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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요 2:1~11 2002-11-04
예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요한 복음에서는 그 수없이 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사에 구원의 메시아로 오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진 7 표적을 소개하면서 요한 나름대로 그 표적의 깊은 의미와 결과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그 이유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그 정선된 표적 중에서도 그 첫 번째의 가나 혼인 잔치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흥을 잃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기쁨을 찾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귀중한 목적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앞으로 올해의 남은 시간동안 이 일곱 표적을 중심해서 우리 각자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습들을 점검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해에 은혜에 합당한 신앙의 계획들을 세웠으면 한다.

맛을 잃어버린 인생, 그것이 죄 아래 태어나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이다. 과학과 지식은 발달하여 편리하고 풍요한 육신의 삶이 되었지만 오히려 이 시대는 많은 행복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Ⅰ.잔치는 많으나 기쁨이 없다.(1~3)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님 당시에 그랬듯이 옛날 우리의 농경 사회에서는 잔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린 유아 사망률이 높다보니 100일 기념식이나 첫돌의 잔치도 흔치 않았다. 60세를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회갑연(回甲宴)도 자주 있는 행사는 아니었다. 고희(古稀)는 더욱 드물고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결혼 예식 또한 참으로 일생에 한번 하는 귀한 인생의 전환기로 동네 사람들의 축하를 받기에 충분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경사스러운 일이 길어지기를 원해서 긴 음식 국수는 반드시 함께 먹었다. 다소 미신적이긴 해도 풍족하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참으로 단순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잔치는 흔해 지고 다양해지고 이벤트(event) 화 되어가고 있다.

1.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의도된 잔치는 늘어갈 것이다.

요즘은 점포 하나를 개업(開業)해도 요란하게 한다.

회갑연이나 결혼 예식을 위해서 전문 이벤트 회사에 의뢰를 하고, 가족끼리 노래방엘 가고 외식을 하는 모든 것은 사실 다 기쁨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도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쓰디쓴 뒤 얘기만 무성한 상처로 끝나는 예가 많다. 결국 사람들은 요란한 것 풍요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작은 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잔치는 많으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점점 실감되어져 가는 것이다.

2.거래가 되어가기 때문에 기쁘지 않다.

옛날의 잔치는 물질보다는 품앗이였었고 그 고달픈 몸으로 수고하면서도 기쁨은 더 풍성했었다. 그러나 요즘의 모든 잔치는 부조금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너무나 관례화(慣例化) 되어버려서 봄가을이면 가계 재정에 문제가 생길 정도이다. 그것은 기쁨과 감격이 있는 잔치라기보다는 또 다른 상거래가 되고 있다. 의무를 가지고 가야하고 다음 자신의 행사를 계산하고 참여하는 잔치는 그만큼 흥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품앗이 같이 보이지만 물질적인 거래만으로는 결코 잔치는 흥이 나지 않는 것이고 이것조차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만 기쁨의 나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도 자칫 그런 일반적인 혼인예식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다.

3.우리 모두의 죄성 때문에 기쁨에 대해 너무나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죄의 습성을 가진 인간의 육체는 도무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밑 없는 구덩이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도 한 두끼를 먹고 나면 더 이상 특별한 맛을 갖지 못하는, 그래서 또 다른 맛있는 음식을 찾아야 되는 간사한 것이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놀이도 마찬가지다. 개임이나 영화가 점점 잔인한 표현을 해 가는 이유들도 다 이 때문이다. 도무지 한가지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한 것이라서 바울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거기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고 당부하고 있다. 죄의 도구인 육체는 도무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의 기쁨도 진정으로 함께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Ⅱ.죄는 우리 모든 인류로부터 기쁨을 도적질해 갔다.

죄는 희락(喜樂)이라는 의미의 에덴에서부터 기쁨과 교제를 앗아갔다.

