 한탄하신다. 때로는 신앙의 새로운 계기들(사경회, 수련회, 기도회 등등)을 통해서 깨닫고 헐어 버린 악습들을 또다시 쌓기 시작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다시 쌓지 말고 반드시 헐어 버려야 될 신앙의 악습들을 오늘 바울은 말하면서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는 바로 지난 달 많은 것을 헐고 주님의 은혜와 약속을 다시 세워야겠다고 각오하고 다짐 했었다. 오늘 우리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살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우리 각자의 신앙들을 점검했으면 한다.
Ⅰ.죄의 담을 다시 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죄의 담을 자신의 십자가로 허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시간이 가면서 처음에 주님의 십자가로 헐린 죄의 담의 감격을 이제는 점점 나 자신이 쌓아 올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다.
①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를 범치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죄를 물리칠 수가 없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말해 주셨으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과 성령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죄의 유혹을 당할 때마다 신앙에 더욱더 열심을 쏟고 그리스도인 됨을 선언하고 사는 것이 죄를 보다 효과적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다.
②수시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삶 속에 쌓지 않아도 좋은 것은 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장벽을 다시 쌓게 하는 사탄의 유혹과 우리 약한 죄성 때문에 늘 낙심할 때 가 많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우리 인간의 척도로는 계산되어 질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약속은 우리 삶에 죄의 장벽을 다시 쌓지 않아도 되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면 미룰 필요 없이 주님 앞에 자백하여 사죄를 받는 감격과 은혜도 믿음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선하신 약속이다.
③십자가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약함은 다른 말로는 십자가를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문제가 되어지지 않는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여기에서도 귀감이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f) 찬340: 1.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2.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를 믿은 나의 맘을 그의 피에 적시네
3.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 버리네, 안위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4.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무궁 지나도록 함께 게시리로다
(후렴)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아멘
십자가는 우리의 일생에 의하며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이다.
Ⅱ.죄악 된 인간적 전통을 무너뜨려야 한다.(16~17, 1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어떤 계율을 지키는 어떤 것으로도 승리할 수 없음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날 신앙의 많은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르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전통들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은 와전한 구원의 약속이고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생명의 약속이다.
안타깝게도 유약한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전통과 대치가 될 때는 그 썩어 없어질 초등학문에 우려를 갖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8~11)
신앙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경의 약속이 아니면 반드시 헐어버려야 할 과제들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너무나 약하다.
Ⅲ.허물어 버린 종교적 전통을 다시 쌓아 올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①율법의 전통을 다시 세워서는 안 된다.
②성경을 거역하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유 해야 한다.
③사람들의 눈치 보다는 하나님의 의향을 의식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
Ⅳ.나 자신을 높이 올리는 죄를 무너뜨려야 한다.(16~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역시 바울사도의 실질적인 고백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나 자신의 무력함과 추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으로 인하여 오히려 나 자신을 높이려는 사악한 되를 저지를 수 있다. “내가 믿음 생활을 잘 하기 때문에 이 만큼 복을 주셨지...”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의에 대하여 무력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을 받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들이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 위에 쌓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은혜 받는 자들을 향하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주를 믿고 은혜를 입어 모든 것이 좋아 질 때 우리는 경계를 받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나를 세우려는 어떠한 의도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Ⅴ.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흘리심은 높이 쌓아 올려야 한다.(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①나 자신의 삶의 자리에...
②교회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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