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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이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시달려온 적이 있다면 바로 질병일 것이다. 또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질병으로 인하여 주어진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특히 성경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죄에다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마 9:2. 막 2:5; 눅5:20; 요9:2,34; 약5:15) 이 말은 또한 질병을 오래 가진 자는 죄가 많은 자로 지목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의인시하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더욱 외면 당했음이 당연했을 것이다. 따라서 죄의 해결이 곧 질병의 치료와 연결된다고 보아지는 것이다.(마9:5; 막2:9; 눅5:23) 또한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의 동함을 기다리던 38년된 환자처럼 장기적인 치병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간의 치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치료보다는 환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한계를 드러내지만, 우리 몸을 지으신 하나님은 근원적인 치료로 영과 육이 완전히 치료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세 번째의 이적은 긍휼에 무궁하신 하나님, 회개를 기다리시고 탕자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참고 참으시는, 불쌍히 여기심의 극치를 가지신 하나님의 속성을 실감하게 하는 동시에 죄에 신음하는 인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연민하시며 그 불쌍히 여기심을 의지하여 아무리 죄와 질병의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Ⅰ.죄와 더불어 가장 구체적으로 인간을 괴롭혀 온 것은 질병이다.(1~3)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1.축제에서도 소외되는 것은 언제나 지체가 부자유한 자들이다.(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유대인들도 축제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일년에 세 절기는 꼭 예루살렘에 올라가 농사나 목축에서 생기는 피곤과 지루함을 축제를 통해서 소화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축제는 기쁨으로 충만했고 이것은 타국에서 이국의 설움을 달래던 흩어졌던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축제의 뒤편에는 치료되지 못한 질병과 함께 한 서린 푸념과 설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모여 있던 곳이 바로 베데스다였던 것이다.
2.종교라는 이름 속에도, 영광과 기쁨의 도성도 온갖 질병으로 인한 환자만이 즐비해 가는 것이 이 비극의 역사이다.(2~3)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베데스다”는 ‘친절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이 ‘베데스다’ 라는 못은 “양의 문”이라는 성문 곁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축제와 이름뿐인 “친절의 집” 그리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드나드는 양의 문, 이 모든 것들은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정작 그것이 절실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시온”이라는 최고의 성지,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도 이런 절망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꼭 같은 비극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3.오랜 질병은 사람을 더욱 약하게 하고 막연한 기대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만든다.(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럼으로 질병도 육신 적으로만 이해하면 분명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만 이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낫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까지 한다.
4.오랜 질병은 원망만을 키우게 된다.(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말속에는 원망과 시기가 들어 있음을 본다.
(1)오랜 질병은 주변 사람들의 인내와 긍휼을 바닥나게 한다.
처음에는 “그 사람 참 안됐다!” “어서 낳으시오!” 등등 위로하고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귀찮게 여기고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가족이건 이웃이건 다 그렇다. 옛 속담에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것이 알량스런 우리 사람의 긍휼이다.
(2)당사자도 감사를 잃게 만든다.
이 사람은 자신을 못에 넣어 주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원망하고 자신보다 먼저 못에 내려가는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
①자기 운명을 저주하고
②이웃을 원망하고
③하늘을 원망하고
5.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린 절망의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이시다.(5~6)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38년이라는 긴 중풍, 옆에는 돌볼 사람 하나 없는 가련한 인생, 오로지 요행 하나를 바라고 운명을 저주하며 누워 있는 버려진 인생과 같은 그러한 자들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찾아서 오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 눅5:31)
Ⅱ.무궁하신 주님의 긍휼만이 죄인들을 죽음과 죄와 질병에서 구원하신다.(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예수 그리스도 만이 모든 절망의 유일한 해결책이시다.(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의 중풍병이 주님께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으셨음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절망을 하나님께로 들고 가야만 한다.
2.그러나 역시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만 긍휼은 효력을 발휘한다.(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주님은 이 사건 속에서도 인간의 믿음과 함께 일하심을 보게 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는 응답은 그 상황에 있어서 놀라운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먼저 물에 넣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으로 미루어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인데도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그에게서 표적을 경험 할 수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3.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긍휼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기와 이권이 있는 자는 돌아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외면하는 것이 알량한 인간에 있어서의 긍휼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무한하신 분으로 상대적인 인간의 긍휼에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긍휼을 가지신 분이다. 주님은 항상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을 먼저 찾으셨다.
(1)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긍휼이다.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2)오늘 우리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무한하신 긍휼 때문이다.
예레미야애가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결코 우리가, 내가 훌륭해서 은혜아래 계속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수시로 고백해야 할 것이다.
시편 78:38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렘3:12)
4.은혜의 역사조차도 죄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9ff)
(1)참으로 비극적이고 치료될 수 없는 질병은 영혼의 질병이요 불신의 질병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니 얼마나 처참한가!
오늘도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을 만족시키는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 자기만족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2:5)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막3:35)
(2)은혜의 역사가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자의적인 말씀이해 때문이었다.
Ⅲ.결론.
에덴의 범죄 후에 가장 극명하게 사람들을 괴롭혀 온 것이 바로 질병이다. 질병은 축제에서도 종교에서도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오랜 질병은 인생의 가치를 포기하게 하고 절망과 미신에 사로잡히게 하고 오랜 질병은 원망만을 키워 점점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더욱 단절시키고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이 베데스다의 사건은 병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창조자로서의 주님은 인간의 알량한 긍휼을 초월하여 무한한 긍휼로 다가오시는 주인이심을 실감케 하는 표적의 사건이었다. 주님이 바로 ‘베데스다’ 즉 친절의 집이시다.
이 환자 역시 38년이란 긴 치료생활에서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막5:26 참조)에 예수를 찾았던 혈우병에 걸려있던 여인처럼, 다소 미신적인 생각이면서도 오로지 요행을 바라고 누워있었던 것이다. 즉 이제는 인간이 포기해 버린 절망의 상황에서 시시각각 마지막의 순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절망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 긍휼로 찾아오신 주님은 모든 부정적인 절망을 걷어 버리시고 당장에 치료를 완성하신 은혜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치료자이신 주님이심을 보이셔서 인간의 긍휼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적 사랑을 확인케 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신 주님의 명령에 “나는 절대로 스스로는 못 일어나요 중풍 병으로 누운 지가 38년입니다. 나는 불가능해요!” 하지 않고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는 믿음의 응답이 함께 하였을 때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친절의 집’이라고 하는 ‘교회’가 긍휼이 말라버리고 각자가 소외를 느끼는 또 하나의 명목상의 베데스다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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