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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우리의 시대에 신앙의 삶에 중요한 것은 예배의 회복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패는 예배에 좌우된다.
주님께서는 당시 사마리아 성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고 불경건하게 여기던 이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모두도 바른 예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누구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고 바른 예배가 어떤 것임을 이해 못하는 사람도 없다는 교훈을 이 주님과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비록 범죄 하여 그것이 왜곡되어서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바뀌기는 했어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알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 소꿉장난하는 아이들조차 물론 평소에 그들의 부모들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도 했겠지만 제사하는 행동을 흉내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을 만큼 무식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고 또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 없어서 예배를 못 드릴 가난한 사람도 없다. 그런가 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만큼 죄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금지된 인간도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절망 속에 신음하며 하나님 앞에 멀어진 인생들을 초청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요소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은 우리의 가지고 있는 외형적인 것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가지고 있는 내면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이미 마련된 십자가의 제사 앞에 제외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없으며 이 말씀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못 드릴만큼 소외된 사람도 없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드릴 예물을 친히 준비 하셨던 주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친히 준비하시고 우리 모두를 화해의 제사 앞에 초청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사람이 준비하는 어떤 제물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제물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날 예배하면서 드리는 연보가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고 기쁘게 하는 진정한 제물은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은 모든 인류를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Ⅰ.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20~21)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유치한 종교일수록 장소를 중요시 여긴다.(절간도 명당의 위치에 세워진 절이라야 영험하다해서 긴 산 준령의 끝에 좌청룡 우백호 등등의 조건이 갖춰진 장소에 세워진 사찰이 많다.) 신과 가까운 곳으로 여겨지는 산꼭대기가 아니면 피라미드 같은 높은 조형물을 쌓아서 신의 경지에 가까이 가려고 시도했다.
오히려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다.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빌립보의 깊은 감옥 속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에 모자라지 않았고, 외딴 섬이었던 멜리데 섬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에 소외되지 않았다. 우리와 지구의 정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나 여기 부산 서면 땅 어디서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세와 내용임을 배운다. 주님게서는 오늘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오해의 소지는 있다. 안방의 잠옷 차림으로 인터넷을 접속한 모니터 앞에서의 모습을 지지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디나 계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의 행위일 뿐이다. 인간 편리 주의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예배가 아니다.
오늘도 예배의 중심은 이미 드려진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이 중심이며(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이것은 함께 모이는 예배의 처소에 오지 않고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터넷으로는 불가능한 예배의 중심이다.
Ⅱ.무지의 예배와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고 드리는 예배가 있다.(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분명히 예배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무엇을 원하시며 기뻐하시는가를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데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제사가 그런 것들이다. 막연하게 “이렇게 하면 우리의 신은 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기뻐할 것이다.”라는 단순한 추측에서 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들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런 죽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원하시는 것들을 말씀하셨고 주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이행하는 예배는 아무리 많이, 자주 드린다고 해도 의미가 없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를 지적하신바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사무엘은 사울을 향하여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라고 지적 하신바 있다.
주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는 자의 예배는 주님께서 돌아보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단순히 주일 하루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다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 순간 주님과 함께 사는 임마누엘이 더 중요한 자세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원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알고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막연히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하면, 이걸 드리면 기뻐하실 거야!” 라는 막연한 기대로 예배당을 찾는가? 단순히 예배하는 장소에 참여한 것으로 예배드렸다고 자위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지라도 가능하다.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을 행하면서, 주님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반드시 그러한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가 어제까지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당장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짓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아신다.
Ⅲ.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하나님은 요구하신다.(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를 드리는 장소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함께 하는 삶이 예배를 드리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배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순서이다.
1.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요구하신다.[헬 pneuma - 호흡, 바람, 영, 생동하는 원리, 성령 etc.]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우리의 모든 것 곧, 몸과 인격을 총동원하여 영광을 드려야 한다. 보이는 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요소로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이것만이 사람이 가지는 가장 귀중한 가치의 행위이다. 특히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정의(知情意) 모두를 다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대화와 교제에서도 인격적인 교제가 중요하고 부부간에도 인격적인 교제가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감정이 앞서버려서 이성적으로 들어야 할 말에는 건성으로 넘어가 버리고 나중에는 이것이 다시 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창조주 되심과 독생자를 통하여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사랑의 역사를 의지적으로 알고 가슴으로 감격하며 그러한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살려는 의지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것으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인간의 또 하나의 최고의 속성까지를 요구하신다.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11에서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 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롬2:9) 어떤 대상도 영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간 창조의 독특성을 여기서 보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가능한 사람만이 가지는 속성인 ‘영으로 더불어’ 가지는 교제가 예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신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의 이성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단순한 가슴의 감격만으로 안되며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려는 의지 없이는 의미가 없다. 사실 모든 것이 어울러져야 하고 여기에 우리의 심령 깊은 영혼의 사람까지 포함되어져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뜻이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은 우리의 의지보다도 성령을 의하여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
2.진정으로…
예배에 있어서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중요한 점은 “진정으로” 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어떤 가식이나 거짓도 용납되지 않음을 가르치신다. 여기에 쓰여진 “진정으로”[헬 aledeia - 진리(요8:32), 참됨, 진실성, 사실 etc.] 라는 말이 ‘잘못의 반대’ 라는 의미를 가진다. 요한 복음 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쓰였던 동일한 낱말이다. 가려진 것 위장된 것은 오래 갈 수도 없고 평안할 수도 없다. ‘사실’과 ‘진실’만이 힘이 있고 용감하며 자유 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주님은 어떤 위선이나 가식도 싫어하신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예배에조차 이런 죄악 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예배에 용납하실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에게 죄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조차 감추려고 하는 행위가 문제이다. 우리 주님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예배는 죄를 감추는 시간이 아니라 내 놓고 해결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사실을 가지고 나가 하나님과 확인하는 시간이 예배이다. 이외의 어떤 것들도 예배에 행해지는 것은 오히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방해할 뿐이며 예배에 하나님 아닌 인간이 영광을 받아서도 안되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Ⅳ.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최초의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이 죽었지만 찾으셨듯이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계실 때에도, 그리고 오늘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바른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이것은 외형적인 기준이 아니다. 비싼 옷이 아니라도 괜찮다. 꼭 부자의 많은 연보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과거에 주홍 같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괜찮다. 주님의 부르심과 찾으심에 범죄하고 숨었던 아담처럼 변명하지 않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께서 바로 나의 죄 때문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음을 믿고 회계하고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오늘도 주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들을 오늘도 주님은 찾으신다.
Ⅴ.우리 각자의 최고의 가치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라(worship)는 의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돌린다” 는 뜻임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최고의 가치를 드리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회복되어야 하고 그것이 신앙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은혜보다도 우선 되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시간 약속조차도 귀한 분과의 약속은 귀중히 여긴다. 귀한 분과 약속을 했다면 약속시간 전에 반드시 가서 기다리게 되어 있다. 세상에서 비교될 수 없는 더 귀중한 분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약속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히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영광을 주님께 드리고 거기에 응답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잔잔히 우리의 삶에 받아 누리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감격은 나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감격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변화된 삶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것은 일순간에 은혜 받았다고 감정만 다라 올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실컷 웃고 자리를 뜨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그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적인 인격인 감정이나 이성과 의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며 꾸미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과 희생의 제물로 자신을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오늘도 우리 믿는 자들의 영과 더불어 교제하시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도 비록 사람들의 보기에는 화려하지 못할 지라도 이곳에 임재 해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식하며 자신의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영과 더불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넘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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