죄는 우리 인생의 모든 환희를 쓰디쓴 눈물로 바꿔 버렸다. 기쁨으로 웃고 노래하던 삶을 수치와 슬픔과 고난으로 바꿔버린 것이 바로 죄라는 무서운 저주의 결과다.

1.죄는 자기 자신만을 제일로 여기는 독선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게 한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언제나 나 자신만을 섬기게 하고 하나님이나 남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간증하고 있는 작은 진리이다.

사람은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앙이란 바로 그 잃어버렸던 기쁨을 찾아주는 것이다. 나만을 알던 자리에서 상대를 위한 배려로 눈을 띄워 주는 것도 신앙이다. 나의 입장에서 남의 입장으로 관점을 옮기는 것이 신앙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실천하시며 모범을 보이셨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고 나눔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일찍이 솔로몬이 깨닫고 가르치기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죄는 나눔으로 커지는 기쁨을 서로의 관계 속에서 확산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아 버리는 무서운 우리의 적이다.

2.죄는 서로의 관계를 망쳐 버리기 때문에 기쁨의 확산을 차단한다.

기쁨과 행복은 반드시 나눔 속에서 커지고 메아리로 오래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서의 기쁨, 그것은 적을 수밖에 없고 짧을 수밖에 없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복을 잃어버리면서 에덴을 나와야 했다.



Ⅲ.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기쁨을 찾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4~10)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많은 세상의 기쁨을 포기하고 참으로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너무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따분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다.

바울 사도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조금 더 진행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모두 친히 십자가에서 져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은 거듭난 삶 자체에 감격하고 찬양하게되는 것이다.

분명 주님께서는 그를 예배하는 모든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모든 행위는 감격으로 시작하고 감격으로 지속되며 그러한 구체적인 믿음의 행위가 표면적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내면의 기쁨은 세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계속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주님께서 선언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7~요7:38)

그러므로 믿음 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분명히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1.기쁨의 도구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6~7)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 흥을 잃어버린 혼인 잔치의 가정에 주님께서 계셨다는 것이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기쁨을 찾아 주시는데 사용하신 도구는 유대 사회에서 아주 흔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귀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로 주님과의 교제만 있다면 지극히 적은 것에도 감격할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구원의 은총이 선물로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여진다면 모든 것은 감격이 될 것이다.

기쁨을 찾아 주시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는 항상 급하기만 하다. 때로는 우리가 당장 기쁨을 갖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어린아이들처럼 칭얼댈 때도 있다. 그러나 기쁨도 각자에게 허락한 때가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2.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채워졌다.(5, 8)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주님께서 넘치는 기쁨을 주셔도 순종이 없이는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3.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언제나 최고이다.(9~10)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세상의 잔치는 언제나 최고에서 못한 쪽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적이다. 좋은 음식과 술을 내다가 취하면 못한 것을 내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고 세상 유희를 위한 술집 같은 데서는 술 취한 손님들에게는 싸구려 술을 비싼 술로 속여서 파는 일은 다반사(茶飯事)가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언제나 점점 더 행복해지게 되어 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점점 나아 갈수록 천국의 기쁨은 점점 상승되어지게 되어 있다.

4.무엇보다 이 표적은 믿음을 주었다.(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중요한 것은 이 표적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이다.



Ⅳ.결론.

인간의 유희와 흥겨움을 위해 준비된 잔치, 그러나 그 기쁨이 깨어지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수단은 한계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다시 기쁨과 만족을 찾아주는 의미 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 주님은 행복의 문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다윗의 고백인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3)는 시든 영혼에 기쁨을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아직도 지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갈등하고 고민하며 인생을 저주하는 자들을 향하여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인생에 기쁨을 찾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기쁨을 가로막는 죄를 십자가로 해결하셨다. 오늘도 주님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에 나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신다. 이미 잔치는 준비되어 있다.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14:17) 이것은 앞뒤를 계산해보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순종으로 임하면 나눌 수 있다. 이 초청에 부끄러움이 없는 나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