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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아름답게 움직인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복음 속에 살면서도 그 놀라운 능력을 10%도 삶 속에 적용하지 못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날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이 제목의 말씀을 공동 번역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 합당한 사람보다. 하늘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 하고 사실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이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앙의 사람들로 이런 질문을 더러 해 보게 된다. 우리는 이 땅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어려서부터 학교로 학원으로 밤과 낮으로 좇아 다니며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소한 우리는 이 땅에 적절한 사람이 되려고 16년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애를 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적절하게 사용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거짓말일까?
그러나 과연 하늘의 사람으로 합당하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공부하고 노력하며 애 쓰는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 땅은 유한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삶을 잘 지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 쓰면서 영원을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과 물질을 쓰는가? 우리 자녀들이 교육하는 시간과 물질에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누리는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분쟁만을 일삼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 24)고 환기시켜 주고 있다. 왜 생명과 능력의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음으로 가느냐? 는 책망이다. 그것은 마치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사줬는데 그것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들거나 지고 가는 것과 같은 꼴이다.
십자가는 곧 복음이요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절정이다. 분명히 생명의 복음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영향력에 더 좌우되고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영광과 위엄과 존귀가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독생자를 제물로 죽이셔서 이 땅에 복음을 끼치신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울 사도 보다 더욱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 하는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있다.
이 말씀을 나누면서 오늘 ‘나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감격과 능력으로 이끌려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Ⅰ.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일 것이다. 언제나 나를 죄와 절망에서 끌어 올려 주신 주님의 그 엄청난 은혜를 의식하며 새로운 생명을 주신 그분을 기쁘게 하려는 삶을 살려고 애쓸 것이다.
1.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습이다.
이것은 좀 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다. 신앙의 초보에서는 언제나 옆의 사람을 의식한다. 언제나 삶이 대상이 된다. 연보를 드려도, 집회를 참여해도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계속 그런 단계에 우리의 믿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종교 개혁자들의 기치는 “하나님 앞에서” 라는 신앙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과제다. 사람의 평가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더 신경 쓰는 사람, 그러한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이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다. 구약의 인물이지만 벌써 이러한 복음 속에 산 인물이 바로 요셉이었다. "…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b) 요셉은 이방 땅 이방인의 집에서도 그 곳에 임재 해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진노를 피해 하란의 외삼촌댁으로 도망하던 야곱은 ‘(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창28:16~17) 고백한다.
반면에 복음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연보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삶을 세세히 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은 바로 은혜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0)는 고백이 가능한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살 수 없다. 예배당에서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화장실에서조차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는 임마누엘을 사는 사람이다.
2.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고 말한다. 다른 것에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지만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는 당부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 자체가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하였고 히브리서 12:28 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라고 당부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삶을 산 에녹을 소개하고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경계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5~6)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 싶어도 역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는 안타까운 경계도 듣는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적 과제를 입으로 외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냐 하면 육신의 있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Ⅱ.구원받은 모습이 있는 삶.(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출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받을 만큼의 의로운 행위는 죄진 인간에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삶은 의로운 삶을 스스로는 살 수 없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고 선언하셨다.
분명히 인간의 선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구원이 삶에 표현되고 전시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28b) 했는데 여기서 [빙거, 헬-endeiksis(엔데익시스)] 입증, 나타냄, 표시, 증거(proof, indication, demonstration, pointing out)를 의미하는 말씀이고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과 고린도 후서 8: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되고 비슷한 의미를 바울 사도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6) 고 지적한 바 있다. 누가복음17:20b~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각자의 안에 가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사람의 삶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교훈이다.
나에게서 어떤 “빙거(증거)” 가 나타나고 있는가? 우리 교회에서는 과연 어떤 “빙거(증거)” 가 나타나고 있는가?
Ⅲ.복음을 나눠주는 삶.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8절에 “…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는 바울의 감사를 접하게 된다.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닮은 사람이고 자신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사실에 감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눠주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하나님의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는 삶이요 주님의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는 삶이라면 멸망하는 세상을 향하여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고 한 사람이라도 멸망과 저주의 삶에서 자유케 하고자 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은 복음 속에 감격한 모든 사람들의 일관된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는 바울 사도의 선언이나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는 주님의 말씀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거나 누리는 좋은 것에 대하여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사랑의 효과의 확산을 위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말이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누리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고민하고 또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된 삶을 제시하고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고 그 어머니의 품속 같은 포근함에 우리 모두는 감탄하며 또 다른 사람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안타깝고 죄스럽게 여겨지는 사람은 그것을 옆으로 나누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다. 이 복음 온 인류를 다 참여시키고도 모자라지 않는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복음을 확산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의 뜻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먼저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적진으로 둘러싸인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고 성문 어귀에 죽는 것보다는 적진 아람 군데에게 항복하고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기로 각오한 문둥이 네 사람이 뜻밖에 모두 도망간 아람 진에서 실컷 먹고 감추고 하는 말이 “…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왕하7:9)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양식에 기갈 되어 있고 우리는 배불리 먹고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광명한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이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는 삶이다.
Ⅳ.고난도 감당하는 삶.(29~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우리가 죄를 인하여 받는 고난은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고난도 분명히 있다. 우리가 짐짓 잘 못 생각하면 구원받으면 소위 말하는 ‘불행 끝, 행복 시작’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해서 그렇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는 말씀은 바로 같은 말씀이다.
바울은 좀더 적극적으로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고 당부를 한다. 베드로 사도도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벧전3:14)
이 세상을 산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마다 고난의 종류는 다르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죄로 인한 고난을 받았다면 이제 주님을 만나고 부터는 의(義)를 위한 값진 고난을 감당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면 이제부터는 고난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살후1:5)
그러나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 것은 죄로 인한 고난은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죄를 짓고 고난받으면서 그것이 의를 위한 고난이라고 착각하고 앉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착각이다.
베드로 사도는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복음에 합당한 삶은 ‘내가 신앙 때문에 받는 고난, 하나님을 위한 고난,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얼마든지 무엇에든지 감당하겠다’는 자세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여러분 가운데 고난 당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고난의 이유를 헤아리고 그것이 진정 신앙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거기에 비교될 수 없는 영광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Ⅴ.결론.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 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구원받은 모습이 있는 삶이다. 복음을 나눠주는 삶이다. 고난도 감당하는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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