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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무죄한 이란 좋은 삭개오는 그 많은 재산가요 보장된 경제권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족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만족한 삶을 살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영적인 보장이 없는 재산의 축적이 곧 행복이 아니었음을 본다.
최고의 재산가요 권력가라고 자부했던 솔로몬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2:22~24)고 고백하고 있음을 듣는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심의 모습과 삭개오의 주님을 만남으로 오는 변화를 통해서 오늘 우리 각자가 주님을 모심에 대한 확신과 감격을 확인했으면 한다.
Ⅰ.주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보여 주는 것들.
우리는 먼저 여기서 주님의 부르심의 모습을 본다.
1.그가 부자이거나 세무서장이기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좋은 조건 때문에 더 사랑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빈곤한 사람이었다.
2.그의 약점들 때문에 부르신 것도 아니다.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 예수를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러한 약점 때문에 그를 부르시거나 찾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기준은 보이는 기준에서 좋은 조건이거나 불리한 조건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약한 자이기 때문에 특권을 주시지 않는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출23:3)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19:15)
3.그의 영적인 갈증과 순종을 보셨다.(3~4)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우리는 이러한 삭개오를 상상할라치면 옛날 시장터에서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볼거리가 있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고 옆의 나무나 전신주에 기대서 구경하던 모습이 상상이 된다.
①그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 찾았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4:2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삭개오는 비록 쌓아 놓기는 했지만 그의 재물을 사모하지 않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오늘도 하나님은 주님을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②그는 자신의 체면 유지보다도 주님을 만나는 것을 우선했다.
“…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데는 장애물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의 키가 얼마나 작았는지 모르지만 평지에 서면 먼 곳에서조차 주님을 잘 뵐 수 없는 신체적 약점을 극복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대하려 할 때 언제나 겪는 장애는 언제나 자신의 육체가 장애가 된다. 우리가 영적인 일을 감당하려면(가령 기도회를 하거나 구역 모임조차도) 피곤해서, 힘겨워서, 잠이 와서, 다른 일로 바빠서…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하고라야 주님의 은혜를 보다 가까이 누리게 될 것이다.
③채면을 극복했다. 그는 작은 체구 중년의 위신을 생각지 않고 돌 무화과나무에 그것도 사람을 보기 위해 올라간 것이다. 사실 야생 무화과나무는 사람이 올라가 안심할 만한 견고한 나무도 안다. 사람들의 보기에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을 생각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자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사람도 의식치 않았다. 사람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샌지 자존심 상하면 아무것도 안하려고 한다. 심지어 한번 자존심 상한 교회는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존심은 구원을 거부하기까지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서는 가장 나쁜 적이 자존심임을 알아야 한다.
④예수께서 자기를 바라봐 주리라는 작은 기대도 없는 상황이었다. “…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어쩌면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이런 시도를 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약속하신다. 본래는 주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34:11~12)
주님을 보아야겠다는 오직 하나의 기대 그 기대가 주님을 불러 세웠다.
오늘도 삭개오 같은 간절함이 있는 사람들은 좀더 가까이 만나 주실 것이다.
Ⅱ.주님께서 그를 찾으셨다.(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비록 그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1.주님께서 그를 보셨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하는 하나의 일념으로 그것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삭개오를 올려다보셨다. 하나님이 보시면 만사 해결이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2.부르셨다.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예수께서는 이미 이러한 삭개오의 심중을 읽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삭개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그를 부르실 때가 되었음을 아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여기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시는 명령에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위험한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안타까워서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주님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세상의 높은 지위와 위치가 주님을 가까이 모실 수 없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마치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뵙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는 명령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하여 교만한 마음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부르시고 계실 수도 있다.
3.예수그리스도의 첫 번째 부탁.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거처를 함께 하고 싶어 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의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사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셨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예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를 거쳐 삼기를 원하신다. 우리 각자의 마음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함께 거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 이전에 그분과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이다. 주님께 우리 몸과 마음과 집과 인생을 모두 내어 놓을 때 주님께서 가장 좋고 아름답게 우리의 삶을 주장하여 주실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말씀하신다.
Ⅲ.주님을 모신 것에 대해 주위의 반응을 본다.(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비웃었다.
[수군거리다, diagogguvzw; diagonggyzo] 모두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2)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이었다. 특히 과거 예수를 만나기전의 상태를 가지고 더 수군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를 모시고 판단하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저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박수를 보내지만 세상은 결코 축하해 주지 않는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그러므로 세상의 반응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하셨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15:1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씻으시고 용서하시고 받으신다. 삭개오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저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했다. “…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어두움에 하수인이 된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7:7) 그러므로 구원 받은 것에 대한 시샘과 원망은 마귀의 하수인들의 모습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러나 역시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필요가 있다.
Ⅳ.주님을 만난 삭개오의 삶의 변화들.(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1.빼앗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이 되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가치가 변했다. 예전에는 돈과 재산에서 주님을 만나고는 사람으로, 무엇이 귀중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변화된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고 있다.
2.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출22:1) 율법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삭개오는 이제 율법을 지키겠다고 각오하고 고백한다. 자연인 즉, 죄인은 율법을 의식할 수도 없고 지키지도 못하지만 주님을 만나 회복된 삶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Ⅴ.오늘 나의 주님을 영접한 모습은…?(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것은 적어도 주님의 평가이다. 삭개오의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지 주님은 세상을 향해 선언 하신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던 바울의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남 삭개오와 그의 집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에 주님께서 선언하시는 모습이어야 한다. 구원은 분명히 은혜(선물)로 받지만 구원 받은 자의 삶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 각자가 구원 받은 모습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삭개오를 향하여 선언 하셨던 말씀의 소리 없는 선언인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선언이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으로 선언되어 지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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