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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적이야말로 예수께서 생명의 주인 되심의 증거의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아직까지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일으킨 사람은 없었었다. 그러나 단 한 분 예외가 있었는데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Ⅰ.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1~
(1)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그것이 설령 마지막 죽음일지라도 그렇다.
1.고난은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9장에서 소경이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병과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고 말씀하신다.
2.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고 수없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레26:44; 신4:31, 신31:6)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 왕상6:1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9:10, 시37:28, 시94:14)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Ⅱ.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통분할 수밖에 없다.(35, 38)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38)
모든 사람은 마리아와 마르다 처럼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 내어 주는 슬픔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오늘 구원받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고난과 슬픔으로 우는 우리 옆에는 항상 그 아픔을 함께 감당하시는 주님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도, 역경과 환란 당할 때도, 함께 웃고 우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갖기를 바란다. 나의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여기 “통분히 여기다”라는 말은 [ejmbrimavomai, embrimaomai; 분개하다, 비난하다, 억울함으로 한숨짓다, ~에 대하여 불평하다]
1.사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yj vp,n<; hai nepesh)"이 된지라”(창2:7) [yj 산, 살아있는 것' vp,n<; 호흡하는 생물, 생명력]
2.인간의 범죄로 죽음이 왔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죽음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3.이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분의 눈물을 흘리신 주님은 그 저주의 죽음에서 모든 인간이 자유 하시기를 원하셨다. 창세 전부터 이 죽음의 저주를 아셨던 주님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죽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인류대신 모든 인류의 저주를 몸소 십자가에서 지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죽음의 잠을 깨울 수 있는 자는 단 한 분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인간의 생명을 친히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이다.
4.주님 앞에 더 이상 죽음은 절망이 아니다.(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한 그의 사랑 어린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그가 이기지 못하는 죽음이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친히 무덤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확증하셨다.(고전15:20 참조) 그리고 하늘의 일을 나타내 보이셨다.
Ⅲ.그러나 여기에도 인간의 역할이 요구된다.(44)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오빠를 장사지낸 두 누이들은 어쩌면 한결같이 같은 원망 섞인 아쉬움으로 탄식한다.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마리아가 …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그런 입장이었어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거리나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거리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왕의 신하를 고치신 두 번째 이적에서도 34Km의 거리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4:50) 그 시로 낳았던 역사가 있었다. 이 우주 가운데 충만히 계신 주님께는 거리나 시간은 더 이상 제약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1.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신다.(39)"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도 사람이 할 일을 주셨다. 죽음과 생명의 간격인 무덤 앞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무덤을 열고 나오실 때는 천사를 시키셨지만 여기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전에 사람을 사용하신다. 이 역사는 오늘 우리가 계속 해야할 일이다. 많은 무덤과 죽음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무덤 문을 여는 것처럼 단절된 하나님과의 만남을 믿음의 사람들이 주선해야 할 일이다. 언제나 주님의 구원의 역사에 사람을 참여시키시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
2.믿음을 요구하신다. “돌을 옮겨 놓으라”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조금은 인간적인 모습이 마리아에게 나타난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할 일은 한가지밖에는 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26) 하셨던 주님은 또다시 권면 하시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Ⅳ.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41~44)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셨고 그 기도도 사실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과연 누가 이런 간 큰 선언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나는 시체 앞에서 “나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4-25) 라고 하신 생명의 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10:10)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는 생명의 주인만이 가능한 역사다.
1.우리의 생명은 다 주님의 손에 담보되어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2.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운데 생명으로 臨在하시는 주되심을 시인하는 것뿐이다.
우리들은 근본 “죄로 죽어” 있다. 그런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나오라”하시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우리는 새생명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3.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신다.(44b) 여기에 또 하나의 인간의 일이 있다. 썩은 시체에 생명을 주신 주님은 그 다음의 활동을 위해서는 역시 사람의 손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하실 일과 인간의 하실 일이 오늘의 구원의 도구인 교회 속에도 있음을 보여주시는 상징성이 여기도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새 생명이 되지만 거듭난 생명이 이 땅에서 생명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대는 죽음에게 바쳐졌던 사망의 모습이 아직도 있고 그것을 벗겨주고 다니게 할 책임이 먼저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우리 주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4.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께 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 땅에는 아직도 구원받았음에도 변함없이 모두가 육신은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지속될 저주는 아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든 인류를 죄의 저주에서 자신의 피로 사셨기 때문에 이 죄악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그 시간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고전15:51)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고 약속하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15:22~23)
Ⅴ.결론.
주님만이 우리인간에게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고 죽음에 이른 절망의 질병을 고치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생명의 양식인 하늘의 떡으로 배불리시고 험한 시험의 고초의 장소에 친히 찾아오시며 눈뜬 소경들에게 빛을 주실 수 있고 생명을 친히 주시는 우리 곁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마28:20 참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주님이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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