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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양털 염색이 여기서 이루어졌다는 기록들이 있고 그리 크지 않은 도시지만 상업과 염직 공업이 활발해서 대부분이 넉넉한 생활을 했고 주로 섬기는 신은 음란한 키벨레 여신을 섬겼고 그런 속에서 사치하고 성이 문란한 가운데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큰 책망을 듣고 있는 교회로 지금은 폐허로만 남아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요한을 통한 회개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도시는 AD17년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AD36년에야 겨우 복구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경험도 충분히 경계가 될만한데도 주님의 회개의 충고가 메아리로 끝 난 것은 안타까운 또 한의 교훈이다.
이렇게 외형적인 모양으로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로서 사람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1f) 여기에 나타나시는 주님의 모습은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성령과 하늘의 영광의 모습으로 완전한 영광의 일곱별을 가지고 나타나셨다.
Ⅰ.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진 교회가 되었다.(1b~2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세상에서는 명목상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또는 일본 같은 명목상의 왕정, 대기업들의 명예이사 등등의 것들은 이름만으로도 대단히 부러움을 사기에충분하고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더러 있다.
1.이름뿐인 신앙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만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믿음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직분도 이름뿐인 직분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번 학생회 수련회에 밥을 해 먹기 위해 교회의 큰 전기 밥솥을 가지고 갔다. 차에서는 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갈 만큼 적지 않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져가서는 밥을 해먹을 수가 없었는데 이유인즉 밥솥 안에 쌀을 씻어 안치는 속 밥솥을 따로 씻어 엎어 두기 때문에 가져가지 않아서이다. 겉으로 볼 때는 속에 솥이 들어 있는지 들어 있지 않은지 차이가 없이 분명히 전기 밥솥인데 밥을 해먹을 수 없는 밥솥이었다는 말이다. 진리는 언제나 평범한 데 있다. 믿음이 그와 꼭 같을 수 있다. 주일날이면 성경책 들고 교회는 가는데 주님께서 필요로 할 때는 쓰이지 못하는 신앙이 그와 같은 것이다.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과 하나님 앞에 작은 역할이라도 귀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역이 중요하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자리는 그곳이 무슨 무슨 교회가 있었다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신앙의 사람이나 교회가 다 사라진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이 이러한 경계를 받고도 회개치 못한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경계는 오늘의 우리 교회 속에서도 새겨듣지 못하면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that you have a name that you are alive, but you are dead; 명목상으로만 살아있고 실재로는 죽었다.”는 번역이 있다. 바울 사도의 전도자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비슷하다고 이해된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They ⓨprofess to know God, but by [their] ⓝdeeds they deny [Him])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입으로서는 모든 신앙의 부분들을 다 인정하면서 행동이나 삶에 부딪힐 때는 거절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의 두려운 경고는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5)는 말씀이다.
2.주님은 “깨어라!”라고 경고하신다.
거의 죽어 가는 상태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깨어라!”라고 명령하신다.
“일깨워 헬 gregoreuo; Wake up)” 깨어 있다, (문자적, 상징적,)정신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 (3)“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If therefore you will not wake up”
학교 가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뒹구는 아들을 향하여 “야! 시간 다 됐다, 일어나라!”고 야단을 치면서도 영혼의 잠에 빠져있는 자신을 향하여 경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지각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에서 비극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만 깊이 빠져 있으면서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깨어라!”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각성시키는 표현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마귀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기 위해서 깨어야 하고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경계하시기를"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13:34~35)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4)고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3.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셨다고 책망하신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신앙인이 하늘을 향해 깨어 있는 것은 기본이다. 이 기본이 안되어 있으면 과연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님께서 오늘 나를 보시면서 “내가 너를 볼 때 신앙적으로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변명할까?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나 우리 각자를 향하여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책망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말씀드릴 수 있을 까? 여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답변을 4가지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Ⅱ.처음 신앙을 시작할 때를 추억할 것을 권한다.(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1.믿음 생활을 위해 포기한 것들을 생각해 보라! 는 경계이다.
세상의 온 갓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믿기로 각오하지 않았는가?
온 갓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확신했던 귀중한 경험은 한번 주님을 만난 경험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감격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처음 맛본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누구나 빼앗길 수 없는 아름다운 영혼의 추억일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떤가...? 주님과 만남의 감격에서 느낀 사죄의 감격은 신앙이 어렵고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새우기에 충분한 첫사랑의 경험이다.
살전1: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이 경계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인 영광의 순간을 영원히 놓질 수 있다. 가장 고대하던 사랑과 인자하심이 가득하신 주님의 얼굴을 뵙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적어도 모든 것에 실패했어도 주님 다시 오심에는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승부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시키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5:4~6)고 선언하고 있다.
오늘 의사가 암의 징조를 진단하면서 당신은 술을 끊지 않으면 돼지고기를 끊지 않으면 죽습니다. 라고 하는 경계보다도 무서운 경계가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이다.
Ⅲ.신앙의 지조를 가진 사람들과 승리자에게 약속하는 영광.(4~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앞에서도 생각한 바 있지만 이 두 절 속에 나타나는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라든가 “흰옷을 입을 것이요” 했는데 다른 데 표현들이 많이 있지만 19:8에서는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고 하늘에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들의 합당한 행실로 이해를 했으면 한다.
1.거의 죽어 가는 교회에도 신앙의 지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4)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교회에 대해서 막말을 할 수 없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다 죽어 는 사대 교회에도 아직 세례로 말미암아 입은 그리스도[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를 더럽히지 않은 죄와 타협치 않은 소수의 순결의 사람들이 있다. 고 주님께서 증거 하신다.
흰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의 소유자들이요,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2.승리자에게 약속하는 영광.(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때로 우리는 신앙의 흰옷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신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성도가 입은 흰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죄와 타협치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흐리지 않게 기록된 사람들이다.
영광의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칭송될 이름이 된다. 그것은 세상에서 구원의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요 믿음으로 오는 어떤 불이익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것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이미 약속된 것이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눅12:8; 마10:32)
Ⅳ.결론.
사람들 보기에는 외형적으로 모든 것이 다 갖춰진 교회 그러나 향락과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다 치장해도 주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모습일 수 있다. 오늘 날 권력 앞에서 힘을 잃고 이권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신앙,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온 갓 치장을 다하고 허세를 부리는 신앙은 주님께서 오실 때는 빈 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경계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신앙을 하다보면 이러한 사대교회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소수의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이기는 자,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6)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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