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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요일 3:7~12 2003-03-16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분명히 사랑보다 좋은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임에도 가장 위력을 발하는 위대한 능력도 사랑보다 큰 것은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력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형체를 갖지 않은 낱말은 그만큼 실천에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사랑은 역시, 육신으로는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육신의 삶을 뛰어넘고서야 사랑은 위력을 나타내게 되는 데 그것은 죽음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써 완전한 인간 사랑을 표현하셨다.

사랑은 관계에서 발생하고 관계에서 필요하고 또 관계에서 귀중하다. 사랑은 분명히 말에 그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표현하기까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인류는 십자가위에 피 흘리시며 두 팔을 벌려서 사랑으로 세계를 끌어안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흐느끼고 그 사랑 대문에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그 사랑을 전하는데 목숨 바치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 자녀라는 사실은 사랑하는 모습 속에서만 증명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사랑이 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애써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는 인간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도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실적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에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는다. 사랑의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짐짓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이 아닌지...

언제나 사랑의 문제는 그것이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것으로 끝나버린 것에 경계를 가지며 오늘도 그렇게되지 않았으면 하는 경계를 가지고 이 말씀을 전했으면 한다.

Ⅰ.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먼저이다.(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말씀은 같은 요한 사도가 쓴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과 같은 말씀임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 인류 역사 중에 어느 사람도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죄로 인하여 운명을 저주하고 절망과 팔자 타령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저주스러운 운명을 가진 인생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 받기에 부적합한 인생은 인류 중에 아무도 없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다. 믿는가?

아무리 전도를 받은 바가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경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 사랑의 손길로 이끌었기 때문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범죄하고 말라 바스러질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고 숨어버린 아담을 먼저 찾으신 것도 하나님이셨고 우상장사 하는 데라의 아들을 믿음의 조상 삼기 위하여 갈데아 우르 땅에서 불러 낸 분도 하나님이셨고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던 이스라엘을 끌어내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오늘 이 죄악의 땅 대한민국에서, 범죄의 부산도성에서 우리를 먼저 불러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없으셨다면, 십자가에 피 흘림이 없으셨다면 우리가 여전히 지금도 멸망의 자식으로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마다 사명을 주셨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누구에게든지, 오늘 나에게도 사랑을 입었으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할 제목이다.

Ⅱ.오늘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삶 속에 가져오는 것이다.(7b, 9~10) 우리는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의미의 다른 표현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이다.

1.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자신의 삶을 귀하게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실 사랑의 기준의 첫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4) 상당히 이기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 자신의 고기 덩어리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자신 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입은 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주어진 자신의 인생을 불평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요, 적극적으로는 그 주어진 운명이 어떠하든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가진 것에 관계없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외롭던지 쓸쓸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고, 진정으로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 나의 인생이 이렇습니까?’ 고 울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 어떤 것이든지 주님께서 주신 인생이라면 살아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의 사람을 말한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귀중하게 여기고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나의 인생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났다고 할 때 운명을 저주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모양과 그 위치 그대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아프든지, 슬프든지, 행복하든지, 고통스럽든지 “오 하나님!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인생을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되게 하는 것이다. 믿는가?

2.오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①하나님을 예배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경험하고 감격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이 되신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나의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다시 칠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주의 희생의 십자가를 기념하라고 하면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고 당부하고 있다. 분명히 주님의 날은 주님의 승리의 부활의 날이지만, 예배의 내용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의 실체로 오셔서 죽으신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배의 감격은 당연히 그의 사람들을 즐거워하며 감격하는 것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②그리고 그 사랑 받음의 감격으로 세상에서 생명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산 제사이다. 주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나의 사랑과 은혜의 삶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③주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의 잃어진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신앙 안에서의 형제사랑이지만 이것은 당연히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 참된 사랑에 굶주려 있는 교회 밖의 영혼들에게로 뻗어 나가야만 한다.

이 21세기에 다시 제시되고 있는 교회 갱신의 목록 중에서 바람직한 모델은, 교회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형태에서 선교를 이루기 위한 형태로 바뀌어 가야한다고 주장되고, 교회를 키우는 일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오던 신앙 논리다. 사랑의 공동체라는 교회는 결국 밖으로 사랑을 주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이런 교회는 결국 자신의 사랑도 유지해 갈 수 없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세상을 복음으로 사랑하고 변화시키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고 확장하기 때문이다.

Ⅲ.사랑은 사랑함으로만 확인된다.(8, 12)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주님께서는 요한 복음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고 말씀 하셨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은 닫혀 있어도 사랑하는 삶의 모습 속에서 고백되어져야 참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이다. 이것은 받는 사랑보다는 분명히 주는 사랑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자기 사랑이 사랑의 기본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결국 구속받은 인생에 대한 감격이고, 계속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직 어린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간다. 아직도 자기 몸만 단장하고 꾸민다면 그것은 분명히 유치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예수 상]

우리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복음으로써 잃어진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생각이나 말, 그리고 설교 단상에서 그친다면 말장난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하는 모습으로 그 십자가의 가치가 우리의 삶 속에 역사 된다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절대 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

초월해 계신 하나님 의식에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과 떨어져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실재 성도들의 삶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만나는 역사를 가져야 하고 이것이 믿음을 가진 모습이라는 가르침이다.

Ⅳ.사랑은 감격하게 하고 섬기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사랑 받음에 대한 감격은 어떤 것도 장애로 느끼지 못한다. 사랑에 감격하여 사는 삶은 고달픈 줄도 모르고 지칠 줄도 모른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반대를 해도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만나고 찾아다닌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 받음에 그러한가 묻고 싶다. 사랑하는 동안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한다. 상대가 좋아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도 좋은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상한 능력이다. 그러한 사랑은 반드시 재생산으로 가게 되고 성장에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역시 이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변화에서도 혼란을 격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종들의 가치가 바뀌어야 한다. 섬기는 자로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원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요구되어지는 바람직한 지도자의 유형조차도 섬기는 종으로서의 리더십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섬기는 지도자의 이미지는 지도력을 특권이나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주어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섬김”의 의미로 이해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바로 사랑 받음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격하면서 눈물 흐리는 경험을 갖게 된다.

141:1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리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만리 장천에 멀리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희생의 피 흘리심은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로 들리는가?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살아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는 내가 그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 감정은 점점 무디어지고 희미해진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

사랑의 사람들은 불평이 없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면 내가 사랑 받는 감격도 더 풍성하게 될 것이고 나에게 사랑 받는 사람도 감격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우리가 말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겨하며 나의 가슴속에 메말라 가는 사랑을 다시 뜨겁게, 뜨겁게 회복하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