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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리 나라를 온통 들썩거리게 했던 복권에 관한 뉴스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기면서 지금도 계속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허탈과 한숨을 선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몇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까지도 기대를 걸고 운명(팔자)을 바꿔보려고 희망을 건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복권을 사지만 그것은 당첨자들을 위한 들러리를 서는 것이 되고 만다. 주인공이 될 것인가 들러리를 설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몇백만 분의 확률이 아니라 1:1의 확률 즉, 정수의 확률이다. 그런데도 등한해서 되겠는가?
사람들은 약속이 보장되지 못하는 신념이라는 것을 위해서도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성공한 것처럼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약해지기는 했지만 인간만이 가지는 믿음으로 약속 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확실한 약속을 갖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강할 수 있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이 주님의 교훈은 마태복음 16:24~27; 누가복음 9:23~26 공관 복음에 함께 기록되고 있는 귀중한 가르침이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한마디로 생명의 절대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으로 이해된다. 일생에 가장 귀중한 목표가 생명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교훈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천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는 말씀이다.
Ⅰ.이 생명의 가치를 주님을 따르는 것과 관련시키고 계시다.(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가치 없는 인생, 아니 참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죄의 감옥에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에덴에서 잃어버린 참된 인간의 가치를 찾아준 귀중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의 사실이다. 이 십자가는 어떤 인생도 영원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지 못할 저주받은 운명을 바꿔놓은 놀라운 희생과 사랑의 역사로 구원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격과 충성의 영원한 푯대이다. 그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졌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나와 너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만 할 차례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실질적이지 못하면 안 된다.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120년 동안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방주를 짓는 일을 했다. 이것을 지속하는 것은 분명히 유쾌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긴 세월은 그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노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고난의 일을 지속하였다. 그것이 일상에 있어서 십자가와 비교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죽는데 까지 순종하고 포기하는 것이고 그러한 삶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육신을 위하여 살면 잃는다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믿음 때문에 무엇을 잃는 사람은 복된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11:24~26 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헬 aparneomai, 거절하다, 금하다, 무시하다, 부인하다, 비난하다, 포기하다] 했는데 자신의 입장과 처지, 위신과 이익조차도 포기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말씀을 같이 기록하는 누가복음에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매일 매일 우리의 삶에 신앙 때문에 당면하는 일들을 한결 같이 믿음으로 감당하지 못하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시려고 피를 흘리셨고 이제는 나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내가 져야한다.
Ⅱ.이 생명은 육적인 생명을 희생해야 얻는다고 가르치고 계신다.(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먼저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하늘의 기업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위하는 두 가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육신을 위하는 것’과 ‘복음을 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과 순간보다는 미래와 영원을 약속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현실의 귀한 것들을 투자해야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23) 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업들도 투자가 있어야 사업이 융성할 수 있고 영적인 입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분명히 우리가 구원과 은혜를 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나 투자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안지만 이제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에 있어서는 썩어질 세상의 것들을 투자하고 영원한 것을 키우는 놀라운 약속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참으로 가치 있는 희생이다.
여기에서 “제 목숨을 잃으면”[헬 apollymi,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다, 잃다, 손상시키다, 멸망하다] 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죄를 범하고 영안이 어두운 인생들은 육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을 위해서 살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육신의 욕망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교회와 역사 속에서 이 귀한 생명 구원 사업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헌신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영광스러운 이름들로 별처럼 빛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라고 확신하고 있다. 오늘 나는 육의 삶을 위해서, 영원의 영광을 위하여 어느 쪽에 시간과 재산과 인생을 투자하고 있는가?
Ⅲ.그러나 이 생명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말씀한다.(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 무슨 일이든지 예사로 여기고, 사치 풍조가 만연할수록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도 벌레 한 마리, 파리 한 마리로 간단히 생각하는 안타까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 운동을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늘 강조하셨던 부분이 한 생명이 천하 보다 귀하다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요지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가치 평가는 한 생명이 살게 된다면 온 천하를 다 주고도 살리시겠다는 것이었다. 그 한 생명이 누구일까? 바로 여러분 각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들조차도 주님의 생명으로 대신 사주신 생명을 구하게 여길 줄 모른다. 어떻게 해서 얻은 생명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한 생명이 상처를 받는 것들을 너무나 쉽게 생각해 버린다.
이것은 정치나 무엇을 위해서는 한 생명이 바쳐져도 좋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가치이다. 주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금보다 귀하게 다루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그의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들이 되어 버린다. 그의 자랑스럽던 명예, 종교, 학벌, 권세 이 모들 것들은 절대적인 자리에서 가을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과 같은 것들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처럼 확실히 만났다면 같은 현상을 가져와야 옳다. 그 이후로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최종 목표를 이 지상에 두지 않고 영원에 두는 것을 듣는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7~14)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의 영화를 위하여 신앙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목숨 바쳐서 성취하고자 하는 귀중한 것은 무엇인가? 시간 돈(재산)을 다 바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세상의 명예, 권력인가? 아니 목숨 바칠만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그 것이 믿음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영원에 속한 것인가 분명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신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그 부인은 약사이면서 교회의 女 執事였었다. 이 부인은 선거가 시작되면서 남편의 선거구 내에 있는 모든 시골 교회를 돌면서 감사연보랍시고 봉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 있는 목회자들은 그 연보를 감사연보로 바치려면 선거 후에 가져오라고 하고 거절했었다. 다행인지 그 남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봉투는 다시 거절되었던 교회들에게 보내졌다. 평상시에 어려운 시골 교회를 돌아봤다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세상의 영달을 위하여 우리는 신앙의 부분들을 잘못 사용하려는 시도들을 하곤 하는데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는 경계를 주고 있다.
과연 오늘 나에게 가장 귀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틀림없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Ⅳ.이 세상을 극복해야 함을 가르치신다.(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주님의 말씀은 인정받지 못한다.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이 된다. 음란한 소돔성의 롯의 사위들은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 받을 것이라’는 천사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9:14)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와는 정 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을 위하여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는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는 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우리는 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영적인 것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순간적인 것을 위하여 기꺼이 영원을 포기해버리는 어리석은 삶들을 살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운명을 바꿔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십자가에 희생해 주신 주님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셨고 하늘나라를 향한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육신의 삶이 있을 뿐 아니라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생명을 위한 투자, 영원을 위한 투자 분명히 해볼만한 사업 아닌가?
을숙도 문화 회관에서 있었던 레나 마리아의 성가 공연장엘 갔다가 자리가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는 좌석이 없어서였다. “그 귀한 공연을 거기까지 가서 못보고 되돌아 온 것은 참 안됐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우리각자가 인생의 마지막에 천국 문에서 거절당하지는 않아야겠다. 물론 거기에 우리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할 만큼 처소가 부족하지도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을 하나님도 아니시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고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감격하는 사람들만 들어가는 것이 허용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도 사거나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가치,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 주신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잃지 말아야겠다는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야겠다.
하나님은 무한히 긍휼 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b) 하셨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심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까지 용서하지는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순간과 영원, 나는 과연 어느 쪽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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